중국 후한의 역사가, 한서의 저자 「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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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를 저술한 반고

'반고'(班固)는 부풍 안릉 사람으로 자는 '맹견'(孟堅)을 쓰며, 중국 후한시대인 32년에 태어났다. 반고의 집안은 전통적인 학자 집안으로 반고는 전한 '무제' 시절에 월기교위를 지낸 반황의 증손자가 되며, 아버지 '반표'는 '사기'의 후전을 편찬하는 등 역사 저술활동으로 유명한데, 이러한 반표의 행적은 반고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인다. 반고는 아버지로부터 독서와 학문의 기초를 배워 아홉 살에는 이미 문장에 능했다고 하는데, 16세가 되자 낙양의 태학에 들어가 여러 서적을 보며 학문을 익혔지만, 54년 반표가 사망하자 태학에서 나와 삼 년 상을 치렀다고 한다. 반고는 전한의 성립부터 신나라가 멸망하기까지를 다룬 역사서인 '한서'(전한서)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 또한 반표가 시작했던 것으로 반표가 사망한 이후에 반고가 이어받아 계속하였다. 반고가 전한의 역사 편찬 작업을 계속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를 마음대로 역사를 저작한다며 고발했다고 하며, 이로 인해 반고는 한때 체포되어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후한의 역사가

반고는 이후 동생 '반초'의 상소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고, 반고의 재능을 알아본 당시 후한 황제인 '명제'가 금과 돈을 내려 한서를 계속 저술하도록 지원하였으며, 난대령사로 임명하여 '세조본기' 등 여러 전기를 짓게 하였다. 이후 반고는 다시 전교비서로 승진하여 공신, 평림, 신시, 공손술 등의 열전을 짓는 작업을 맡았고, 그 사이에도 한서를 짓는 작업을 계속 병행하였다. 다음 황제인 '장제'는 반고를 현무사마로 임명하였고, 79년에 장제가 유생들과 백호관에서 오경에 대해 토론한 내용을 그에게 기록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백호통의'이다. 이렇듯 반고는 명제와 장제의 지원을 받으며 한서 이외에도 여러 저술활동을 하였고, 82년경에는 한서의 내용도 대부분 완성에 이르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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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최후

89년 어머니가 사망하여 반고는 관직을 사임하고 집에서 근신하였는데, 마침 장덕황후의 외척인 대장군 '두헌'이 흉노를 토벌하는 원정을 시작하게 되어 반고도 여기에 합류하게 되었다. 반고는 중호군의 중랑장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이들은 남흉노의 도움을 받아 계략산에서 북흉노 선우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였고, 사거북제해까지 도달하여 13,000여 명의 흉노족을 죽이고, 수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한다. 원정대는 늑석연연산에 올라 이 공로를 기록한 석비를 세웠는데, 이때 반고가 그 내용이 되는 글을 지어 이를 '봉연연산명'이라고 한다. 또 반고는 '두장군북정송'을 지어 북쪽의 흉노를 정벌한 사실을 널리 알리고 이를 찬양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반고에게 안 좋은 결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큰 공을 세운 두헌은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사람들을 관직에 세우는 등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기세가 지나쳐 92년에는 황제인 '화제'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게 된다. 반고도 이 일로 관직을 잃게 되었는데, 평소 반고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낙양령 '충경'이 반고를 잡아 태형을 내렸다고 한다. 결국 반고는 61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는데, 이때는 아직 한서가 미완성인 상태로 표와 천문지가 완성되지 못했다. 화제는 한서를 마무리하기 위해 반고의 여동생 '반소'에게 일을 맡겼지만, 그녀도 일을 마치지 못하고 사망하였기 때문에, 다시 반고의 문하에 있던 '마속'이란 자를 불러 한서를 완성시키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한서는 사기와 같이 기전체 형식으로 쓰인 역사서로 제기와 연표, 지, 열전을 모두 합쳐 100권에 달하는 분량인데, 자료가 풍부하고 사실이 정확하게 기술되어 사기와 함께 정사의 모범으로 평가받아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는 현대 역사가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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