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 시절 무주의 여황제 측천무후 「무조」
- 역사
- 2023. 8. 27.
당 태종의 후궁
'무조'(武照)는 중국 당나라 시절인 624년경에 이주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은 본래 유명한 목재상이었는데, 수나라의 '양제'가 시행한 대공사로 큰 이익을 남겨 거부가 되었고, 이로 인해 반란이 일어나자 당국공 '이연' 휘하에 합류하여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후 이연이 당나라를 세우면서 개국공신으로 광록대부로 태원군공에 봉해졌다가, 다시 공부상서에 응국공이 되어 이주와 형주의 도독을 역임하였다고 하는데, 그는 별로 수완이 뛰어나지는 못했는지 635년에 그가 사망하고 나서 남겨진 부인과 딸들은 상당히 궁핍한 생활을 한 것 같다. 이듬해인 636년에 무조가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하였는데, 이때 생활이 나아지게 된 것에 대해 기뻐하였다고 한다. 무조는 궁에서 용모가 빼어나다고 하여 '무미랑'이라고 불렸으나, 정치적 배경도 없었으며 경제적으로도 곤궁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낮은 지위에 머물렀던 것 같다. 그러나 당찬 성격에 꽤 영민했던 것 같은데, 한 번은 태종이 대신들 앞에서 성질이 사나운 말을 길들이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장군인 '을지경덕'도 이 말을 길들이지 못하고 몇 번이나 말에서 떨어졌는데, 이때 무조가 나서서 자신이 길들일 수 있다며 철편과 철추, 비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태종에 어떻게 길들일 것이냐고 묻자 무조는 먼저 철편으로 치고,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철추로 머리통을 때리고, 그래도 안 된다면 비수로 목을 찌른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에 태종이 그렇게 하면 말이 죽지 않겠냐고 묻자, 무조가 충신들이 다치는 것보다 말이 죽는 것이 더 났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태종이 무조를 총애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뒤집어 보자면, 어차피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면 죽여 없애느니만 못하다는 것인데, 이는 무조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649년에는 태종이 사망하면서, 비구니가 되어 장안 인근의 감업사라는 절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때 법명을 '천조'라고 하였다고 한다. 본래라면 그녀는 비구니로 조용한 생애를 마치게 되었겠지만, 그랬다면 역사의 전면에 알려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당 고종의 황후
당 태종 사후에 '고종'이 새로 황제로 즉위하였는데, 그는 태종 생전에 궁궐에 있던 무조를 보고 흠모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무조는 아버지의 후궁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650년 고종이 분향하기 위해 감업사에 들렀을 때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 시기 고종의 황후는 '왕씨'였으나, 그 총애는 '소숙비'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왕씨는 고종의 마음을 눈치채고, 이를 이용해 소숙비를 몰아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무조의 입궁을 권유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무조는 다시 머리를 기르고 입궁하여 황후와 소숙비의 다음가는 지위에 올랐고, 왕씨는 고종의 총애를 잃은 소숙비를 폐출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왕씨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는데, 무조는 왕씨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야심을 숨기고 있었고, 고종도 자신이 총애하는 무조를 황후로 하고 싶어 했다. 652년 무조는 아들 '이홍'을 출산했으며, 654년에는 첫 딸인 '안정공주'를 낳았는데, 이때 왕씨가 무조의 처소에 들러 안정공주를 보고 갔다고 한다. 이후 안정공주가 갑자기 사망하였기 때문에, 고종은 이를 이유로 들어 왕씨를 폐출시키고, 655년에 무조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왕씨의 방문 이후 공주가 급사하였기 때문에 운이 없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무조가 왕씨를 쫓아내고 황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직접 살해한 후에 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진실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황후가 된 무조는 자신의 경쟁자였던 왕씨와 소숙비를 잡아 백대씩 곤장을 쳤으며, 팔과 다리를 자르고 술독에 담가 죽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폐출되었다고는 하나 어느 정도 세력이 있었던 왕씨나 소숙비에 대해, 사실상 정치적 뒷배가 전혀 없었던 무조가 황후가 되었다고 해서 이런 무도한 행위를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도 하지만, 동시에 황제의 아기가 죽은 것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이후 무조의 행보를 보면 입궁하자마자부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기 위한 상당한 노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치 장악
무조는 고종을 방편으로 정치를 장악하고 실권을 휘두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아무런 정치적 배경이 없었던 그녀가 어떻게 정치를 장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이 때문에 혹자는 무조의 실력만으로 장악했다는 것보다는 공신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고종과 일종의 정치적 동맹이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무조는 656년 자신의 장남 이홍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황태자였던 '이충'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폐위시켰다. 또 기득권 세력인 기존의 외척세력과 공신들을 숙청하고, 그 자리를 새로운 외척인 자신의 친척 무씨들로 채웠다. 이뿐만 아니라 자신을 적대하거나 견제하는 관료들도 모조리 숙청하였는데, 쫓아낸 이충과 함께 대역죄로 묶어 모조리 처형하였으며, 이충도 664년에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황후로서 황제의 영향력에 기대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늘리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시기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은 실제 그녀의 정치적 위치에 대해 가능하기 어렵게 한다. 고종은 평소 병약하였기 때문에, 신하들에게 총명하고 겸손하다는 평가를 받는 아들 이홍에게 제위를 넘겨주려고 하였다고 하는데, 이홍은 어느 날 고종과 무조와 함께 식사하던 자리에서 그대로 사망하였다. 이에 대해 이홍도 본래 건강한 체질은 아니었기 때문에 과로로 인해 사망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무조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악영향을 고려하여 독살하였다는 설도 있다. 특히나 후자의 경우 이후의 후계자 문제 때문에 더욱 주목받는데, 이홍 사후에 차남인 '이현'(李賢)이 황태자로 책봉되었지만, 680년에 무조에 의해 폐위되어 유배 보내졌다가, 684년에는 압박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조는 다시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삼남인 '이현'(李顯)을 황태자로 삼았고, 그는 683년 고종 사후에 '중종'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중종을 폐위시켰는데, 그가 자신의 황후인 '위황후'의 말을 듣고 외척들을 세우려고 하자 축출한 것이다. 결국 무조가 사남인 '이단'을 '예종'으로 즉위시키자 신하들 사이에 반발이 거세어, 이 시기 '서경업(이경업)의 난' 등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무주 건국
690년에 무조는 아예 예종으로부터 황제위를 넘겨받아 국호를 '주'로 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무조가 세운 나라는 다른 주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무주'라고 부르는데, 무조가 아예 나라를 세워 직접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무조는 중국 역사상 첫 번째 여황제로 기록되게 되었다. 무조는 당시에는 소극적으로 시행되던 '과거 제도'를 적극적으로 채용하여 인재를 모았는데, 특히 신분고하에 따른 자격조건을 대폭 완하 하는 등 매우 파격적이었다고 한다. 이는 사실상 당시 정치권력에서 철저하게 비주류였던 여자인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얻기 위해, 관직에 진출이 어려운 같은 비주류 처지인 평민들을 끌어들여지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조치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들은 '북문학사'라고 불리며 무조의 정치적, 그리고 정책적 기반이 되었는데, 이들의 출신도 있어서 인지 내정 정책이 상당히 성공적이었던 것 같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이 시기를 태평성대로 보아 '무주의 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무조는 일종의 비밀경찰인 '혹리'들을 이용해서 자신에 반대하는 이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기도 하였는데,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후에는 이 혹리들을 처벌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덧붙여서 이 시기에는 여자들의 권리가 향상되기도 하여, 일시적으로 일처다부제가 시행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반대로 외적으로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 고종의 집권기에 고구려 원정을 성공시키기도 하였지만, 무조는 당시에도 군사적인 방법보다는 외교적인 방법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중원을 중심으로 한 많은 이민족들과의 싸움에서 참패하였으며, 다행히 본격적으로 중원으로 침략한 이민족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가 유지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무조는 주변국들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과 외교적인 관계를 맺었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 당시 두 마리의 판다를 선물로 보냈기 때문에 중국 역사상 최초의 판다 외교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는 무조의 정치적 입지 문제와도 관계가 있었는데, 무조의 정치나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들은 과거 기득권층에게 인정받을 수 없는 행위였고, 이 때문에 많은 공신들과 기득권층이 모조리 숙청당했다. 그런데 이 시기의 기득권층은 주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던 선비족 출신들이 많았고, 여기에 더해 무조의 외척들인 무씨들은 하나같이 군사적 재능이 없었다. 이러한 것이 외정의 실패의 모든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충분히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무조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종교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는데, '대운경'이라는 경전을 퍼트리고 각지에 '대운사'라는 절을 짓게 하여, 덕분에 이 시기에 불교가 크게 발전하기도 하였고, 기존의 한자에 획을 더해 새로운 문자를 만들거나 지명이나 명칭을 바꾸었으며, 연호를 자주 바꾸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신룡정변
무조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지만, 자신의 아들들은 이미 당나라의 황제였기 때문에, 다시 아들들에게 나라를 돌려줘야 할지, 따로 조카에게 물려줘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카를 후계자로 세우면, 필연적으로 아들에게 위해가 끼치게 될 것이며, 자신에게도 미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699년에 삼남 이현을 다시 황태자로 세웠다. 705년에 무조는 병을 앓아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는데, 그러자 자신의 측근이었던 신하들이 병사를 이끌고 몰려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다시 당나라로 돌아갈 것을 협박했다고 한다. 무조는 이에 순순히 응하였으며, 사망할 때가 되어서는 자신을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묘비에는 아무런 글도 새기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무주는 1대 15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무주 이전과 이후가 당나라였기 때문에, 여기에 더해 관료들이나 정치 체제 자체도 그대로였으며, 황제 자신이 당나라의 황후 출신인 것도 있어 정식 국가로 봐야 할지는 조금 애매해 보인다. 그러나 무조가 여자의 몸으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당시의 기록들의 불분명한 부분까지 더해 '측천무후'로 불리는 무조는 현대에도 매우 특이하고 신비한 인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