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영국 무정부시대 잉글랜드의 왕 「스티븐」
- 역사
- 2023. 8. 25.
블루아의 스티븐
'스티븐'은 1096년경 프랑스의 귀족인 블루아 백작 '에디엔 2'세'와 잉글랜드의 왕 '윌리엄 1세'의 딸 노르망디의 '아델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티븐의 아버지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가 사망하였는데, 이때 그는 10세 정도의 나이 밖에 되지 않았었고, 그 이후부터 숙부인 잉글랜드의 왕 헨리 1세의 보호를 받았다고 한다. 스티븐은 헨리 1세의 휘하에서 신하의 역할을 계속했던 것 같으며, 1115년에는 모르탱 백작으로 임명되었으며, 헨리 1세의 지원을 받으며 착실하게 입지를 다져나갔다. 1120년 이른바 '백선 사건'(White Ship)이 일어나 헨리 1세의 후계자 '윌리엄 아델린'이 사망하게 되었는데, 본래는 스티븐도 이 배에 탈 예정이었지만 만취하여 상태가 좋지 않아 승선 직전에 포기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헨리 1세는 유일한 적법한 후계자를 잃었고, 이후에 후계자를 얻기 위한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자, 1125년에 남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하여 고향으로 되돌아온 딸 '마틸다' 황후를 자신의 공식 후계자로 선포하였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반발이 상당하였고, 헨리 1세는 자신의 결정을 강행하기 위해 귀족들을 모아 마틸다 황후에게 강제로 충성맹세를 강요하거나, 앙주의 백작 '풀크 4세'의 아들 '조프루아 플랜태저넷'과 정략결혼시키는 등의 수단을 사용하였다. 또 스티븐을 불로뉴의 백작 '외스타슈 3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시키고, 마틸다 황후의 승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윌리엄 클리토'를 견제하도록 하였다.
왕위 찬탈
헨리 1세는 죽기 전에 마틸다 황후가 안정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승계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지만, 동시에 조프루아에게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견제하였다. 이 때문에 헨리 1세가 계속 사망하지 않자, 조프루아는 마틸다 황후에게 노르망디의 공작위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며 차츰 반목하기 시작하였다. 1035년 노르망디 남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 반란에서 마틸다 황후 부부는 반란군을 지원하였고, 이 때문에 헨리 1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와서 진압하였다. 이러한 권력에 집착한 행위들은 의도와 다르게 전혀 엉뚱한 결과를 낳게 되었는데, 헨리 1세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지만, 그 후 얼마 안 돼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틸다 황후는 명목상으로는 헨리 1세의 후계자로 잉글랜드의 왕위와 노르망디의 공작위를 상속받아야 했지만, 노르망디의 구적인 앙주 백작의 부인으로 심지어 반란을 획책하고 있던 입장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아무것도 상속받지 못하였다. 또 이때 많은 잉글랜드의 유력 귀족들은 사망한 왕의 시체를 온전히 잉글랜드로 옮겨야 할 의무가 있었고, 이 때문이 잉글랜드의 권좌가 비어있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틈을 탄 스티븐은 재빠르게 잉글랜드로 이동하였고, 헨리 1세가 죽기 직전에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여, 동생인 윈체스터의 주교 '헨리'의 도움을 얻어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기본적으로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왕위 찬탈 행위였지만, 당시의 잉글랜드에서는 마틸다 황후에 대한 반발이 심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도 있어 스티븐은 생각보다 무난하게 잉글랜드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나마 이 상황에서 마틸다 황후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당시 노르망디의 귀족들은 스티븐의 형인 블루아의 백작 '티보 4세'를 새로운 공작으로 추대하려고 논의하고 있었는데, 스티븐의 이러한 행위로 인해 중지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무정부시대
잉글랜드의 왕이 된 스티븐은 어떻게든 안정적으로 왕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주변에서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태를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당장 북쪽의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 북부를 침략하였고, 서쪽의 웨일스에서는 반란이 일어나는 등 스티븐의 영향력은 위태로웠다. 노르망디에서는 마틸다 황후 부부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1138년에는 마틸다 황후의 이복동생인 글로스터의 백작 '로버트'도 마틸다 황후를 지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잉글랜드의 귀족들을 설득하였고, 1139년에는 본격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상륙하였다. 반대로 스티븐은 이즈음부터 잉글랜드 내에서 지지를 차츰 잃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마틸다를 지지한다는 명목으로 몇몇 주교들을 체포하였는데, 교황의 선처와 석방 요구를 무시하면서 기독교계 세력이 이탈하게 되었다. 이후 1141년에는 '링컨 전투'에서 패배하여 마틸다 황후의 포로신세가 되었다. 사실 이 시점에서 내란이 종결되었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는데, 마틸다 황후는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런던을 방문하였다가 오만한 행동으로 쫓겨나게 되었고, 이번에는 스티븐의 아내 마틸다가 군대를 이끌고 '윈체스터 전투'에서 승리하여 반대로 로버트를 사로잡았다. 이후 벌어진 협상에서는 마틸다는 일체의 교섭을 거부하였고, 로버트도 스티븐 진형으로 전향을 거부하면서, 로버트와 스티븐의 신병을 맞교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어, 결과적으로 내란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1142년에는 스티븐의 군대가 옥스퍼드를 포위하여 마틸다 황후를 궁지에 몰아넣었으나, 마틸다 황후가 측근들과 몰래 포위망을 빠져나가면서 내란 종식은 무산되었다. 잉글랜드 내에서 내란은 사실상 교착상태로 별다른 진전이 없었는데, 노르망디에서는 1144년에 조프루아가 수도 루앙을 점령하고, 프랑스 왕에게 정식으로 노르망디의 공작으로 인정받았다.
내란의 결말
스티븐은 내란이 교착상태에 접어든 동안 장남인 '외스타슈'에게 잉글랜드의 왕위를 넘겨주려고 시도한 것 같은데, 이는 관습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회에 거부되었다. 스티븐과 외스타슈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대관식을 강제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고,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투옥하기도 하였다. 그 사이 1151년 조프루아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헨리 2세'가 노르망디의 공작과 앙주의 백작위를 상속하였는데, 거기에 더해 1152년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의 전처 '엘레오노르'와 결혼하여 헨리 2세는 엄청난 영지를 가진 새로운 세력이 되었다. 1153년 헨리 2세는 소규모 병력을 데리고 잉글랜드에 상륙하였으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스티븐과 대적하였다. 그러나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고, 스티븐과 헨리 2세는 평화적인 해결 방법을 모색하였는데, 이때 외스타슈는 이에 반발하여 귀향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의 죽음이 협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이후 스티븐과 헨리 2세는 '월링퍼드 조약'(윈체스터 조약)을 맺어 내전을 종식시켰다. 이 조약으로 헨리 2세는 스티븐을 정식으로 잉글랜드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왕위의 후계자로 약속받았고, 스티븐의 차남인 '기욤'은 헨리 2세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 대신 그의 휘하에서 안전을 보장받았다. 내란이 종결되자 스티븐은 잉글랜드 각지를 돌아다니며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듬해인 1154년 병으로 사망하였고, 이에 협정에 따라 헨리 2세가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또 헨리 2세도 협약을 준수하여 기욤은 후에 서어리의 백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