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의 명재상 연허대수필 「장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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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화

측천무후의 시대

'장열'은 667년경 중국 당나라 시대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당나라 '고종'의 통치기로 이미 황후인 '측천무후'가 정치에 개입하고 있었는데, 683년에 고종이 사망하자 '중종'이 후계를 이었으나 곧 측천무후에 의해 폐위되었고, 다시 '예종'이 그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에 당나라 정권은 사실상 측천무후가 모두 장악하고 있었고, 일부 황족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진압당했다. 측천무후는 여성인 자신이 전면에서 정치를 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전통적인 기득권층을 배제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또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과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과거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출세하기 위해서는 신분이나 재산이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 시기에는 주로 '선비족'들이 기득권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측천무후가 이러한 기득권층을 배재하기 위해 신분고하에 관계없이 인재를 선발하면서, 상대적으로 차별받고 있던 한족 등의 인재들도 조정으로 많이 진출할 수 있었고, 장열도 그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689년 과거시험인 '현랑방정과'를 실시하였는데, 장열은 22세의 젊은 나이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태자 교서랑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이후 690년에 측천무후는 아예 새로 나라를 세우고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때 장열은 우보궐로 전임된 것 같다. 696년에 거란의 '이진충'이 난을 일으키자 '왕효걸' 휘하에서 반란을 진압하는 일을 맡아 종군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다시 '무의종' 밑으로 자리를 옮겨 종군한 것 같은데, 그는 군사적으로 무능하였기 때문에 따로 공을 세우거나 하지는 않았고, 이후 '장창종'이 '삼교주영'을 편찬할 때 참여하였다고 한다. 701년 이 공으로 우사로 승진하여, 내봉공이 되었다. 그러나 703년에 '장역지'와 장창종 형제가 '위원충'을 무고하는 과정에서 장열을 증인으로 세웠는데, 장열은 처음에 그들에게 따르는 척하다가, 막상 측천무후 앞에서는 그들의 고발이 거짓이라며 위원충을 두둔하였다. 그러나 측천무후는 장역지와 장창종을 총애하였기 때문에, 무고임을 알고도 위원충을 좌천시켰으며, 장열도 여기에 엮이여 흠주로 유배가게 되었다.

당나라의 재건

705년 측천무후는 늙고 병들어 있었는데, 이때 신하들이 '신룡정변'을 일으켜 다시 당나라를 재건하고 중종을 복위시켰다. 이에 따라 장열도 다시 조정에 복귀할 수 있었는데, 그는 병부원외랑으로 발탁되었다가 다시 공부시랑으로 전임되었다고 한다. 707년 장열은 모친상을 당해 조정을 떠났다가, 상을 마치고 다시 공부시랑으로 임명되었으며, 병부시랑을 거쳐 홍문관 학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측천무후의 안 좋은 그림자가 드리워져있었는데, 중종의 아내인 '위황후'는 처음 중종이 즉위하였을 때부터 그를 이용하여 외척들이 권세를 잡으려다가 쫓겨났었는데, 다시 복귀한 후에는 아예 측천무후처럼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두 사람의 딸인 '안락공주'는 더 안하무인 하여 자신의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사로이 관직을 팔고, 대 놓고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였으며, 아예 중종에게 자신을 황태녀로 삼으라고 종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폐단으로 인해 '경룡정변'이 일어나기도 하였고, 710년에는 아예 안락공주가 직접 독이든 만두를 먹여 중종을 독살하였다. 위황후는 아들 '이중무'를 내세워 다시 한번 나라를 탈취하려 하였지만, 예종의 아들 '이융기'와 측천무후의 딸인 '태평공주' 등이 '당륭정변'을 일으켜 위씨 일가를 모조리 살해하였고, 예종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실제 안락공주 등이 중종을 독살한 것은 아니고, 제위를 찬탈한 이들이 당위성을 내세우기 위해 날조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어찌 되었던 예종이 즉위하자 장열은 중서시랑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옹주 자사를 겸임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 예종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중종의 다른 아들인 '이중복'이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예종은 반란에 가담한 이들에 대한 판결을 장열에게 맡겼고, 그는 주모자만 체포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 또 황태자가 된 이융기의 시독을 맡기도 하였는데, 이때 당륭정변에 휘말려 살해당한 여류시인인 '상관완아'의 시를 모아 만든 문집의 서문을 짓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혼란이 끝난 것은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이융기와 태평공주가 충돌하게 된다. 태평공주는 본래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아 당시부터 정치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측천무후에게 자신을 황태녀로 삼아 황제의 자리를 물려달라고 말한 것도 그녀가 가장 처음이었다고 한다. 예종이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당륭정변에서도 공을 세운 태평공주의 권세는 대단하였고, 711년에 장열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자, 예종이 그를 불러서 이에 대한 해결책을 물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712년에는 예종이 스스로 물러나고 태자 이융기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현종'이 되었는데, 이게 바로 장열이 제시한 해결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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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의 치

27세의 젊은 현종이 즉위하게 되자 권력구도가 완전히 변하게 되었고, 태평공주가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현종을 처단하는 방법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의 권력싸움은 완전히 표면화되었고, 태평공주는 자신의 편을 들지 않은 장열을 재상의 자리에서 쫓아내어 상서좌승에 동도 유수로 좌천시켰다고 한다. 장열은 사람을 보내 현종에게 검을 바쳐 일의 시급성에 대해 다시 알렸고, 이에 713년 현종은 '선천정변'을 일으켜 태평공주와 그 일파를 모조리 처단하였다. 장열은 이 공으로 중서령에 임명되었고, 연국공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이는 얼마 가지 못했는데, 현종은 예종 때 좌천되었던 '요숭'을 다시 불러 재상으로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장열은 이에 반대하려 방해하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장열의 시도는 실패하고 요숭이 재상이 되었으며, 반대로 장열이 요숭에게 탄핵되어 상주 자사로 좌천되어 하북도 안찰사로 가게 되었다. 이후 다시 악주 자사로 좌천되었으나, 요숭이 물러난 이후 재상이 된 '소정'에게 '오군영'이라는 시를 바쳐 형주 자사로 가게 된다. 장열은 우우림장군으로 전임되어 검교 유주 도독을 겸하게 되었다가, 719년에 검교 병주 대도독부 장사로 천병군 대사를 겸하였으며, 이듬해인 720년에는 삭방군 대사 '왕준'이 돌궐의 소부족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나자, 장열이 소규모의 병사들을 이끌고 돌궐 부족들을 돌며 진정시켜 북방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721년에는 '강대빈'이 이민족을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장열은 현종의 명을 받아 왕준과 함께 이를 저지하여, 그 공으로 병부상서에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임명되었다. 722년에는 삭방군 절도대사로 임명되어 강대빈의 잔당을 물리치는 등 승승장구하였고, 장열은 현종 시기의 태평성대인 '개원의 치'를 이끈 당나라의 명재상 중 한 명으로 불리고 있다.

말년과 최후

장열은 세 번이나 재상직을 맡을 정도로 뛰어났는데, 특히 문장에 뛰어나 연국공인 장열과 허국공 '소정'을 함께하여 '연허대수필'이라고 부를 정도이다. 그러나 그는 성품이 급한 편으로 같은 시기에 재상을 지낸 요숭이나 '최식' 등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다른 관료들을 비난하는 등 적을 만들어, 결국 726년에 '최은보', '우문융', '이임보' 등에게 고발당하여 중서령에서 파면당하기에 이르렀다. 이 일로 장열은 재상에서 물러났지만, 현종은 계속 상서우승상으로 있도록 하였는데, 이듬해인 727년에 다시 이임보 등에 의해 비난당하면서 스스로 퇴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사면되어 728년에 집현원 학사를 지냈으며, 729년에 다시 상서우승상이 되었다가, 상서좌승상으로 옮겼으며, '알릉의주'를 편찬하여 개부의동삼사를 더하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 싸움이 상당히 심했던 것 같은데, 장열의 정적이었던 요숭의 경우도 그렇지만, 장열도 몇 번이나 좌천되었다가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730년 장열은 병으로 사망하면서, 그의 정치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현종 집권 시기의 재상들은 측천무후가 시행한 과거제도를 통해 조정에 진출한 인물들이 많은데, 신분고하에 상관없이 능력을 입증받아 진출한 인재들은 이 시기의 태평성대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후 이들이 몰락하고 다시 기득권 세력이 조정에 발을 들이기 시작하면서 당나라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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