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명재상 「범려」
- 역사
- 2023. 8. 21.
월나라를 구한 범려
'범려'(范蠡)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사람으로 자는 '소백'(少伯)을 썼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기원전 517년경에 초나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범려는 초나라 사람임에도 월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 초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문종'의 눈에 띄어 관직에 올랐다가, 도중에 오나라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오나라에는 이미 '오자서'가 있어서 월나라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범려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월나라와 오나라의 전쟁 때인데, 기원전 496년에 초나라를 정벌한 오나라의 왕 '합려'는 오나라가 전쟁 중인 동안 오나라에 침입했던 월나라에 대한 정벌에 나섰다. 당시 월나라는 오나라에 비해 국력이 많이 약한 데다가, 이 해에 전왕 '윤상'이 죽고 아들 '구천'이 왕위를 이어 혼란한 상태였다. 누가 봐도 월나라가 불리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쟁이었지만, 월나라는 범려의 기책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오나라의 군세를 마주한 월나라의 병사들은 질서 정연하게 대열을 갖추어 맞섰는데, 이들은 막상 싸움을 시작하기는커녕 고함을 지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고 한다. 이런 행위가 이어지자 오나라 병사들은 동요하였고, 그 틈에 월나라 군대가 급습하여 전쟁에 승리하였으며, 합려는 이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이는 그야말로 기행으로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아니면 그럴듯한 눈속임이었는지 알 수 없는데, 진짜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고 하더라도 전투의 승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인 의견도 많이 있다. 그러나 고대의 전투에서 병사들이 대부분 일반 백성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또 그중 많은 병사들이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전장에서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꼭 불가능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대신 월나라의 병사들 또한 일반 백성들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실제 이러한 작전을 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와신상담
월나라는 전투에서 승리하여 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강대한 오나라를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반대로 오나라에서는 월나라에게 전쟁에서 진 것도 문제였지만, 거기에 더해 왕까지 잃었기 때문에 큰 문제였다. 합려의 뒤를 이은 '부차'는 월나라에 대한 복수심을 잊지 않기 위해, 가시가 많은 장작더미 위에서 자며, 사람을 시켜 자신이 문을 드나들 때마다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고 외치게 했다고 한다. '와신'한 부차는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국력을 다시 일으켰고, 구천은 이 소식을 듣고 기원전 494년에 먼저 군대를 보내 오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부초 전투'에서 월나라의 군대는 부차에게 대패하였고, 월나라의 수도는 포위되었으며, 구천은 회계산으로 도망쳐 농성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 초나라에 있던 문종은 월나라로 자리를 옮겼었는데, 오나라의 간신 '백비'에게 뇌물을 주어 회유하였고, 그의 도움을 얻어 부차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구천은 부차에게 월나라를 바치고, 스스로 신하와 노비가 되어 섬기겠다며 목숨을 구걸하였는데, 인간의 복수심과 집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오자서는 이를 거부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부차는 이미 자신의 복수심을 잊었고, 백비의 부추김을 받아 항복을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월나라는 오나라의 속국이 되었으며, 구천은 오나라로 끌려가 노비 생활을 하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오나라로 끌려간 것은 구천이 아니라 범려였다고도 한다. 상황이 역전되자 이제 복수심은 부차가 아닌 구천의 것이 되었다. 구천은 방 천장에 곰의 쓸개를 매달아 두고, 매일 핥으며 그 쓴 맛을 느꼈는데, 그때마다 복수심을 상기시켜 회계산의 치욕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칼을 갈았다. 그러나 '상담'하는 구천이었지만 월나라와 오나라의 국력차이는 극복하기 힘들었는데, 문종과 범려는 지혜로 이를 극복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구천을 자유의 몸으로 만들기 위해 부차와 백비에게 뇌물을 주었는데, 그중에는 '시이광'과 '정단'같은 미녀들도 끼어있었다. 여기서 시이광이 바로 중국의 유명한 미인인 '서시'로, 감언이설로 부차를 꾀어 오자서와 갈라지게 하였다. 그 결과 구천은 2년여 만에 다시 월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부차는 월나라를 완전히 종속시켰다고 생각하고 북쪽으로 눈을 돌려 제나라를 공격하는데 집중하였다. 이때 부차와 구천이 복수심을 잊지 않기 위해 고행을 한 것을 두고 '와신상담'이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 시기 월나라는 오나라에 복종하면서 군대를 보내거나 공물을 바치는 등의 행위를 하면서도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범려와 문종의 역할에 더해 특별한 방법으로 '자안패'를 대량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다. 자안패는 고대에 조개를 화폐로 쓴 것을 말하는데, 이 조개는 중국에서는 상당히 희귀한 물건이었지만, 오키나와에서는 비교적 흔하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지리상 오키나와와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월나라와 교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당시 월나라는 왕이 생긴 지도 얼마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관련한 내용을 확인하기는 불가능하다.
토사구팽
범려가 구천을 도와 월나라를 부흥시키는 동안 오나라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는데, 부차는 간신들의 말을 듣고 오자서에게 자결하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착실히 복수를 준비한 구천은 부차가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침략하는 동안 오자서가 없는 오나라를 공격하여 오나라의 태자를 죽이고 영토 대부분을 정복했다. 이에 부차는 황급히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으나 구천에게 패배하였고, 지난날 구천의 항복을 받아준 일을 상기시키며 목숨을 구걸해 왔다. 이때 구천도 지난날의 부차처럼 방심할 뻔했는데, 범려가 구천에게 회계산의 일을 잊었냐며 진언하였고, 기원전 473년 결국 부차는 자결하고 오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이로서 월나라는 명실상부 춘추시대의 패자로서 전성기를 맞게 되지만, 막상 그 전성기를 연 범려는 모든 관직을 버리고 잠적하게 된다. 범려는 아무도 모르게 은퇴하였지만 문종에게만은 서신을 남겼다고 하는데,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창고에서 썩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는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토사구팽'으로 전국의 패자가 된 구천이 이제 필요 없어진 자신들을 해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그러나 문종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고, 결국 구천에게 자결을 강요당해 죽게 된다. 이후 구천도 얼마 안 가 병으로 사망하였고, 월나라는 그대로 몰락하여, 재기에 성공한 초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도주공
그러나 월나라가 멸망한 것은 범려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월나라에서 은퇴한 범려는 제나라로 가서 신분을 속이고 농사를 지었는데, 이때 이름을 '치이자피'(鴟夷子皮)로 고쳤다고 한다. 이 이름은 죽어서도 가죽부대에 담겨 장강에 던져진 오자서를 뜻하는 것인데, 그것이 오자서를 조롱하기 위함인지, 잊지 않기 위함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죽음에서 범려가 교훈을 얻은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농사를 짓는 범려가 부자가 되자 그의 지혜를 알아본 제나라 사람들이 찾아와 재상이 되어달라고 청하였는데, 범려는 이를 거부하고 주변에 재산을 나눠주고는 떠나버렸다고 한다. 또는 제나라에서 벼슬을 하며 살았는데, 벼슬이 너무 높아지면 몸에 해롭다며 재산을 나누어주고 떠났다고도 한다. 어찌 되었든 오나라에서 재상이 되었으나 비참하게 죽은 오자서나 월나라에서 재상이 되었으나 목숨이 아까워 도망친 경험에서 얻은 교훈으로, 범려는 남들과 다르게 명성을 추구하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살기로 생각한 것 같다. 제나라에서 떠난 범려는 이후 교통의 요지인 '도'라고 하는 지역으로 가서 장사를 시작하였고, 금방 부자가 되었으며 '도주공'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의돈'이라는 노나라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농사를 지어도 항상 굶주리고, 누에를 쳐도 항상 헐벗는 등 도무지 돈 버는 재주가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의돈은 도주공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는데, 도주공은 의돈이 자본도 없고, 장사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대신 다섯 가지 짐승을 목축하도록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에 의돈은 서하로 이주하여 목축을 하였는데, 그 규모가 날로커져 10년 만에 엄청난 부를 쌓아, 그 재산이 왕공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의돈은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도주공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도주공묘'라는 사당을 세웠고, 사람들이 이를 일컫어 '도주의돈지부'라고 부른다고 한다. 범려와 관련해서는 이외에도 서시와의 러브스토리도 있지만, 도주공의 일화도 포함하여 실제 범려와 관계있는 이야기가 맞는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