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말 삼국시대 형주를 장악한 「유표」

반응형

초상화

후한삼군팔준

'유표'(劉表)는 중국의 후한말인 142년경 태어났는데, 연주 산양군 고평현 사람으로, 자는 '경승'(景升) 또는, '경숙'(景叔)을 썼다고 한다. 유표는 한나라 황실의 종친으로 '경제'의 사남 노공왕 '유여'의 아들 욱랑후 '유교'의 자손이며, 명망 높은 유학자로 젊었을 때부터 유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명세가 꼭 좋게만 작용하지는 않았는데, 당시에는 사대부 출신의 관료들과 환관 세력이 권력을 가지고 대립하던 시기였고, 166년에 환관들에 의해 '당고의 화'(당고의 금)로 불리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벼슬길이 끊기게 되었다. 당시에 이 사건에 연루되어 피해를 입은 이들을 가리켜 '후한삼군팔준'이라고 부르며 칭송하였는데, 유표는 그중에 '팔급'에 해당한다. 이후 유표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는 184년 즈음까지 벼슬을 하지 못하였고, 그동안 학문에 힘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찌 되었든 황건적이 난을 일으켜 국가의 위기상황이 발생하자 당고의 조치가 해제되었고, 이때 유표는 대장군 '하진' 휘하에서 벼슬을 지내고, '북군중후'로 임명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나라의 몰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189년에는 '동탁'이 낙양에 들어와 정권을 장악하였고, 이듬해 유표는 형주자사로 임명되어 부임하게 된다. 이 시기는 각지에서 군웅할거가 본격적으로 일어나던 시기인데, 중앙관리로 임명되었다고는 하나 혼란이 극심하던 형주지역으로 혼자 내려보낸 것을 보면, 좋은 의도로 내린 벼슬은 아닌 것 같다.

강하팔준

전임 형주자사였던 '왕예'는 무장세력이었던 '손견'에게 살해당했고, '원술'은 그 손견을 이용하여 남양태수 '장자'를 죽이고 남양을 점거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각지에서 지방 호족들이 스스로 병사를 모아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유표는 부임지인 무릉까지는 가지도 못하였으며, 남군에 머물며 상황을 관망하면서, 지역유력자였던 원술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를 정식으로 남양태수로 삼도록 조정에 상주하기도 하였고, 상황이 바뀌어 '반동탁연합'이 결성되자 이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능력이 전무하였던 유표는 반동탁연합에 합세한 것은 사실상 이름뿐으로, 연합에 가담한 여러 유력자들의 시선이 중앙에 쏠려있는 틈에 착실히 형주를 장악하였다. 그는 지역 명사였던 '채모', '괴월', '괴량' 등의 도움을 받아 지역을 평정하고 권위를 세웠으며, 그 과정에서 양양을 거점으로 삼고 채모의 누이와 결혼하는 등 형주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 유표는 형주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잡자 주변정리를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인근의 유력세력이었던 원술을 표적으로 삼았다. 당시는 반동탑연합이 와해되면서 결집했던 군웅들이 각자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는데, 유표는 '원소'와 동맹을 맺어 원술을 견제하였고, 이에 원술은 휘하에 있던 손견을 보내 유표를 공격하게 하였다. 손견은 유표가 보낸 '황조'를 격파하고 양양을 포위하기도 하였지만, 도주하던 황조를 쫒다가 손견 본인이 전사하면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에 유표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고, 또 조정에 조공을 보내어 동탁 사후에 정권을 잡은 '이각'과 '곽사'에게 자신을 어필하였다. 이각과 곽사는 이러한 유표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벼슬을 주었는데, 유표는 '진남장군'에 '형주목'으로 임명되었으며, '성무후'로 봉해졌다. 유표는 '강하팔준'이라고 불리는 등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였고, 이는 형주를 장악하고 나서도 변하지 않았는데, 학교를 세우고 유학을 장려하는 등의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였고, 이에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형주로 많은 학사들이 모여들었다. 유표가 형주를 통치하는 동안 '오경장구'나 '형주점'같은 서적이 편찬되기도 하였고, '형주학'이라는 학문체계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제갈량'이나 '서서'도 난리를 피해 형주에 자리 잡았으며, 방통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나오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반응형

형주의 유표

유표는 193년 조조가 원소와 협력하여 원술과 싸우는 동안에 원소의 동맹으로서 원술의 보급로를 끊는 등 협력하였고, 이듬해인 194년에는 익주에서 '유장'에 대항하여 '감녕'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196년에는 남양을 침공한 '장제'와 싸워 그를 전사시켰는데, 유표는 곤궁한 처지의 장제와 싸운 것은 자신의 잘못이라며 장제의 부하들을 회유하였고, 장제의 뒤를 이은 '장수'에게 남양을 주어 하북지역과의 완충지대로 삼았다. 같은 해 '헌제'가 낙양으로 도주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각지에 사자를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였고, 유표도 이때 물자를 보내어 도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지원은 사실상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였을 뿐으로 군대를 파견하는 등의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황제는 상당히 곤궁한 처지였기 때문에, 같은 황실의 친척이라는 이유를 들어 유표에게 황제의 백부라는 존칭을 내리는 등 유표에 의지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남방에 막강한 세력이 생기자 주변 세력들도 적극적으로 유표를 견제하였는데, 조조는 남양의 장수를 공격하여 몇 차례에 걸쳐 유표와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고, 장사태수 '장선'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등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또 조정에서는 강동에서 성장하고 있던 '손책'에게 조조, '동승', 유장 등과 힘을 합쳐 원술과 유표를 토벌하라는 칙령을 내렸다고 하는데, 이는 유표를 견제하는데 손책을 이용하기 위한 조조의 책략으로도 보이지만 손책에게는 좋은 구실이 되었고, 손책은 199년 원술이 죽자 그의 잔당을 공격하여 세력을 손에 넣었으며, 유표가 휘하의 황조를 통해 파견한 군대를 격파하는 등 유표에게 큰 위협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200년 손책이 사망하고, 원소와 조조가 본격적으로 싸움을 시작하면서 유표는 한숨 돌릴 수 있게 된다.

관망

원소는 남하하면서 유표에게 조조를 공격하여 협력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유표는 이 요구를 승낙하였지만 실제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는 남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장선을 진압하는 데에 신경 썼으며, 강동을 수습하고 있던 '손권'의 세력에도 소규모 공격을 감행하여 견제하였지만, 적극적인 개입 없이 동오가 자리 잡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이후 '관도대전'에서 원소가 패하고 나서도 그대로 있었는데, 유표는 도주한 유비를 받아들여 신야에서 조조를 견제하도록 하였을 뿐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그 사이 조조는 한번 유표를 공격하기 위해 남방으로 군대를 돌렸었지만, 원소의 후계자인 '원담'과 '원상' 형제가 내분을 일으키자 이내 말머리를 돌려 다시 북진하였다. 이때도 원상은 유표에게 조조를 공격할 것을 수차례 요구했다고 하는데, 유표는 그저 형제간에 싸움을 그만두라는 답장을 보냈을 뿐이라고 한다. 결국 조조는 부담 없이 원소의 잔당을 말끔히 처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쪽의 이민족인 '오환'까지 정벌하여 후환을 없앨 수 있었다. 이렇게 북쪽으로 세력을 넓힐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친 유표에 대해, 세간에서는 그의 의심 많은 성격이나 학자적 기질 때문으로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사실 두 가지 모두 맞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유표에게는 그만큼 큰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당시 유표는 이미 60이 넘은 나이였다. 본래도 학자였던 유표는 늙어감에 따라 더 소극적이 되어갔을 것이며, 자신의 후계자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형주에는 뛰어난 학자는 많았지만, 그에 비해 뛰어난 장수는 많지 않았기 때문에, 조조 같은 커다란 세력을 상대로 군사적 행동을 하기 위한 부담감도 상당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형주 내에서는 이미 조조에게 항복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었다고 하는데, 특히 채모를 포함하여 유표가 형주를 장악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이들도 이에 동조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조가 남하하기 시작한 208년에 유표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후계를 이어받은 '유종'은 조조에게 바로 항복해 버렸다. 유표는 시대를 잘 만났다면 유능한 학자로 후세에 명성을 떨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난세에 군웅이 되어 어중간한 평가 밖에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상대적인 것으로 개별적인 그의 업적을 생각해 본다면 상당히 유능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