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두번째 춘추오패 진나라의 문공 「희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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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진나라의 후계자 분쟁

'문공'의 이름은 '희중이'인데 중국 춘추시대 사람으로 '사기'에는 기원전 697년에 태어났다고 하고, '춘추좌씨전'에는 기원전 671년에 태어났다고도 한다. 그는 진()나라의 군주인 '헌공'과 적족의 '호희'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났는데, 기골이 장대하여 아버지가 태자였을 때 이미 성인이나 다름없는 체격이었다고 하며, 젊었을 때부터 여러 인재들과 어울려 그들을 부하로 삼았다고 한다. 진나라는 주나라의 왕족이 세운 국가로 주나라의 왕성인 '희'성을 쓰는데, 본래 방계였던 문공의 할아버지인 '무공'이 직계를 모두 멸하고 진나라의 군주가 되었다고 한다. 무공의 뒤를 이은 헌공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먼저 제나라의 출신 정부인과의 사이에서 '희신생'을 낳았고, 다시 포로로 잡은 적족 호의와 사이에서 문공과 '희이오'를 또, 여융을 멸망시키고 얻은 두 공주 '여희'와 '소희'와의 사이에서 '혜제'와 '탁자'를 낳았다. 일반적인 순리대로 갔다면 장남이 희신생이 진나라의 다음 군주가 되었을 테지만, 여희에게는 복수심과 함께 상당한 야심이 있었던 것 같고,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들인 혜제를 다음 군주로 만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여희는 헌공에게 총애받는 입장을 이용하여, 후계자인 희신생을 비롯한 다른 아들들과의 사이를 이간질하였고, 기원전 656년 희신생이 헌공에게 보낸 음식에 몰래 독을 타서 헌공을 살해하려고 했다며 누명을 씌웠다. 결국 헌공은 희신생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이듬해인 기원전 655년에 헌공은 문공에게 자객을 보냈는데, 문공은 소맷부리가 잘리기는 했지만 겨우 목숨을 건져 적나라로 망명하였다. 또 그 이듬해에는 희이오도 신상에 위협을 느껴 양나라로 도망쳐, 여희의 계획대로 혜제가 태자가 되었다.

할고봉군

문공은 43세, 혹은 17세부터 기나긴 망명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어머니의 나라인 적나라는 그를 크게 환대하여, 문공은 적나라에서 '계외'라고 하는 미녀와 결혼하고 자식까지 얻었다고 한다. 기원전 651년에 헌공이 사망하였는데, 태자였던 어린 혜제는 곧 암살되었고, 이에 진나라 사람들이 문공에게 군주가 되어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공은 이를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음모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아버지의 상중이라는 것을 빌미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가 거절하자 차례가 희이오에게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는 매형이 되는 진()나라의 '목공'의 도움을 받아 귀국하여 후계를 이어 '혜공'이 되었다. 그런데 혜공은 자신이 군주가 되는데 협력한 공신들에게 일체 상을 주지 않았으며, 문공이 자신에게 도전할까 두려워 자객을 보내는 등의 행위를 했다고 한다. 결국 문공은 자객을 피하기 위해 진나라에서 좀 더 멀고 강력한 나라로 자리를 옮기기로 하였고, 먼 길을 떠나야 했기에 계외와 자식들을 적나라에 두고 가게 되었는데, 이때 문공은 계외에게 25년 동안 자신을 기다려보고 그래도 돌아오지 못하면 재가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계외는 25년이나 기다리면 자신의 무덤에 심은 측백나무도 크게 자랐을 것이라며 기다리겠다고 답하였는데, 사실 25년이나 세월이 지난다면 이미 재가하는 것은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혜공은 목공의 도움을 받으면서 대신 5개의 성을 넘겨주기로 하였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며, 진나라가 기근으로 힘들었을 때 목공의 도움으로 식량을 얻었는데, 이후에 진()나라에 기근이 들자 도움 요청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혜공은 목공에게 대패하였지만 목공과의 사이가 매우 나빠졌으며, 이전에 주지 않은 성 5개와 함께 태자 '희어'가 인질로 진()나라에 가게 되었다. 문공 일행은 처음에 위나라를 향해 이동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수'라는 자가 돈과 식량을 모두 챙겨 도망가버렸다. 두수는 본래 진나라에서 창고를 관리하는 일을 하였는데, 셈이 빠르고 머리가 좋아 문공이 곁에 두었으나, 좋은 머리로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자 재빠르게 제 몫을 챙겨 떠나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문공 일행은 위나라의 오록지방을 지나면서 구걸을 하였는데, 현지의 농민들이 이들을 업신여기고 그릇에 흙을 담아 주었다고 한다. 문공은 이에 격노하였지만, 일행 중 '조쇠'가 그 또한 하늘이 내리는 것이니 받으라며 말렸다고 한다. 이 시기 일행은 매우 곤궁한 처지였는데, 그중 '개자추'라는 사람은 문공이 굶어 죽을 지경에 처하자 스스로 넓적다리를 베어 고깃국을 끓여 먹였다고 하고, 이것이 '할고봉군'의 유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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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망명 생활

위나라를 벗어난 문공 일행은 다시 제나라로 향했는데, 당시 제나라는 '환공'이 다스리던 시기로 제일의 강대국이었다. 그들은 제나라에서 20승의 마차를 받는 등 환대받았고, 문공은 제나라의 공녀와 결혼하여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공이 제나라에서 지내는 5년 동안 기원전 643년에는 환공이 사망하면서 후계자들의 분쟁이 시작되었고, 신하들은 문공이 이대로 제나라에서 안락한 삶만을 추구할까 걱정이 되어 다시 방랑을 시작할 것을 권했다. 문공은 이러한 신하들의 권유를 거절하였는데, 여종이 이를 듣고 문공의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아내는 문공이 떠나는 것을 막기는커녕,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 잘못될 것을 염려하여 여종을 죽여 입막음을 하고서는, 신하들과 짜고서 문공을 술에 취하게 해 억지로 수레에 태워 보냈다고 한다. 문공이 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제나라 국경 밖이었는데, 그가 격노하여 창을 들고 신하들을 죽이겠다고 소리치자, 문공을 따르던 외삼촌 '호언'이 자신이 죽어 대업을 이룰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죽이라고 나섰고, 결국 문공은 분노를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제나라를 떠난 일행은 이번에는 조나라를 향했는데, 조나라의 '공공'은 문공을 업신여기고 그에게 무례를 저질렀다고 한다. 문공은 눈동자가 둘이고 갈비뼈가 통짜로 되어있다고 하는데, 공공은 이를 궁금히 여겨 문공이 목욕을 하고 있을 때 몰래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이때 조나라에서 대부에 있는 '희부기'란 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내가 문공은 임금의 기상을 가지고 있고, 수행하는 자들도 비범하니, 후에 진나라의 군주가 되면 그를 업신여긴 자들이 모두 화를 입을 것이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이에 희부기는 아내의 말을 옳다고 여겨 음식 속에 재물을 숨겨 문공에게 바쳤는데, 문공은 음식만을 받고 재물은 다시 돌려주었다고 한다. 문공은 다시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향했는데, 송나라의 '양공'은 예를 다하여 일행을 맞이하였지만, 송나라는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은 데다가, 양공 또한 부상을 입어 건강이 좋지 못했다. 결국 문공 일행은 남쪽의 대국인 초나라를 향했는데, 도중에 정나라에서도 홀대를 받았다고 한다.

진나라의 문공

남방의 대국인 초나라의 '성왕'은 문공을 환대하여 제후로 대접하였는데, 그에게 자신이 도와주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고 한다. 이에 문공은 후에 초나라와 싸울 일이 생기게 되면, 조건에 상관없이 군대를 3사(3일간의 행군거리) 물리겠다고 약속하였는데, 이를 들은 성왕의 부하 '성득신'은 망명 중인 주제에 왕을 향해 건방진 소리를 한다며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왕은 반대로 이러한 문공의 대담함을 칭찬하면서, 그가 진나라를 일으키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며 성득신을 멈추었다고 한다. 한편 기원전 638년에 진나라의 혜공이 병이 들었는데, 진()나라에 인질로 있던 희어가 후계를 잇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여 몰래 진()나라를 탈출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637년에 그가 진나라의 군주로 즉위하여 '회공'이 되었는데, 진()나라 목공이 이를 매우 괘씸하게 여겨 문공을 대신 진나라의 군주로 삼기로 하였다. 이에 문공은 다시 진()나라로 향하게 되었는데, 성왕은 이들이 평안하게 갈 수 있도록 호송해주었다고 한다. 자신의 지위에 위협을 느낀 회공은 문공을 따라 망명을 떠났던 이들에게 진나라로 귀환하도록 명령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진나라에 있는 가족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였으나, 이로 인해 인심을 잃기만 했다. 결국 문공이 진()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로 귀환하자, 회공의 명령으로 이들과 대치했던 진나라 군대는 오히려 문공의 휘하에 합류해버렸다고 한다. 회공은 고량 땅으로 달아났고, 기원전 632년에 문공은 기나긴 망명 생활을 끝내고 진나라의 군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한데 문공은 즉위하기 전까지 19년간에 달하는 긴 망명 생활을 하였고, 이 때문에 진나라에서는 많은 관료들이 문공이 죄를 물을까 두려워 숨어있어 일손이 부족하였다고 한다. 이때 예전에 문공에게서 도망갔던 두수가 궁궐 앞에 나타났기에 신하들은 문공이 그를 죽일까 두려워 어서 도망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두수는 뻔뻔하게 문공에게 자신이 찾아왔다고 전해달라고 하였는데, 문공은 두수에 대한 원한이 있었지만, 이미 오래되었는 데다가 분위기도 흉흉했기 때문에 살려줄 테니 그냥 돌려보내라고 했다. 그러자 두수가 다시 한번 청해 문공과 만나게 되었는데, 두수는 죄를 청하기는커녕 자신을 관대하게 용서해 준다면, 많은 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움을 거두어 제 발로 벼슬을 하기 위해 찾아올 것이라고 하였다. 상당히 염치없는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 또한 맞는 말이었기에 문공은 두수를 다시 측근으로 두었고, 이를 본 많은 이들이 자신들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조정에 나왔다고 한다. 두수는 좋은 머리로 문공에게 죽을죄를 지었지만, 또다시 좋은 머리로 용서받아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한다. 반면에 개자추는 문공이 제나라의 군주가 되자, 그동안 그를 따랐던 많은 이들이 서로 자신의 공을 내세우면서 '탐천지공'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조정을 뒤로하고 떠났는데,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문공은 고깃국을 먹다가 개자추를 떠올렸는데, 그에게 상을 주지 않은 것을 생각해 내고 찾다가, 그가 면산으로 들어간 것을 알았다고 한다. 문공은 개자추를 불러서 상을 주려고 하였지만, 면산에 들어간 그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산에 불을 질러 그가 산에서 내려오도록 꾀를 내었다. 그러나 산에 불을 질러도 개자추는 내려오지 않았고, 불이 모두 꺼진 뒤에 개자추와 그의 어머니가 산에서 불타 죽은 것을 알게 되었다. 문공은 그의 죽음을 알고 후회하며 탄식하였는데, 이후로 그의 기일에는 불을 피우지 않고 차가운 음식만 먹게 되었고, 이것이 '한식'과 '청명절'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또 문공은 그 이후로 부드러운 가죽신을 신지 않고, 불에 탄 면산의 나무로 만든 나막신을 만들어 신었으며, 신발을 볼 때마다 개자추를 생각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족하'(足下)라는 호칭이 생겼다고 한다.

춘추오패

문공이 군주가 된 지 얼마 안 된 기원전 635년 주나라에서 정변이 일어나 주나라의 '양왕'이 동생 '희대'에게 쫓겨나 정나라로 피신하였다. 이에 문공이 군대를 이끌고 희대를 토벌하고 양왕을 다시 복위시켰고, 이로서 진나라는 주나라를 보위하는 위치가 되어 기세를 떨치게 되었다. 기원전 633년에는 초나라가 인근의 소국들을 이끌고 송나라를 침략하였는데, 기원전 632년 진나라는 송나라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문공은 초나라를 돕는 위나라와 조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먼저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길을 비켜달라고 요구하였다고 한다. 위나라가 이를 거절하자 진나라는 위나라를 공격하여 오록 지역을 점령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나라를 공격하여 조성을 포위한 지 4일 만에 함락시켰다고 한다. 이에 성왕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물러났지만 성득신은 이에 응하지 않고 진나라와의 결전을 준비하였는데, 이때 문공은 성왕과의 약속대로 군대를 3사 물려 오랜 전투로 지친 초나라군이 진영을 추스를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벌어진 '성복 전투'에서 진나라는 대승하였으며, 성득신은 패배한 책임을 지고 성왕의 명을 받아 자결하였다. 진나라는 이어 정나라를 복속시켰고, 초나라에서 잡은 포로들을 양왕에게 바쳐 이민족인 초나라의 침략을 막아내고 주나라를 지켜낸 입장이 되었으며, 양왕에게 큰 공물을 하사 받아 공식적으로 여러 제후들 사이에서 우두머리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진나라가 조나라를 쳐들어갔을 때 과거에 자신에게 잘 대해준 희부기의 땅에는 병사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많은 피난민들이 희부기를 의지하여 그곳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문공은 긴 망명생활 동안 자신에게 잘 대해 준 이에게는 은혜를 갚고, 자신을 업신 여긴 이들에게는 철저하게 원한을 갚았다. 그러나 문공이 희부기를 상석에 앉히고 국빈으로 대하는 것을 본 전힐이, 문공의 망명 생활 내내 따른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여 시기하였고, 결국 전힐은 희부기의 집에 불을 질러 그를 살해하였으며, 전힐도 그때 같이 불타 죽었다고 한다.

짧은 치세와 죽음

문공은 기원전 628년에 사망하였는데, 이는 그가 진나라의 군주가 된지 겨우 8년 만이며, 제후들 사이에서 패자가 된 지는 4년 만이다. 사기에 따르면 즉위할 때가 62세였으니 충분히 그럴만한 나이기도 하지만,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사망할 당시 나이가 43에 이기 때문에 조금 이른 편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 문공이 진나라를 통치한 것은 짧았지만, 그는 긴 망명 생활동안 얻은 경험과 인재들을 통해 진나라를 매우 강성하게 만들었으며, 이후로도 진나라는 강대국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 이후 진나라는 결국 위나라, 한나라, 조나라의 세 국가로 쪼개지게 되지만, 그 후로도 세 나라 모두 전국칠웅의 하나로 성장할 만큼의 강국이었다. 이러한 강국을 만들어낸 문공은 짧은 치세에도 불구하고 명실공히 춘추오패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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