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 명군이면서 동시에 암군 현종 「이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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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예종의 후계자

'이융기'는 685년경 당나라 황제인 '예종'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690년 할머니인 '측천무후'가 새로 나라를 세우고 예종에게서 황제위를 빼앗았기 때문에, 예종은 다시 황태자로 강등되었다. 이융기는 어렸을 때부터 측천무후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의 어머니가 측천무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705년에 '신룡정변'이 일어나 당나라가 재건되어 예종의 형 '중종'이 다시 복위하였으며, 측천무후도 얼마 안 있어 사망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황궁에는 측천무후가 불러온 여권신장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황후가 외척을 앞세워 정치에 개입하던 것에서 나아가, 측천무후처럼 스스로 여성황제가 되려는 이들이 생겨났다. 중종의 아내인 '위황후'와 딸 '안락공주'는 중종을 이용해서 재위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거침없이 드러냈고, 이게 어려워지자 710년에는 아예 중종을 독살하고 아들 '이중무'를 즉위시켜 선양을 받으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관련된 정보가 궁중에서 누설되었고, 이를 알게 된 이융기는 측천무후의 딸인 고모 '태평공주'와 함께 '당륭정변'을 일으켰으며, 이를 통해 위황후를 포함한 위씨 외척들과 측천무후 때부터 권력을 쥐고 있던 무씨 일파를 숙청하고 예종을 복위시켰다. 이때 다시 황제가 된 예종은 후계자를 누구로 세울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는데, 자신이 다시 황제가 되는데 아들 이융기의 공이 높았지만, 그가 셋째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계자 문제는 장남인 '이성기'가 후계자 자리를 이융기에게 양보하면서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는데, 사실 예종의 아들 형제들은 평소에도 매우 우애가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보다는 다른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태평공주의 문제였다. 한때 태평공주는 이융기와 손을 잡고 위황후 일파를 몰아내는데 협조하였지만, 그것은 위황후가 실권을 잡을 경우 이융기도 태평공주도 숙청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으로, 단순히 두 사람의 이해가 일시적으로 일치한 것에 불과하였다. 애초에 태평공주는 측천무후의 집권시절부터 정치에 관여해 왔으며, 측천무후 생전에 자신을 황태녀로 지정하여 후계자로 삼아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로 위황후보다도 훨씬 먼저 황제의 자리를 노렸었다.

개원의 치

태평공주는 여러 재상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정사에 관여하였고, 예종은 이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충분히 우려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예종은 이에 대해 당시 재상이었던 '장열'에게 해결책을 물었는데, 장열은 태자 이융기에게 실권을 넘겨주도록 권했다고 한다. 이것은 예종에게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뜻이 되지만, 이 답변에 대해 예종은 크게 기뻐하였고, 712년에 이융기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태상황이 되었다. 사실 예종의 입장에서는 권력을 쥐고 있어 봐야 태평공주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에 골치 아팠을 것으로 보이는데, 27세로 젊은 이융기가 황제가 되자 태평공주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꼴이 되었다. 이때 태평공주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장열을 좌천시켜 장안에서 낙양으로 쫓아냈다고 하는데, 장열은 이에 굴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 이융기에게 검을 보내어 결심을 재촉하였다. 결국 이융기는 713년 '선천정변'을 일으켜 태평공주와 그 일파를 모두 숙청하였고, 그 자리에 여러 인재들을 기용하여 정사를 펼쳤다. 이 시기의 태평성대를 '개원의 치'라고 부르는데, 이때 '요숭', '송경', '장가정', 장열, '이원굉', '두섬', '한휴', '장구령' 같은 이들이 재상으로 이융기를 보좌하여 나라를 이끌었다. 이전 측천무후 시절부터 '무주의 치'라고 하는 내정이 안정된 시기였는데, 이 시기부터 관료로 활동하던 이들은 재상이 되어서도 이를 이어가기 위해 계속 노력하였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당시에 문제가 되었던 환관과 외척들의 정치 개입을 배제하였고, 사찰과 승려의 수를 줄이고 적극적인 구휼정책을 실시하는 등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또 이민족들에게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하여 군제를 개편하였는데, 기존의 징집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병제를 도입하고, 절도사 직책을 신설하여 효율적으로 군대를 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장안은 거대한 제국의 수도로서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에서 온 이들을 포함하여 여러 외국인들이 방문할 정도로 융성하였고,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시선으로 불리는 '이백'이나, 시성으로 불리는 '두보', 향산거사 '백거이' 등이 활동하여, 당시 당나라의 문화적인 발전도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또 당나라는 일본과도 상당히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 시기에 일본의 '아베노 나카마로'가 견당사로 장안을 방문하였다가, 과거에 합격하여 당나라 궁궐에서 벼슬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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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보난치

이융기의 치세 아래 당나라는 전성기를 맞이하였지만, 그 몰락은 생각보다 매우 빠르게 다가왔다. 736년에는 '이임보'가 새로 재상이 되었는데, 그는 '구밀복검'이라는 고사성어의 모태가 된 인물로 중국 역사상에서 매우 두드러지는 간신 중에 한 명이다. 이융기는 점점 충직한 이들보다는 아첨하는 이들을 중용하였고, 그 본인도 검소한 생활에서 벗어나 사치를 부리는 등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737년에는 이임보의 꾐에 넘어가 황태자를 포함해 자신의 아들 3명을 숙청하는 등 후계자 구도를 스스로 어지럽히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당나라의 혼란이 시작된 시기를 연호가 '천보'로 바뀐 741년을 기점으로 보아 '천보난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에 중국사에 아주 유명한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양귀비'이다. 양귀비의 이름은 '양옥환'이라고 하는데, 본래 이융기의 아들 '이모'의 아내였다고 한다. 당시 이융기는 총애하던 후궁이 사망하여 우울해하였는데, 이를 보고 있던 환관 '고력사'와 여러 신하들이 그녀를 대신할 여자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이융기와 양귀비의 만남이 성사되었는데, 사실 양귀비는 이미 아들과 결혼한 몸이기 때문에 이융기의 후궁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력사 등은 양귀비를 일단 도교 사원에 출가시켜 신분을 세탁하였고, 745년에 정식으로 후궁으로 들어와 귀비의 신분이 되었고, 이때부터 양귀비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이융기는 60세의 노인이었는데, 27세의 아가씨를 새신부로 맞은 꼴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황후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양귀비는 황후는 되지 못하였지만 사실상 황후나 다름없는 지위를 누렸다고 한다. 또 양귀비의 일가친척들이 외척으로 권력을 손에 쥐었는데, 특히 양귀비의 친척오빠인 '양국충'은 재상의 자리에 올라 사실상 이임보와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국정을 농단하게 된다. 대외적으로는 승승장구하여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가 747년부터 서역 정벌을 위하여 '파미르 산맥'을 넘어 원정에 나섰는데, 무려 72개 국가를 정복하는 등 당나라의 위세가 대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당나라의 팽창 정책은 반대로 서쪽에서 팽창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751년에 일어난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서역에서의 확장 정책은 멈추게 된다. 이 전투는 당나라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 했지만, 반대로 중앙아시아 일대와 유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이 전투 결과로 중앙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이슬람교가 자리 잡기 시작하였으며, 이때 돌궐족이 서방으로 진출하여 이후 여러 튀르크 국가들을 세우게 된다. 또 탈라스 전투에서 생포된 포로들을 통해 제지 기술이 유럽에 전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안사의 난

'안녹산'은 소그드족과 돌궐족의 혼혈로 여러 이민족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오늘날의 통역관에 해당하는 호시아랑의 직책을 맡아 근무하다가 유주 절도사의 눈에 띄어 군 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는 상당한 수완가였던 것 같은데, 변방에서 수비를 하며 군공을 쌓으면서도 착실하게 중앙 조정에 연줄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황제와 직접 알현할 기회를 얻었다. 이융기는 그를 무척 마음에 들어하여 평로 절도사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때 안녹산은 자신보다도 16세나 어린 양귀비의 양자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안녹산은 범양 절도사와 하동 절도사를 겸임하여 당나라 전체 군대의 1/3 가량을 지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안녹산은 미리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모두 마치고서도, 이임보가 두려워 그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고도 한다. 그사이 조정에서 이임보는 양국충에서 차츰 밀리기 시작하였고, 결국 752년에 이임보가 병으로 죽자, 양국충은 그가 생전에 반란을 모의하였다는 죄를 씌워 재산까지 모두 빼앗았다고 한다. 이임보가 사라지자 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한 양국충과 궁궐 밖에서 군권을 장악한 안녹산은 본격적으로 서로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양국충은 안녹산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그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실제로 755년 안녹산은 간신 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병력을 급조하여 대응했지만 훈련된 정예 상비군을 상대하기에는 많이 부족하였고, '안녹산의 난'이 발생한 지 한 달 만에 낙양이 함락되었으며, 756년 안녹산은 낙양에서 국호를 '연'으로 하여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그나마 당나라 군대는 낙양과 장안의 길목인 동관을 사수하면서, 각지의 병사를 끌어모아 안녹산의 배후를 공격하는 등 선전하였지만, 조정에서는 동관의 지휘관인 '봉상청'과 고선지를 싸우지 않고 퇴각하였다며 처형하였고, 이후 부임한 '가서한'에게는 나가서 싸우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동관의 군대는 무리하게 나가 싸우다가 대패하였고, 동관이 함락되자 지방에서 활약하던 당나라 군대의 사기도 추락하였다. 조정은 한술 더 떠서 아예 장안을 버리고 촉으로 도망치기로 하였는데, 피난 준비조차 제대로 못해서 도중에 식량이 떨어져 고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융기 일행이 도피 도중 마외역에 도착하였을 때, 호위하던 병사들 사이에 불만이 극에 달해 양국충을 살해하였다. 사실 안녹산의 난이 본격적인 위협으로 다가왔을 때부터 양국충을 죽여 반란을 진정시키자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이 '마외병변'에서 병사들은 양귀비도 죽여야 한다고 요구하였고, 결국 여러 사람의 강요에 못 이겨 양귀비는 스스로 목을 메어 숨졌다. 당장의 사태는 진정되었지만, 이로 인해 노쇠한 이융기도 여력을 잃은 것 같고, 곧 관중 지방에 있던 아들 '이형'이 병사들의 추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이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고 한다. 안녹산은 장안에 입성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그대로 지지부진하였으나, 당나라에서는 아직 반란을 진압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그 와중에 757년에 안녹산이 아들 '안경서'에 의해 살해당했고, 여러 이민족의 협력을 받은 당나라 군대는 장안에서 반란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당나라 몰락의 시작

이융기는 장안으로 복귀하였지만, 다시 황제로 복위하라는 이형의 말을 거절하고, 그가 그대로 황제의 자리에 있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반란이 완전히 평정된 것은 아니었는데, 안경서는 업으로 쫓겨나긴 하였지만 계속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이융기의 다른 아들인 '이린'이 하남에서 난을 일으키기도 하였고, 758년에는 안녹산의 부하였다가 당에 투항했던 '사사명'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사사명은 안경서를 돕는 척하면서, 그를 살해하고 안녹산의 잔존세력을 모두 흡수하였으며, 이듬해인 759년에는 안녹산이 세운 연의 3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동안 이형은 이융기를 극진히 모셨으나, 이융기는 이미 고령으로 상당히 노쇠하였고, 그 와중에 이형은 건강이 좋지 못해 병에 걸렸다. 이융기는 762년에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이형도 보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사사명의 난'은 이듬해인 763년에 이민족의 도움을 받아 진압되게 된다. 이융기는 측천무후 때부터 이어져 온 당나라 내부의 태평성대를 이어가면서, 외부 이민족들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절도사를 만들었지만, 오히려 그 절도사들에게 너무 큰 권한을 주면서 절도사가 적이 되고 이민족들의 힘을 빌려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 절도사들에 의해 당나라는 멸망하게 되며, 이후 절도사는 그 권한이 대폭 축소되었다가 원나라 시기에 폐지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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