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시대 서역을 장악한 서역도호 「반초」
- 역사
- 2023. 9. 2.
투필종융
'반초'(班超)는 부풍 안릉 사람으로 자는 '중승'(仲升)을 쓰며, 중국 후한시대인 32년에 태어났다. 반초는 전한 '무제' 시절 월기교위를 지낸 반황의 증손자이며, 그의 아버지인 '반표'와 형 '반고'는 모두 후한의 역사가로 유명하다. 반표는 생전에 전한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인 '한서'의 저술을 시작하였는데, 54년에 반표가 사망하자 반고가 이를 이어받아 계속하였다. 그러나 누군가가 반고가 한서를 저술하는 것을 보고 사사로이 역사를 저작한다며 고발하였고, 한때 반고는 체포되어 옥에 갇히기도 하였지만 반초가 상소를 올려 형을 구명하였다고 한다. 이는 악재였지만 전화위복으로 복이되어 돌아왔는데, 당시 후한의 황제였던 '명제'는 이를 통해 반고의 재능을 알아 볼 수 있었고, 그는 반고의 한서 저술 작업을 허락하였으며, 금과 돈을 내려 이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 이후 반고는 조정에서 벼슬을 받기도 하였는데, 62년 반고가 교서랑으로 임명되어 낙양으로 갈때, 반초도 어머니와 함께 형을 따라 낙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반초는 아버지나 형, 그리고 후에 한서 저술 작업의 마무리를 맡게되는 여동생인 '반소'와 다르게 문장을 짓는 재주가 없었던 것 같은데, 이 시기 그는 생계를 위해 미관 말직의 문관이 되어 관아에서 문서를 베껴 쓰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흉노가 서역에서 세력을 확장하자 반초는 문관에서 무관으로 전직하기로 하고, 서역 파견 근무를 자진해서 지원하였다. 이 반초의 일화에서 붓을 던지고 무인이 된다는 '투필종융'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고 한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이런 반초의 호기로운 행위를 비웃었는데, 그는 소인배가 대장부의 뜻을 알 수 없다며 일축하였고, 후에 반초가 이룩한 성과를 생각해보면, 이것이 그의 운명을 바꾼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표와 반고, 그리고 반초 삼부자를 사람들이 '삼반'이라고 부르는데, 반초만 가족들과 다르게 문재가 아닌 무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 새끼를 잡는다
73년 반초는 가사마로 임명되어 봉거도위 '두고'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는데, 서역 북부의 천산산맥에서 흉노를 격퇴하며 전공을 쌓았고, 이를 통해 신임을 얻어 종사 '곽순'과 함께 사자로 임명되어 서역에 파견되게 된다. 당시 서역은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의 문화가 교류하는 무역의 장으로, 전한시절에 이미 이 무역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거기서 나오는 이권을 손에 넣기 위해 '서역도호부'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한이 멸망하고 후한이 세워지면서 중원의 혼란을 수습하는 동안 서역을 방치할 수 밖에 없었고, 그 틈을 타고 흉노가 진출하여 일대의 소국들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등 후한은 이미 서역에서의 영향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초는 사자로 가장 처음 선선국(누란)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선선국의 왕 '광'은 후한의 사자들을 정중하게 대해주긴 하였지만, 이미 오랫동안 한나라의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미 흉노와 교류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에 반초는 선선국이 후한과 흉노 중 어느쪽을 따라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시종을 겁박하여 자초지종을 확인하였다. 이후 반초는 현대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을 하기로 결단을 내렸는데, 그는 먼저 같이 온 일행들을 모아 주연을 열어 이들을 선동하였다고 한다. 반초는 충분히 술기운이 오르고 일행들이 고무되었다고 생각하자 흉노의 사신을 공격 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때 호랑이 굴로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없다는 '불입호혈, 부득호자'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며, 야음을 틈타 흉노족들이 기거하는 진영에 찾아가 불을 지르고 고함을 치며 혼란을 유도하였다. 이후 칼을 들고 뛰어들어 이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 숫자가 수백명이었다고 한다. 반초는 흉노족 사자의 머리를 들고 광을 찾아가 보여주었고, 이는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 없었지만 어찌되었든 선선국은 후한에 귀순하게 된다. 두고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조정에 상서를 올려 서역에 사자를 보낼 것을 요청하였는데, 명제는 이미 반초가 있으니 따로 사자를 보낼 필요없다며, 반초를 군사마로 임명하고 사자로 삼았다고 한다.
한나라의 사자
선선국 다음으로 반초는 우전국을 찾아갔는데, 당시 우전국은 서역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으로 알려져있던 사차국과 전투를 벌여 이를 격파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흉노도 우전국과 동맹을 맺기위해 사자를 보냈었다고 한다. 이에 우전국의 왕 '광덕'은 기고만장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세력을 믿고 대놓고 반초를 무시하였고, 무당에게 반초가 준마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이를 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반초는 일단 말을 주겠다고 한 후에 무당에게 와서 직접 데려가라고 일렀는데, 무당이 찾아오자 그를 죽여 목을 잘랐고, 그대로 광덕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사실 광덕은 이미 반초가 선선국에서 흉노의 사자를 죽인 일을 알고 있었는데, 반초가 듣던 그대로의 인물임을 알게되자 매우 두려워하였고, 우전국을 찾아온 흉노의 사자를 죽이고 후한에 귀순하였다고 한다. 한편 흉노와 동맹을 맺었던 귀차국이 소륵국을 공격하였는데, 이후 귀차국 출신의 '두제'라는 자를 새 왕으로 세웠다고 한다. 이에 반초는 수하 '전려'와 소수의 사람들만 소륵국에 보내 후한에 투항하도록 권하였는데, 두제는 그들의 규모가 작은 것을 보고 얕보았다고 한다. 전려는 불시에 두제를 급습하여 인질로 삼았고, 뒤따라 소륵국을 들이친 반초는 소륵국을 점거하였으며, 두제를 폐위하고 전 왕의 조카인 '충'을 새 왕으로 세웠다고 한다. 75년에는 후한의 명제가 사망하였는데, 귀차국이 이를 기회로 보고 소륵국을 공격하였고, 반초는 소륵국 사람들을 모아 방어에 전념하여 1년여간을 버텨냈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 황제가 된 '장제'는 이를 부질없다 여겼는지 반초에게 후한으로 귀한하도록 명했고, 이는 사실상 한나라가 다시 한번 서역을 외면하는 처사였다. 이 때문에 소륵국 사람들도 상당한 우려를 표했는데, 소륵국 사람인 도위 '여엄'은 후한의 사신이 떠나면 귀차국에게 함락되고 말 것이라며, 스스로 칼을 들어 목을 베어 이를 만류하였다고 한다. 반초가 소륵국을 떠나 우전국에 도착하였을때도 많은 우전국 사람들이 이를 만류하였는데, 그들은 반초가 탄 말의 머리를 붙잡고 애원하였다고 한다. 반초가 귀국하는 동안 이런 일이 계속되었고, 결국 반초는 서역에 남기로 결정하여 다시 소륵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소륵국은 이미 귀차국에게 점령당해 속국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반초는 한 차례 전쟁을 벌여 6백여명의 적병을 죽이고 소륵국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서역에 남기로 결정한 반초는 본격적으로 서역을 평정한 결심을 한 것 같은데, 그는 78년에 소륵국과 우전국 등지에서 병사들을 모아 고묵국을 공격하여 승리하기도 하였다. 또 2년 후인 80년에는 아예 장제에게 서역의 나라들을 평정하자는 상소를 올렸는데, 조정에서는 그의 청을 받아들여 사형수로 구성된 1천여명의 지원군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서역의 국가들은 후한이 적극적으로 서역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은데, 조정의 지원을 받은 반초는 소륵국 일부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고는 흉노에 동맹을 맺은 귀차국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반초는 먼저 장제에게 주변의 오손국이 강대하니 사신을 보내 회유하여, 귀차국을 공격하는데 협력을 받아야 한다고 청했다고 한다. 장제도 이 의견을 받아들였는데, 83년에 위후 '이읍'에게 오손국까지 사자를 호송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이읍이 우차국에 도착하였을때는 귀차국이 소륵국을 공격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에 이읍은 겁을 먹고 서역을 평정하는 일이 어려우며 반초도 서역에서 처자식과 함께 지내면서 한나라를 잊었다며 모함하였다고 한다. 반초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처자식을 귀국시켜 자신의 뜻을 보였고, 장제의 신임을 얻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장제는 이읍에게 임무를 계속할 것을 명하고 반초에게 알아서 그를 처벌하도록 하였는데, 반초는 이읍을 용서하고 오초국의 인질을 장안으로 이송하는 임무를 맡겨 귀환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서역도호
84년 반초는 소륵국의 병사들을 끌고 사차국에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이번에는 소륵국 왕 충이 사차국에 붙어 반란을 일으켰다. 반초는 사차국에서 다시 돌아와 충이 농성하는 오즉성을 공격하였지만, 강거국이 정병들을 보내 충을 지원하여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결국 월지국의 협력을 얻어 강거국의 병사들을 돌려보내고서야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때 충은 도주하였는데, 88년에 귀차국과 모의하여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알렸고, 이를 눈치챈 반초는 연회를 열어 충을 유인한 뒤 미리 매복시킨 병사들을 시켜 충을 살해하였고, 그 사이 남은 잔당들도 반초가 보낸 군대에 격파되었다. 소륵국을 평정한 반초는 다시 사차국을 공격하였고, 귀차국이 보낸 지원군도 반초에게 대패하여 사차국도 후한에 투항하였다. 한편 소륵국의 반란을 평정할때 도움을 주었던 월지국의 왕은 자신의 공을 들어, 전한의 공주 유세군이 오손의 왕과 결혼했던 이야기를 꺼내어 자신에게도 후한의 공주를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고 한다. 반초가 이를 거절하였기에 월지국 왕은 매우 분노하였는데, 급기야 그는 군대를 일으켜 반초를 공격하였다. 반초는 이러한 월지국 왕의 대응에 매우 놀란 것 같지만, 이내 월지국의 군대가 원정을 위해 먼 길을 왔다는 점을 깨달아 방어에 치중하며 그들을 소모시켰고, 귀차국에 도움을 청하러 떠난 월지국 부대를 습격하여 차단하였다. 반초는 그들의 목을 잘라 월지국 본대에 보내 동요시켰고, 기세를 타고 월지국 군대를 패퇴시킨 후 그대로 월지국까지 침공하여 평정하였다. 91년에 반초는 마침내 귀차국까지 평정하는데 성공하였고, 서역에서 후한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이제 언기와 위수, 위리만을 남겨두었으며, 이 공으로 반초는 서역도호에 봉해졌다.
반초의 귀국과 서역 상실
94년 반초는 서역 일대에서 7만여명의 병사를 모아 다시 공격에 나서기로 하였다. 반초는 후한의 황제가 큰 상을 내렸다며 연회를 열어 언기와 위리, 위수의 왕을 불러들였는데, 언기의 왕과 위리의 왕은 약속대로 찾아왔지만 위수의 왕은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 게다가 위리의 왕은 도중에 불안감을 느껴 도망쳤는데, 반초는 이를 빌미로 연회에 참석한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고, 이후 군대를 이끌고가 언기와 위리, 위수를 모두 평정하였다. 이후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였지만 명목상으로 서역의 50여개 국가가 후한에 복속되어, 후한은 서역을 장악하고 안정적으로 실크로드를 관리할 수 있었고, 95년에 당시 후한의 황제인 '화제'는 반초의 공을 높이평가하여 그를 정원후로 봉했다. 100년이 되자 반초는 이미 칠순에 가까운 공령이었으며, 오랫동안 서역에 머물렀기 때문에 귀향하기를 원하였다. 그는 조정에 중원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는 상서를 보냈는데, 그로부터 3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여동생인 반소도 나서서 반초의 귀향을 간청하며 상소하였고, 102년에 반초는 30여년간의 서역 생활을 마치고 중원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반초는 낙양으로 돌아와 사성교위에 임명되었으나, 귀환한지 한달만에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반초가 사라진 서역에서는 후한의 영향력이 점차 상실되기 시작하였는데, 반초의 후임자로 임명된 '임상'은 서역의 국가들에게 한나라의 방식을 지나치게 강요하여 많은 불만이 생겼다고 한다. 결국 여러 서역 국가들이 다시 이반하였고, 흉노가 활발하게 정복활동을 벌여 둔황을 차지하면서 서역과의 왕래가 끊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