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전국사군의 한사람 제나라의 맹상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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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제나라의 왕족

'전문'은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그의 아버지 정곽군 '전영'은 제나라 '선왕'의 이복동생이라고 한다. 전영은 높은 신분으로 설 땅을 영지로 하사 받아 그곳에서 살았는데, 전문은 그의 40여 명의 아들들 중 한 명에 불과하였으며, 전문의 어머니의 신분이 천했기 때문에 좋은 대우를 받기 어려웠다. 게다가 전문은 5월 5일에 태어났는데, 당시에는 이때 태어난 아이들은 문설주만큼 자라면 부모를 해 한다는 미신이 있어, 전영은 갓난아이인 전문을 없애버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전문의 어머니는 그를 버리지 않고 몰래 키웠으며, 전문이 장성한 이후에야 그를 전영에게 보여주었다. 전영은 전문을 보고 분노하여 왜 없애지 않았냐고 물었는데, 전문은 차분하게 사람의 목숨이 하늘에서 온 것이라면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고, 문설주에게서 온 것이라면 문설주를 그만큼 높이면 된다고 대꾸하였다. 이에 전영은 깨달은 것이 있었는지 전문을 아들로 대하기는 하였으나, 출신이 천하였기 때문에 홀대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전문은 다시 전영을 찾아가서 현손의 현손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물었는데, 이에 대해 전영은 모른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전문은 누군지도 모르는 먼 후손과 친척들을 위해 재산을 아껴두느니 충신과 과부, 선비들을 위해 내어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였고, 이에 전문을 다시 본 전영은 그에게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맡겼다고 한다. 이후 여러 사람들과 만나면서 전문의 명성이 제후들에게까지 알려졌으며, 여러 명사들이 그를 후계자로 권했기 때문에 전영도 이를 받아들였다.

계명구도

전문은 휘하에 많은 식객들을 두었던 것으로 특히 유명한데, 그는 어떤 것이든 한 가지라도 재주가 있다면 식객으로 받아들였고, 덕분에 적게는 1,000여 명에서 많게는 3,000명 정도의 식객이 있었다고도 한다. 이 때문에 전문은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지고 있었던 것 같고, 그가 정식으로 혼인을 하지 못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또 이 식객들의 재주라는 것이 반드시 비범한 것 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중에는 개 흉내를 내거나 닭 울음소리를 잘 흉내 내는 이도 있었는데, 많은 다른 식객들은 이들의 재주를 비웃었지만, 전문은 어떤 재주라도 필시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전문은 이렇게 많은 식객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그 재주의 정도와 수준에 따라 세 등급으로 나누어 대우하였는데, 위에 두 사람 같은 경우가 가장 하급에 속하는 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재주를 가진 이들도 충분히 전문에게 도움이 되었는데, 기원전 299년에 진나라의 '소양왕'이 전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를 재상으로 삼고자 초청하였다고 한다. 전문은 소양왕의 초청에 응해 진나라로 향했지만, 막상 진나라에서는 소양왕의 병사들에 의해 저택에 구금당하였는데, 전문을 시기한 진나라의 신하 중 한 사람이 소양왕에게 결국 전문은 제나라 사람이니 진나라에서도 제나라를 위해 일할 것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이에 전문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식객을 보내 소양왕의 애첩인 연희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연희는 그 대가로 '호백구'라는 보물을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호백구는 부드러운 여우의 겨드랑이 털을 모아 만든 옷으로, 전문은 호백구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이미 소양왕에게 선물한 뒤였는데, 이때 식객 중 한 명이 나서서 자신이 호백구를 되찾아 오겠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 식객은 앞서 개의 흉내를 잘 낸다는 이였는데, 그는 개처럼 재빠르게 왕실의 창고에 잠입하여 호백구를 훔쳐올 수 있었고, 전문은 그것을 연희에게 주어 구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진나라에 머물 수 없었던 전문은 급히 제나라로 귀국하기로 하여 길을 떠났고, 그렇게 한밤중이 돼서 진나라의 국경인 함곡관에 다다랐다고 한다. 그러나 밤중에 함곡관은 폐쇄되기 때문에 전문 일행은 새벽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마음이 급한 전문 앞에 이번에는 닭 울음소리를 잘 흉내 내는 식객이 나섰다고 한다. 그가 닭 울음소리를 흉내 내자 인근의 닭들이 따라 울기시작하였고, 그렇게 전문 일행은 한밤중에 함곡관을 지나 진나라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소양왕은 도중에 마음을 바꾸어 전문을 다시 잡아오도록 추격대를 보냈었지만, 이미 전문이 함곡관을 벗어났기 때문에 그들을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이 일화가 '계명구도'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었다. 이후 전문의 일행은 제나라로 돌아가면서 조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조나라의 한 마을에서 전문을 본 마을 사람들이 그가 듣던 것보다 키가 작다면서 조롱했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전문을 위해 식객들이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의 윤리와 문화가 현대와 다른 것도 있겠지만, 전문의 식객들이 반드시 도덕적이고 선량한 능력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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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상군과 풍환

제나라로 돌아온 전문은 제나라에서 재상이 되어, 기원전 298년에는 한나라와 위나라와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는 등 제나라를 위해 일했다고 한다. 그러던 기원전 295년경에는 '풍환'(풍훤)이라는 자가 전문의 소문을 듣고 식객이 되겠다며 찾아왔다고 하는데, 전문이 풍환에게 어떤 재주를 갖고 있냐고 물었지만 풍환은 별다른 재주가 없다고 하였고, 이에 전문은 가장 하급 숙소인 전사를 풍환에게 배정해주었다고 한다. 얼마 뒤 전문은 풍환이 생각나 그 숙소를 관리하는 이를 불러다 근황을 물었는데, 풍환은 가지고 있던 장검을 꺼내 두드리며 '장검아 돌아가자, 밥상에 생선 한 마리 없구나'라고 노래를 불렀다고 했고, 이에 전문은 풍환을 중급 숙소인 행사로 옮기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또 얼마간 있다가 행사를 관리하는 이를 불러다 풍환에 대해 물었는데, 이번에도 풍환은 장검을 두드리며 '장검아 돌아가자, 외출을 하려는데 수레도 한대 없구나'라고 노래를 불었다고 했기에, 전문은 다시 풍환을 가장 좋은 숙소인 대사로 옮기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풍환은 멈추지 않고 다시 장검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러 '장검아 돌아가자, 여기 있어봤자 내 집 한 채 없구나'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에 전문은 풍환의 행동에 질려서 한 일 년간 아예 얼굴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 또는 풍환이 '장검아 돌아가자, 고령의 어머니를 모실 돈도 없구나'라고 노래를 부르자, 전문이 그 돈까지 내어주어 이후 풍환이 다시 불평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 되었든 풍환은 전문의 식객으로 사실상 밥이나 축내고 있었는데, 한 번은 전문에게 빚진 이들에게 이자를 받아오는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전문은 아버지를 이어 설 땅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많은 식객들을 관리하기 위해 그곳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충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전문은 풍환을 시험해 보기 위해 이 일을 맡긴 것이었는데, 풍환이 이자로 10만전을 받았다고 보고하자, 전문은 그에게 집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이를 구해오라고 시켰다고 한다. 그러자 풍환은 전문에게 빚을 진 이들을 불러다 그 10만전으로 잔치를 열고, 그중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이들은 빚 변재 기한을 늘려주었으며, 나머지 도저히 빚을 갚을 능력이 안 되는 이들은 차용증을 거두어들여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풍환이 이 모든 행위를 전문의 이름을 들어 시행하였는데, 덕분에 많은 이들이 전문 덕에 크게 감사하였다고 한다. 전문도 풍환이 잔치를 열고 차용증을 태워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였지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어쩔 도리가 없었고, 풍환의 어차피 돈을 갚을 사정이 안 되는 이를 독촉하기보다는 덕을 베푸는 편이 났다는 말에 수긍하였다고 한다.

교토삼굴

전문은 제나라의 '민왕' 휘하에서 재상으로 국내외의 정치를 맡아 행하며 국력을 크게 키웠고, 제나라가 부강해짐에 따라 그 명성도 더욱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는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는데, 민왕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피력하는 전문의 행동과 그의 큰 명성에 위협을 느껴 그를 견제하기 시작하였고, 제나라의 경쟁상대인 진나라와 초나라에서도 이간질을 하여 결국 전문은 재상에서 파면되기에 이르렀다. 전문이 제나라에서 실각하게 되자 휘하의 식객들도 하나 둘 떠나갔으나, 막상 고향인 설 땅에 당도하자 백성들 그를 반겼기 때문에, 일전의 풍환의 의도를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 풍환은 다른 식객들과 다르게 계속 전문의 곁에 있었는데, 그는 전문에게 교활한 토끼는 안전을 위해 세 개의 굴을 준비해 둔다며, 자신이 나머지 굴을 두 개 더 파주겠다며 수레를 한 대 받아서 길을 떠났다고 한다. 이때 전문은 별다른 기대 없이 풍환도 자신을 떠나려는 것으로 알았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여비까지 챙겨주며 환송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풍환은 그 길로 위나라, 또는 진나라 왕을 찾아갔는데, 그는 위나라 왕에게 제나라의 재상인 전문이 판명되었으니 얼른 그를 채용하면 제나라를 무너뜨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권하였다고 한다. 평소에 전문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던 위나라 왕도 이에 따라 얼른 제나라로 사신을 파견하여 전문에게 보냈다고 하는데, 그 사이 풍환은 재빨리 제나라로 돌아와서 민왕을 알현하였다. 민왕을 알현한 풍환은 이번에는 위나라에서 전문을 데려가려고 하는데, 그가 제나라를 떠나게 되면 제나라에 큰 위험이 될 것이니 얼른 붙잡으라고 권유하였다고 한다. 민왕이 이를 확인하게 하니 진짜로 위나라에서 사신이 오고 있었기 때문에, 민왕은 얼른 전문을 재상으로 복직시키고 그 봉록을 늘려주었으며, 설 땅에 제나라의 종묘를 세워 안전을 보장해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풍환은 설 땅을 포함하여, 위나라와 제나라까지 전문에게 세 개의 굴을 만들어 위험이 닥쳐도 피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이후 재기에 성공한 전문의 휘하로 다시 식객들이 돌아왔는데, 전문은 자신이 어려울 때 배신했던 이들이라며 분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풍환은 다시 전문에게 돈이 많고 직책이 높은 이들 밑으로 사람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며, 그들이 전문 본인에게 어떤 악의나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니 너그러이 넘어가도록 진언하였다고 한다.

위나라로 간 맹상군

그러나 민왕은 전문을 완전히 믿지 못하였고, 타국에서의 이간질도 계속되어 결국 기원전 284년에 전문은 다시 위나라로 도망치게 되었다. 이 시기 연나라의 '소왕'은 제나라에 원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연나라의 명장 '악의'는 주변 국가들과 연합하여 제나라를 정벌할 것을 권하였고, 직접 조나라로 가서 조약을 맺기도 하였다. 결국 위나라와 연나라, 조나라, 한나라, 진나라의 5개국이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였고, 제나라는 수도 임치가 함락되기도 하였으며, 5년간의 공세로 거와 즉묵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영토를 빼앗기게 된다. 민왕은 기원전 284년에 거에서 사망하였고, 이후 '양왕'이 제나라의 왕위에 올랐으며, 전문도 이때는 여러 제후들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한다. 이후 '전단'의 활약으로 제나라는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고, 전문도 다시 제나라로 복귀하였다가 기원전 279년에 사망하게 된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는 상속 다툼이 벌어졌고, 그 사이를 틈타 제나라와 위나라가 설 땅을 공격하여 전문의 자손들은 그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고 한다. 전문은 사후에 '맹상군'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이름보다는 시호인 맹상군으로 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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