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한시대 중국 최고의 역사서 사기를 지은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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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깊은 역사가 집안

'사마천'은 중국의 전한 시대인 기원전 145년경에 '사마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지은 '사기'에 따르면 사마 가문은 본래 주나라 때부터 이어진 가문으로, 그때부터 사관으로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주변 나라들로 흩어졌는데, 그중 진()나라로 간 이들 중 '사마착'은 진나라의 '혜문왕'에게 촉 지역을 정벌할 것을 고하여, 정벌 후에 그 지역의 수장이 되었다고 한다. 사마착의 손자 '사마근'은 '장평 대전'에서 크게 기여하였으며, 사마근의 손자 '사마창'은 국가의 철을 관리하는 관리가 되었고, 사마창의 아들 '사마무택'은 시장을 관리하는 관리를 지냈다. 다시 사마무택의 아들 '사마희'는 오대부의 작위를 받았으며, 사마희의 아들 사마담은 전한에서 태사령(태사공)을 지냈다. 태사령은 천문, 역법, 제사와 함께 국가의 문서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는데, 당시에는 현대와 같은 역사관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와 비슷한 업무를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사마담은 사마천이 6세였을 때 태사령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업무와는 별도로 '공자'의 '춘추' 이후의 역사서를 저술하는 작업을 진행했던 것 같고, 그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확인하는 작업이 자신 일대에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사마천이 10세가 되었을 때부터 후계를 이을 수 있도록 교육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이 일을 이어받은 사마천은 기록할 역사의 범위를 넓혀 중국 상고 시대의 황제부터 전한의 무제 때까지의 내용을 사기에 담았다. 여담이지만 후한말 삼국시대에 등장하는 '사마의'는 같은 사마씨 일족이긴 하지만, 주나라에서 조나라로 이주한 일파의 후예로 사마천과는 큰 접점은 없다고 한다.

대를 이은 태사공

사마천은 20세 무렵부터 중국 각지를 돌며 사료들을 모으며 직접 역사의 배경이 된 장소들을 둘러본 것 같은데, 이 시기에는 강남, 산동, 하남 지방을 여행하였다고 한다. 많은 고대와 중세의 역사가들이 주로 서적을 통해서 역사를 연구하고 정리한데 반해, 유럽에서는 19세기의 역사가인 '테오도어 몸젠'이 로마의 유적이나 유물들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이를 교차 검증하여 판단하는 새로운 역사적 시각을 보여주었는데, 사마천은 무려 2000년이나 앞서 이러한 역사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22세 무렵에는 낭중이 되어 관직에 종사한 것 같고, 기원전 111년에는 촉으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남방의 이민족 토벌에 참가하여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110년에는 전한 '무제'가 태산에서 '봉선례'를 거행하였는데, 태사령인 사마담도 여기에 참석하지 못하고 태산 아래에서 대기하였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의 역사와 기록에 대한 인식 수준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봉선례는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으로, 봉선례를 거행하는 일 자체가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인 데다가, 참석할 수 있는 인원도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를 체험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사마담은 자신의 직위가 태사령이었기 때문에 이 봉선례에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은데, 정작 태산 아래에서 대기하게 되자 크게 상심하여 건강을 해쳤다고 한다. 결국 사마담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사마천에게는 자신의 뒤를 이어 역사서 편찬을 이어갈 것을 부탁했다. 기원전 108년에 사마천은 사마담의 뒤를 이어 태사령에 임명되었고, 황실과 조정에서 관리하는 서책들을 살펴보며 많은 수의 사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했다. 기원전 104년에는 역법을 개정하여 '태초력'을 완성하는 등 태사령으로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이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태사공서'를 편찬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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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처벌

기원전 99년 무제는 총애하는 후궁 이부인의 오빠인 '이광리'에게 군대를 주어 흉노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이때 '이릉'이 5천 명의 보병을 데리고 이광리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릉의 부대는 소규모의 별동대로서 흉노를 견제하고 교란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운이 나쁘게도 준계산 인근에서 흉노의 '저제후' 선우의 본대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어느 정도 승산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릉은 3만의 흉노 기병을 상대로 분전하였고, 진채를 굳건히 세우고 이들을 격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상황은 더 안 좋은 방향으로 흘렀는데, 후한군의 저력에 놀랐지만 퇴각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군세를 모아 와 그 수가 무려 8만에 달했다고 한다. 흉노는 수적 우세를 이용하여 계속해서 후한군을 공격하였고, 적지에 고립된 이릉은 흉노의 파상공세에 화살도 모두 소비하였고, 칼도 부러져 더 싸울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하게 된다. 이릉의 부대는 완전히 와해되어 무사히 빠져나간 사람은 40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흉노는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하니, 이릉은 결국 패하였지만 충분히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릉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무제는 크게 분노하였는데, 이때 많은 신하들이 무제에게 아첨하기 위해 이릉을 비난하였다고 한다. 오직 사마천만이 이에 반대하였는데, 그는 이릉과 일면식도 없었지만 평소에 들어왔던 그에 대한 평판과 그가 소규모의 병력으로 흉노의 대군에 대항하였다는 점을 들어 이릉을 두둔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사마천은 무제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결국 옥에 갇혀 사형을 언도받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사실 총대장으로서 흉노 정벌이 실패한 책임을 이광리가 져야 했는데, 무제가 이를 두둔하기 위해 이릉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웠고, 여기에 걸림돌이 되어버린 사마천이 원죄를 뒤집어쓰는 형태가 되었다는 평이 있다. 무제는 통치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사형을 남발하였는데, 당시에는 사형을 당하거나, 어마어마한 금액의 벌금을 지불하거나, 궁형에 처해져 거세당하는 것 중에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형 대신 벌금으로 죄를 대신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기는 했지만, 워낙 큰 금액을 지불해야 했기에 태사령의 봉급으로 생활하는 사마천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결국 사마천은 궁형을 선택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궁형은 사형보다 더 잔인한 형벌로 형의 집행 중이나 이후에 감영증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거기에 더해 죽음을 피하기 위해 성정체성을 포기한다는 불명예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천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역사서를 편찬하는 작업을 완수하기 위해 스스로 궁형을 선택했다고 하는데, 그는 목숨을 건져 계속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기는 했지만, 이후로 상시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괴로움에 시달렸다고 한다. 후에 사마천이 옥에 갇힌 친구 '임안'에게 보내는 서신인 '보임안서'에는 친구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과 함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궁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한 연민을 엿볼 수 있다.

환관 사마천

흔히 환관이나 내시라고 하면 자의나 타의로 거세되어 남성성을 상실한 사람이 궁궐에 들어가 일을 하는 것을 생각하여, 일부 사람들은 사마천을 환관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환관은 궁궐에서 일을 맡기 위해 거세된 자들을 뜻하는 것으로 이미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던 사마천을 처벌로 궁형을 당했다고 해서 환관으로 보기는 어렵다. 어찌 되었든 사마천은 가족들이나 가까운 지인들은 부당하게 처벌받은 그를 동정하였지만, 그 외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였는데, 그러한 모든 고통들을 감내하면서도 역사서를 편찬하는 작업을 꿋꿋이 이어갔다. 그 와중에 사마천에게 고통을 준 당사자가 되는 이광리는 반란 모의에 연루되어 정치적 위기를 맞았고, 군공을 세워 이를 모면하려다가 오히려 대패하고 흉노에 항복해 버렸다. 그러자 무제는 이광리의 구족을 멸하였으며, 이제 와서 당시 사마천을 모함한 이들을 처형하고서는, 그를 불러다 위로한답시고 거세당한 것쯤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사마천을 다시 중서령으로 임명하였는데, 중서령은 황제의 서간 등을 담당하는 일종의 비서와도 같은 역할이었지만, 본래 환관들이 맡는 직책으로 무제 자신은 아무 생각이 없었을지 몰라도 사실상 사마천을 모욕한 거나 다름없는 행태였다.

중국 최고의 역사서 '사기'

기원전 90년경 사마천은 내적인 고통과 주변의 멸시를 이겨내며 태사공서를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후에 사기라 불리게 되는 역사서이다. 사기는 그 분량이 무려 130권에 달하는데, 본기, 세가, 열전, 지, 연표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흔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쓰이는 춘추로 대표되는 '편년체'가 아닌, 각각의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기전체'로 쓰여 있으며, 이 서술 방식 자체를 사마천이 확립하였다. 기전체는 역사 서술의 한 방식으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의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고려사'도 기전체로 서술하고 있다. 또 사기는 동양에서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는 개념 자체를 확립하기도 하였는데, 가능한 한 사실적인 내용을 중립적 입장에서 기록하려고 한 그의 노력은 현대에도 크게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사기는 사마천 생전에는 발표되지 못하였고, 사후에 외손자인 '양운'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사마천은 무제가 사망한 이듬해인 기원전 86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스스로 뛰어난 역사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내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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