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한시대 흉노를 물리친 명장 「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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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비천한 출신

'위청'(衛靑)은 중국의 전한 시대 하동군 평양현 사람으로, 자는 '중경'(仲卿)을 썼다. 위청의 아버지는 '정계'라는 하급관리인데 , 그는 전한 '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가 있는 평양후 '조시'의 집에서 일하던 때, 거기서 같이 일하던 노비인 '위온'과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았고, 그 아이가 바로 위청으로 본래 이름은 '정청'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위청은 본래도 미천한 신분인 데다가 그 처지마저 좋지 못하여, 아버지를 따라 평양후 저택을 나선 이후에는 양을 치며 생활하였으며, 정계의 본처인 새어머니와 그 형제들한테는 종처럼 취급당했다고 한다. 한 번은 위청이 우연히 감천궁에 있는 감옥을 구경할 기회가 생겼었는데, 옥 안에서 목에 칼을 쓰고 있던 죄수 한 명이 위청의 얼굴을 보고 후에 귀인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당시 위청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는데, 그는 웃으면서 자신은 종으로 매질이나 욕설을 당하지나 않으면 좋겠다고 대꾸했다고 한다. 위청은 성장한 후에 집을 나와 다시 평양후 저택에 들어가 지냈는데, 여기서 평양공주의 시중을 들며 말을 끄는 일을 했다고 한다.

급격한 신분상승

당시 무제의 황후는 효무황후 '진아교'였는데, 본래 두 사람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사이에 자식을 보지 못하였고, 점차 서로 마음이 멀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무제에게는 남자 형제도 없었기 때문에 황실의 후계자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 때문에 평양공주는 여러 여자들을 골라 무제에게 보냈으나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무제는 평양공주를 만나러 평양후의 저택을 들락날락하였고, 그러다가 저택에서 일하는 가수인 '위자부'와 눈이 맞아버렸다. 무제는 위자부가 마음에 들어 궁궐로 데려가 후궁으로 삼았고, 위자부의 동생인 위청도 함께 따라 들어가 건장궁에서 일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부터 성을 위로 바꾸게 된다. 이때까지 위청은 아직 궁궐에서 소일거리나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럼에도 그동안 위청의 생활을 생각해 보면 장족의 발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때부터 위청의 신분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는데, 후궁이 된 위자부가 무제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자 진아교는 큰 불만이 생겼고, 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위자부 대신 동생인 위청을 잡아다 죽이려고 모의하였다고 한다. 위청은 진아교의 일당에게 붙잡혀 절체절명이 위기에 빠지게 되었지만, 마친 친구였던 기랑 '공손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장정들을 이끌고 그를 구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리고 이 소식은 위자부를 통해 자연히 무제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무제는 위청을 건장궁의 궁감이자 시중으로 삼아 신분을 보장해 주었다. 또 다른 위자부의 가족들도 우대해 주기 시작하였는데, 첫째 언니인 '위유'는 태복 '공손하'와 혼인시켰으며, 둘째 언니 '위소아'는 같이 사는 남자인 '진장'의 신분을 높여주었으며, 위소아의 아들 '곽거병'도 호의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위청은 다시 태중대부로 임명되는 등 황실의 외척으로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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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위청

전한은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 이후 중원을 통일하여 강대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지만, 중원 내부의 적이 사라진 대신 외부의 이민족들과 본격적으로 마찰을 빚기 시작하였다. 특히 북쪽의 흉노족과 크게 대립하게 되는데, 무제의 아버지인 '경제'는 '오초칠국의 난' 이후부터 흉노와 화친하였고, 이러한 분위기는 무제의 집권시기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무제의 치세동안 국력이 크게 신장하자 이러한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하였는데, 기원전 134년에 흉노를 유인하여 급습할 계획을 세웠지만, 전한은 30만이나 되는 군대를 모아서 보냈으나 흉노의 선우가 이를 미리 알아채고 전투를 회피하면서 막대한 군비만 낭비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 일로 전한과 흉노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흉노의 침략이 잦아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전한은 흉노를 토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무제는 다시 기원전 129년에 흉노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위청과 공손하, 공손오, '이광'에게 각각 1만의 병사를 주어 출전하게 하였다. 이때 무제는 위청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군대를 지휘하도록 하였는데, 무제는 외척인 위청에게 공을 얹어주려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사실 제대로 된 군 경험도 없는 위청을 군대의 지휘관으로 삼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이다. 그러나 무제가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위청이 운이 좋았는지, 이러한 선택은 상당히 좋은 결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공손하는 흉노와 조우하지 못했고, 공손오는 대패하여 7,000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으며, 이광은 전군이 와해된 데다가 본인도 포로로 잡혔다가 겨우 도망쳤다. 그러나 위청은 혼자 공을 세웠는데, 그는 흉노가 제사를 모시는 '용성'까지 쳐들어 갔으며, 거기서 700여 명의 흉노족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는 실제로 큰 공은 아니었으나, 지금까지 전한의 군대가 흉노에게 번번이 패한 것과 함께 출전하였던 다른 장수들이 패한 것에 비교되어 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128년에는 위자부는 무사히 아들을 낳아 무사황후가 되었으며, 이때 태어난 아이가 여태자 '유거'이다. 또 위청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흉노의 땅으로 출정하여 수천에 달하는 흉노를 물리치고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위청은 이 공으로 장평후에 봉해졌으며, 휘하의 교위들도 각각 상을 받았고, 전한은 이때 획득한 지역에 '삭방군'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전한은 위청의 몇 번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흉노의 기세를 억누르지 못했고, 다른 지역에서는 흉노의 침략에 계속 패배하였다.

흉노 토벌

기원전 124년에 위청은 다시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나섰는데, 이번에는 흉노의 우현왕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현왕은 전한의 군대가 자신이 있는 곳까지 오지 못할 것이라고 방심하여 술에 취해 있었고, 이에 위청은 밤중에 군사를 보내 이들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깜짝 놀란 우현왕은 수백 명만 이끌고 급히 도망하였고, 위청은 우현왕의 부장 10여 명과 남녀 합쳐 15,000명에 이르는 흉노족을 포로로 잡았으며, 가축 수십만 마리를 노획하였다. 위청은 돌아오는 도중에 국경에서 무제가 보낸 사자를 만나 대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이 공으로 위청의 아들들도 모두 열후로 봉해졌다. 그러나 위청은 이에 반대하여 무제에게 상소하였는데, 실제 공을 세우지도 않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내린 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무제는 위청 휘하의 장수들에게도 봉작을 내렸다고 한다. 이즈음 과거 위청이 모시던 평양공주가 남편과 이혼하고 재혼 상대를 찾고 있었다고 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새 남편감으로 위청을 적극적으로 권하였다고 한다. 이에 위청은 평양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한때 주인으로 모시던 황제의 누나와 결혼한 것이니, 이것으로 당시 위청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듬해인 123년에도 흉노 정벌이 계속되었는데, 위청은 1만에 가까운 흉노족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는 전공을 세웠지만, 부하 장수인 '소건'과 '조신'이 수천의 병사를 이끌고 가다가 흉노 선우의 본대와 맞닥뜨려서 대패하였다. 부대는 완전히 와해되었으며 조신은 흉노에 항복하였고, 소건도 혼자서 간신히 목숨만 건져 귀환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위청을 비롯해서 대부분 이 전쟁에서 상을 받지 못했는데, 표요교위로 참전했던 곽거병이 공을 인정받아 관군후에 봉해지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막북 전투와 최후

기원전 119년 무제는 대군을 모아 위청과 곽거병에게 주어 대대적으로 흉노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그 규모가 대단하여 기병만 각각 5만 명에 달했으며, 수십만의 보병들이 이를 지원하였고, 이름난 장수들도 모두 참전하였다고 한다. 이는 흉노가 중원에서 먼 사막 건너편까지는 전한의 군대가 쉽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라고 방심하고 있다는 것에서 착안한 원정으로, 무제는 이 대대적인 정벌을 통해 흉노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 같다. 전한의 대군은 출발하기 전에 흉노의 선우가 동쪽에 있다는 정보를 접수하였는데, 이를 토대로 위청은 서쪽에서 출발하고 곽거병은 동쪽에서 출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위청이 흉노 선우의 본대와 만나게 되었고, 압도적인 병력으로 패배시켰지만 선우를 잡는 데는 실패하였다. 덕분에 곽거병은 흉노의 정예병력을 만나지 않을 수 있었지만, 반대로 무리한 행군을 계속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여러 흉노의 왕과 장군들을 죽이고, 수많은 흉노족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바이칼호 인근까지 진격하기는 하였지만, 대신 많은 전한의 병사들이 도중에 이탈하였으며, 무리한 진격을 위해 물자를 버렸기 때문에, 흉노족의 식량을 빼앗아 보급을 대신하였다. 전한이 이 싸움을 위해 기병과 물자 수송을 위해 동원한 말이 무려 14만 필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돌아왔을 때는 3만 필이 채 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보면, 곽거병이 얼마나 군대를 소모시켰는지 알만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위청은 선우를 놓쳤다는 이유로 아무런 공을 인정받지 못하였고, 곽거병은 사실상 위청과 같은 직위에 올랐으며, 녹봉도 똑같아졌다고 한다. 이것은 무제의 총애가 위청에서 곽거병으로 옮겨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이미 고령이었고 평소에 항상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던 위청은 이 일을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것 같다. 이후 위청은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지 않았으며, 기원전 106년 사망하였다. 위청의 생전에 그의 아들들은 법을 어겨 작위를 모두 빼앗겼으며, 기원전 91년에는 '무고의 화'로 인해 위자부를 포함해 일족의 거의 전부가 처형당해, 위청의 집안은 역사에서 다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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