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를 정벌한 오나라의 왕 「합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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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장남 이남의 소국 오나라

'합려'의 본래 이름은 '희광'으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오나라의 왕 '제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나라의 시조는 '태백'으로 그는 본래 주나라의 시조인 '고공단보'의 장남으로, 주나라의 왕성인 '희'씨 성을 썼다고 한다. 태백에게는 '중옹'과 '계력'이라는 두 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태백과 중옹은 후계자 지위를 계력에게 양보하고 장강 이남으로 내려가 형산 인근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나중에 계력은 태백과 중옹을 다시 중원으로 불러들이려고 하였으나, 태백과 중옹은 현지 이민족의 풍습대로 온몸에 문신을 새겼다고 하는데, 이는 자신들이 이민족과 동화되었다는 것으로 사실상 거절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후 태백과 중옹은 현지의 제후로서 나라를 세워 국호를 '구오'라고 하였고, 태백이 자식이 없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중옹이 후계를 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건국된 오나라는 기원전 585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군주였던 '수몽'이 처음으로 왕을 칭하였으며, 국호도 오나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오나라 왕 수몽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장남인 '제번'이 바로 합려의 아버지이다. 그런데 수몽은 장남인 제번이 아닌 막내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고, 형들도 이에 동의하였으나 막상 계찰이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수몽이 사망하자 일단 제번이 왕위를 이었는데, 제번은 계찰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위해 형제간에 왕위를 상속하도록 하였고, 형제들이 일찍 죽으면서 왕위는 다시 계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계찰은 다시 한번 왕위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였고, 아예 오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갔다고 한다. 결국 왕위는 마지막 왕이었던 삼남 '여매'의 아들이 차지하게 되었고, 그가 오왕 '료' 이다. 계찰의 이런 행동은 결과적으로 오나라 왕실의 후계구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는데, 이 때문에 제번의 장남이었던 합려는 순서에 따라 자신에게 돌아왔어야 할 왕위를 료에게 빼앗겼다고 여겨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초나라의 '오자서'가 오나라로 도망오게 되었는데, 그는 초나라에 복수하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 권력이 필요하였고, 야심과 능력은 출중하지만 신분에 불만을 품고 있던 합려를 눈여겨보고 그에게 합류하였다.

왕위 찬탈

오나라는 소몽이 왕이던 시절부터 진나라의 도움을 받아 전차전의 방식을 배우는 등 중원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당시에는 진나라의 사주를 받아 초나라와 대결을 시작하였지만, 오나라의 지리적인 위치에 따른 이유도 있어 패권을 얻기 위해 점차 본격적으로 초나라와 경쟁하는 관계가 되었다. 기원전 519년 합려와 오자서는 료 휘하에서 소와 종리 두 개의 소국을 멸망시켰는데, 이때 오자서는 초나라 정벌에 대한 이점을 설명하면서 설득하였고, 합려도 이를 거들었지만 료가 거절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 이해가 일치한 것 같은데, 기원전 515년 초나라의 '평왕'이 사망한 틈을 타 오나라는 대대적으로 공세를 펼쳤는데, 오나라의 왕족인 '촉용'과 '개여'는 전방에서 초나라를 포위하였지만, 합려는 초나라가 후방을 기습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공격을 주저하고 후방으로 물러났다. 이 시기 오자서는 합려에게 자객인 '전제'를 추천하여 료를 죽일 계획을 세웠고, 합려는 료에게 복종하는 척하며 연회를 열어 그를 초대하였다. 료도 합려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대비를 한 것 같지만, 전제는 요리사로 변장하여 료에게 생선 요리를 올리면서 생선 속에서 비수를 꺼내어 그를 살해하였다고 한다. 전제 또한 료의 호위병사들에게 죽게 되었지만, 합려는 실권을 장악하여 오나라의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전선에서 이 소식을 들은 촉용과 개여는 초나라에 항복하여 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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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나라 정벌

기원전 514년 오나라의 왕이 된 합려는 오자서와 '손무', '백비' 등을 중용하여 오나라의 국력을 향상시키고, 초나라 원정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기원전 512년에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도망간 촉용과 개여를 살해하였는데, 이때 합려는 내친김에 초나라의 수도인 '영'까지 쳐들어가려고 하였지만, 손무가 백성들의 부담을 들어 그를 만류하였다고 한다. 이듬해인 기원전 511년에 다시 초나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빼앗았으며, 기원전 510년에는 월나라를 공격하여 굴복시켜 후환을 없애려 하였다. 기원전 509년 이번에는 초나라에서 쳐들어왔는데 초나라의 '소왕'은 '낭와'를 보내 오나라를 공격하였지만, 합려가 이에 대응하여 초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기원전 508년이 되자 합려는 본격적으로 초나라를 공략하여 패자가 될 생각을 한 것 같은데, 그는 오자서와 손무에게 초나라의 수도를 공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초나라의 낭와의 욕심 때문에 당나라와 채나라가 원한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이 두 나라의 도움을 받아 함께 공격할 것을 추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506년 실제 공격에 나섰을 때는 오나라를 포함한 세 나라뿐만 아니라 수많은 제후국들이 공격에 참가하였고, 그 와중에 합려는 5,000명의 정병을 데리고 대별산맥을 너머 초나라의 수도를 급습하였다고 한다. 합려는 수도를 지키던 낭와를 상대로 연전연승하였으며, 낭와는 결국 군대가 모두 와해되자 인근 소국으로 도망쳤다. 이후 '심윤술'이 국경에 있던 초나라의 정병을 데리고 돌아왔지만 병사들은 장거리를 행군하느라 지쳐있었고, 합려가 그 틈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수도가 오나라에 함락되자 소왕은 수나라로 달아났고, 오나라의 군대는 영에서 대대적으로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고 한다. 이때 오자서는 원수를 갚기 위해 평왕의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어 채찍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합려는 초나라에 새 왕을 세우지 않는 등 미적지근한 행동을 하였고, 그 사이 이듬해인 기원전 505년에 진나라에서 초나라에 원군을 보냈으며, 동시에 남쪽에서는 월나라가 쳐들어오고, 동생인 '희부개'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합려는 다시 오나라로 물러가게 된다. 덕분에 초나라는 기사회생하여 나라가 멸망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수도 영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소왕은 '약'으로 천도하였다고 한다.

춘추오패

오나라로 돌아온 합려는 반란을 진압하였고, 이에 희부개는 초나라로 도망쳐 소왕 밑에서 '당계'의 제후로 봉해졌다고 한다. 기원전 504년에는 아들 '부차'에게 초나라를 다시 공격하게 하여, 또다시 영토를 빼앗았다고 한다. 이 시기 오나라는 이미 상당한 강대국으로 초나라에는 제대로 대항할 만한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기원전 496년에는 월나라의 왕 '윤상'이 사망하고 아들 '구천'이 그 뒤를 이었는데, 합려는 이 혼란을 틈타 월나라를 정벌하여 이전의 원한을 풀려고 하였다. 당시 월나라는 오나라에 비해 소국인 데다가, 구천은 왕으로 즉위한 지도 얼마 안 되어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구천을 보좌한 '범려'의 계책으로 오나라는 월나라에 대패하였으며, 합려도 전장에서 부상을 당하여 끝내 사망하게 된다. 합려는 전대의 패자였던 대국 초나라를 무너트렸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제후국들의 협력을 얻어내는 등 당대 중원의 패자에 어울리는 활약을 하여, 그를 춘추오패 중에 한 명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오나라 왕실이 주나라 왕실에서 시작되어 이후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도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이민족들이 나라였고, 합려가 회맹을 거쳐 여러 제후국들에게 정식으로 패자로 인정받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를 패자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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