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명나라시대 중국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우는 문인 「탕현조」
- 역사
- 2023. 9. 10.
부정 시험의 피해자
'탕현조'(湯顯祖)는 중국 명나라 사람으로 자는 '의잉'(義仍)을 썼다. 그는 1550년에 장시성 임천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병약했지만 총명하여 여러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그중에 양명학 태주학파의 '나여방'이라는 사람이 그가 진보적인 사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인다. 탕현조도 입신양명을 위해 13세부터 본격적으로 과거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1570년에는 21세의 나이로 향시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였는데, 1571년과 1574년에 치러진 진사시에서 연이어 낙방하였고, 1577년에 다시 도전한 진사시에서도 낙방하였다. 이 시기 명나라의 황제는 '만력제'로 당시 조정은 수보 '장거정'이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그는 자신이 아들들을 과거에 합격시키기 위해 부정을 일삼고 있었다. 탕현조가 진사시에 낙방한 이유가 전적으로 장거정에게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분위기로 봤을 때 충분히 부정시험으로 인한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1577년 장거정은 자신의 차남을 합격시키기 위해 전국의 선비들을 모아 아예 시험 자체를 부정한 방법으로 기획하여 치렀는데, 이 시험에서 탕현조와 친분이 있었던 '심'씨 성을 가진 한 선비는 장거정이 계획에 참여하여 1갑 1등으로 장원급제하였다고 하며, 장거정의 차남이 1갑 2등으로 급제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탕현조에게도 이러한 장거정의 부정에 대한 권유가 있었지만 그가 거절했다고 한다. 탕현조는 1580년에 다시 도전한 진사시에서도 낙방하였는데, 이번에는 장거정의 장남이 2갑 13등, 삼남이 1갑 1등으로 급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탕현조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여 1583년에 34세의 나이로 드디어 진사시에 합격할 수 있었다. 탕현조의 입장에서는 부정과 비리로 인하여 자신이 급제가 13년이나 미뤄진 셈이니, 그가 본래 올곧은 성격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충분히 원한을 가질만하다. 여담이지만 공교롭게도 장거정은 1582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탕현조는 장거정이 없어지고 난 후에야 벼슬을 할 수 있게 된 셈이기도 하다.
좌천과 사직
관직에 진출하는데 성공한 탕현조는 첫 직책으로 남경의 태상시박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예악과 제사 등과 관련된 부서였기 때문에, 수도도 아닌 남경에서는 별달리 할 일이 없어 독서와 유람, 저술 활동을 즐기며 한가로이 보낸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강직한 성격 때문에 다른 관료들과 사이가 좋지 못해 1588년과 1589년에 두 차례나 부서를 옮겨 다녔다고 하며, 그 사이 '달관선사'나 '이지' 같은 인물들을 만나면서 진보적 가치관을 더욱 확립하였다. 1591년에 혜성이 관찰되었는데 만력제는 이를 신하들이 태만과 불충으로 인해 나타난 안 좋은 징조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자 탕현조는 이를 기회로 여겨 상소문을 올렸는데, 전국에 흩어져있는 감찰사들과 조정 대신들을 타깃으로 삼아 비판하였고, 이에 평소부터 그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무리들이 탕현조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탕현조는 어디까지나 한직에 있는 관리에 불과하였고, 여기에 더해 만력제는 정사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조정의 대신들에 의해 도리어 탕현조가 광둥성 서문현으로 좌천되어 버렸다. 이는 사실상 유배나 마찬가지였지만, 덕분에 탕현조는 중국 남부를 통해 명나라와 접촉한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서양인들과 만남을 가져 서양 문물을 접하는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1593년에는 다시 저장성 수창현으로 옮겨갔는데, 현지 출신 관료의 비리를 적발하였다가 모함을 받아, 조정에 사직을 청하고 관료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조정에는 비리와 부정이 만연해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개혁적인 생각을 가진 탕현조가 활동하기에는 너무 보수적이었을 것이다.
탕현조의 저술 활동
48세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난 탕현조는 고향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저술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저술 활동 자체는 그가 관직에 진출한 30세경부터 이미 하고 있었고, 그중에 '자차기'(荊釵記), '환혼기'(還魂記), '남가기'(南柯記), '한단기'(邯鄲記)의 4 작품을 '임천사몽', 또는 '왕명당사몽'이라고 칭하여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환혼기는 흔히 '모란정환혼기'라고 부르며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데, 이 작품은 본래 1500년대에 있던 원본을 탕현조가 각색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그 안에는 중국 남부에 대한 묘사나 그곳을 방문한 서양 상인들에 대한 언급 등 당시 명나라의 사회상을 잘 보여준다. 또 메인스토리 안에서 여주인공이 자유로운 사랑을 위해 죽음을 넘나드는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이고 진보적인 내용으로 특히 여성층에게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탕현조의 작품들은 본래 극본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당대 사람들에 의해 연극용으로 개작되었는데, 탕현조 본인은 이에 대해 매우 불만스러워했다고 한다. 이후 탕현조는 1616년에 사망했으며, 생전에도 그랬지만 사후로도 상당한 평가를 받아 '중국의 윌리엄 셰익스피어'라고 불리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돈키호테'를 지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도 그와 같은 해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