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영국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
- 역사
- 2023. 9. 11.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패자 헨리 2세의 아들들
'리처드 1세'는 1157년 잉글랜드의 왕이자 노르망디의 공작인 '헨리 2세'와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의 전처로 아키텐의 공작부인인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헨리 2세의 영지는 잉글랜드와 함께, 노르망디, 앙주, 아키텐, 푸아티에, 가스코뉴 등 프랑스 전체의 거의 절반에 이르렀다. 헨리 2세는 '기욤',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조프루아 2세', '존'까지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기욤은 어렸을 때 사망했기 때문에 리처드 1세는 실질적으로 차남이었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8세 때까지는 잉글랜드에서 지내면서 교육을 받은 것 같으며, 1165년에 어머니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갔다고 한다. 1169년에는 헨리 2세에 의해 아들들의 승계에 대한 부분이 결정되었는데, 장남인 청년왕 헨리는 잉글랜드의 왕위와 노르망디의 공작위를 물려받게 되었고, 차남인 리처드 1세는 아키텐의 공작위를 차지하였으며, 삼남 조프루아 2세는 브르타뉴 공작의 딸과 약혼하여 그 자리를 보장받았다. 이는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와의 불화를 누그러트리기 위한 헨리 2세의 정치적 결정이었으며, 실제로 잉글랜드의 왕인 자신을 대신해서 아들들에게 루이 7세에게 충성 서약을 하도록 하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속 내용은 어느 정도 현실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목적에 따른 명목적인 승계 내용으로, 모든 실권은 어디까지나 헨리 2세가 쥐고 있었다. 또 막내 존은 이후 헨리 2세가 아일랜드에 영향력을 확장하면서, 아일랜드의 영주자리를 받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때 리처드 1세와 루이 7세의 딸 '아델'과의 약혼이 성사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애초에 정치적 목적의 약혹이었던 데다가, 이후에 헨리 2세와 아델 사이에 떠돈 추문 때문도 있어 엘레오노르와 리처드 1세는 아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에 대한 반란과 권력 찬탈
1171년 리처드 1세는 엘레오노르와 함께 아키텐으로 향했으며, 현지를 여행하면서 민심을 달래는 등의 사전작업을 거쳐, 1172년에는 아키텐의 공작이자 푸아투의 백작으로 공식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의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 청년왕 헨리는 실제 권한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조프루아 2세의 경우에는 결혼식을 올린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브르타뉴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 조차 없었다. 결국 청년왕 헨리는 프랑스 궁정으로 가서 루이 7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고 하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타국의 힘을 빌어 아버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리처드 1세와 조프루아 2세도 루이 7세를 찾아가 합류하였으며, 이 자식들의 반란은 엘레오노르가 뒤에서 부추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리처드 1세의 경우에는 실제로 아키텐을 확보하고 있는 시점에서 다른 형제들의 반란에 굳이 가담할 이유가 없는데, 이점을 생각해 보면 적어도 리처드 1세가 반란에 가담한 것에는 엘레오노르가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1173년에 일어난 이 대반란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는데, 헨리 2세는 프랑스 내에서 반란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잉글랜드에서는 반란에 동조한 스코틀랜드의 왕을 생포하였으며, 이후 이를 빌미로 조약을 맺어 스코틀랜드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1174년 결국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헨리 2세와 루이 7세는 평화협정을 맺었는데, 이때 루이 7세는 청년왕 헨리와 조프루아 2세 만을 데리고 협정에 참석했으며, 이 과정에서 사실상 리처드 1세는 소외되었다. 이 때문에 리처드 1세는 따로 헨리 2세를 찾아가 용서를 빌어야 했는데, 사실 이러한 일을 겪으면 형제들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왕과도 사이가 나빠지는 것이 일반적일 것 같지만 리처드 1세는 형제들과만 사이가 나빠진 것 같다. 헨리 2세는 이 후계자들의 반란에 대해서 상당히 관대한 처분을 내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 갈등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1179년 프랑스에서 '필리프 2세'가 14세의 나이로 새로 왕으로 즉위하였는데, 그는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모략을 꾸미는 등 무리한 행위를 하였고, 그 때문에 1181년에는 정적들이 파리 코앞까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온 것을 헨리 2세와 그 아들들이 구해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헨리 2세의 아들들은 필리프 2세를 매우 좋아하면 따랐고, 정작 필리프 2세는 그들을 이용하여 프랑스 내에서 자신의 최대 적인, 바로 그들을 쓰러트리기로 한 것 같다. 리처드 1세는 대반란 이후 자신의 영지인 아키텐 인근에서 일어난 반란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반란을 쉽게 제압하였으나, 가혹한 진압 방식 때문에 반발은 오히려 더 거세졌다. 1183년에는 청년왕 헨리와 조프루아 2세가 손을 잡고 리처드 1세의 아키텐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많은 아키텐의 남작들은 오히려 청년왕 헨리의 편을 들었다고 한다. 헨리 2세는 이 분쟁을 중재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리처드 1세의 편을 들어 개입하였다. 결과적으로 분쟁은 좀 어이없는 이유로 끝나게 되었는데, 청년왕 헨리는 분쟁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질에 걸려 사망하였다. 이로서 분쟁자체는 흐지부지되었지만, 헨리 2세는 새로운 승계구도를 짜야했고, 남은 형제들 사이에서 갈등이 깊어지게 되었는데, 이 분쟁에도 필리프 2세가 개입하고 있었다고 한다. 헨리 2세는 사망한 장남 청년왕 헨리를 대신하여, 차남인 리처드 1세를 잉글랜드의 왕위와 노르망디의 공작위에 대한 정식 후계자로 선정하였고, 대신 본래 가지고 있던 아키텐의 공작위를 막내아들인 존에게 넘겨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이러한 헨리 2세의 결정에 대해 반항하였고, 한때 가문 안에서 다시 한번 분쟁이 일어날 뻔하기도 하였으나, 헨리 2세가 엘레오노르를 보내 리처드 1세를 설득하면서 일단락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는 오래가지 못하였는데, 1186년에 조프루아 2세가 파리에서 급사하면서 상황이 돌변하게 되었다.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고 헨리 2세를 압박하여 자신의 승계를 확실시하려고 시도하였는데, 1187년에 예루살렘이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에게 점령되면서, 여러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잉글랜드의 왕과 프랑스의 왕이 분쟁하는 것을 원치 않게 되었다. 교황은 기독교인끼리의 분쟁보다는 십자군 원정을 원하였기 때문에, 그의 중재아래 1188년 헨리 2세와 필리프 2세 사이에 평화협상이 진행되었으나 결렬되었고, 분쟁은 1189년 헨리 2세가 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헨리 2세는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의 요구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후 얼마 안 되어 헨리 2세가 사망하자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포함하여, 헨리 2세의 모든 영지를 사실상 독차지하였다.
제3차 십자군 원정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의 왕이자 노르망디의 공작, 앙주의 백작이 되었는데, 즉위한 이후에 그는 자신과 함께하기 위해 헨리 2세를 배신한 귀족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숙청하였다고 한다. 또 그가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한 날부터 잉글랜드에서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난을 받기도 한다. 리처드 1세는 즉시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는데, 막대한 군비를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였고, 돈을 받고 스코틀랜드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였으며, 그는 구매자만 있다면 런던이라도 팔아치우겠다는 농담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190년 함께 십자군 원정에 나선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는 시칠리아에 도착했는데, 이때부터 두 왕의 사이가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리처드 1세의 여동생 '조안'은 시칠리아의 왕비였는데, 새로 시칠리아의 왕이 된 '탕크레드'는 그녀를 구금하고, 적법하게 상속된 유산의 지급도 거절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리처드 1세는 탕크레드와 불화가 있었으며, 그는 유산을 받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무력으로 메시나를 점거하였다. 반면 필리프 2세는 이러한 리처드 1세의 문제와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탕크레드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때까지 두 왕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필리프 2세는 시종일관 리처드 1세의 주군으로 행세하며 고압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를 취했고, 리처드 1세는 폭력적이었으며 필리프 2세가 계속해서 자신의 이익을 침범해 오자 점차 반목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더해 필리프 2세는 탕크레드와 동맹을 맺어 리처드 1세를 공격하려는 모략이 폭로되었고,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의 이복누나인 아델이 아닌, 나바라 왕국의 왕녀 '베렝겔라'와 혼인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 이로 인해 두 왕의 우호관계는 사실상 깨져버렸고, 각자 따로따로 예루살렘을 향하기로 하였다. 1191년 리처드 1세는 시칠리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항해했는데, 도중에 폭풍을 만나 함대가 흩어졌고, 이후 여동생 조안과 베렝겔라가 비잔티움 제국의 키프로스 총독인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에게 잡혀간 것을 알게 되었다. 리처드 1세는 그에게 포로들과 약탈품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이에 리처드 1세는 군대를 상륙시켜 섬을 점령해 버렸다. 이것은 의도적인 행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키프로스는 이후 기독교 세력의 요충지 역할을 톡톡히 하였고, 리처드 1세는 키프로스를 떠나기 전에 베렝겔라와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리처드 1세는 키프로스에서 십자군의 현지 소식을 전해 들었고, 아크레를 향해 항해하면서 한차례 해전에서 승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크레에서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는 병으로 고생하였고, 그 와중에도 서로 견제를 계속하며 반목하였다. 병석에서 리처드 1세는 침대에 누운 채로 석궁을 쏘아 적병을 죽이는 기행을 벌였고, 필리프 2세도 병을 앓으면서도 투석기를 이용해 성벽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견제와 경쟁은 아크레를 함락하고 나서도 계속됐는데, 아크레를 함락하면서 잉글랜드의 왕의 깃발과 프랑스 왕의 깃발을 성벽에 꽂았는데, 오스트리아의 공작 '레오폴트 5세'가 자신도 성벽에 깃발을 꽂자 리처드 1세가 이 깃발을 철거해 버렸고, 이에 화가 난 레오폴트 5세는 원정을 포기하고 바로 돌아가버렸다. 또 아크레를 함락시킨 후 전리품 분배에 대한 문제도 있었는데, 리처드 1세는 전리품을 독식하였고, 필리프 2세에게만 절반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이는 사전에 두 왕의 맹세에 따른 조치였는데, 필리프 2세는 실질적으로 십자군 원정과 관계없는 것에 대해서도 절반을 요구하는 등 욕심을 보였다. 이런 불화와 반목으로 십자군 사이의 결속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웠고, 이내 필리프 2세도 프랑스로 돌아가버렸다. 이로서 사실상 십자군의 지휘는 리처드 1세가 맡게 되었는데, 그에 따른 물자 보급 등의 문제도 책임져야 했다.
사자심왕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먼저 야파로 향했는데, 십자군은 안 그래도 익숙지 않은 환경에 갑옷을 입고 행군해야 했는 데다가 중간중간 살라딘이 보낸 궁수들이 와서 화살 세례를 하고서는 돌아갔다. 그는 그럼에도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십자군에 감탄했다고 하며, 리처드 1세는 십자군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오전에만 행군을 하고, 도중에 좌우의 행렬을 바꾸어 주는 등 병사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두 군대는 아르수프 북쪽에서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였는데, 살라딘의 군대는 '아르수프 전투'에서 대패하였으며, 그의 부관 중에는 리처드 1세가 무적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살라딘은 야파를 포기했고, 야파의 수비대는 성벽을 허물고 퇴각하였기 때문에, 리처드 1세는 어려움 없이 야파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리처드 1세는 살라딘의 이슬람 대상단을 성공적으로 약탈하였고, 아슈켈론에도 무혈입성 하였지만, 정작 예루살렘을 공격하지 못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해 봐야 철수하는 순간 다시 살라딘에게 빼앗길 것이 불을 보듯 뻔했고, 이 때문에 살라딘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격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대해 혹자는 리처드 1세가 살라딘의 반격을 우려하여 예루살렘 정복을 포기했다고도 하고, 프랑스의 기사들이 필리프 2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공격을 거부했다고 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당시 십자군은 다시 분열하기 시작하였으며, 리처드 1세도 본국의 문제로 원정을 빨리 끝내고 싶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살라딘과 교섭하며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결국 리처드 1세는 귀국을 결심한 것 같은데, 그는 십자군을 이끌고 야파로 후퇴하였으며, 그곳에 부상병들과 수비대를 일부 남겨놓고 다시 아크레까지 이동하였다. 살라딘은 이틈을 노리고 대군을 이끌고 야파를 공격하였고, 야파는 풍전등화의 상태에서 리처드 1세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살라딘에게 사실상 목숨을 구걸하며 시간을 벌었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춰 도착한 리처드 1세는 야파의 십자군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배에서 뛰어내려 돌진하였는데, 석궁과 애용하는 도끼를 들고 닥치는 대로 적을 학살하며 길을 뚫었다고 한다. 실제로 야파는 함락직전이었지만, 어떠한 전략이나 전술도 아닌, 그저 리처드 1세에 의해 탈환되었고, 이것을 본 살라딘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후 리처드 1세와 살라딘은 다시 평화협상을 논의하였는데, 여전히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려 합의되기 어려웠고, 리처드 1세는 나머지 십자군이 합류할 때까지 시간을 끌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에 살라딘은 이번엔 야간에 병사들을 이끌고 기습하려 시도하였는데, 이 시도도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퇴각하는 살라딘의 군대를 리처드 1세가 15명의 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살라딘은 리처드 1세를 이길 수 없었고,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평화협정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맺을 수밖에 없었는데, 1192년 두 사람은 평화협정에 합의하였다. 십자군은 이슬람의 예루살렘 지배를 인정하고 아슈켈론을 그들에게 돌려주었으며, 대신 살라딘은 해안에 이미 정복된 십자군의 도시들을 침공하지 않고 기독교도들의 예루살렘 순례 시의 안전을 보장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십자군의 구성원들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성지 순례를 하였는데, 이때 리처드 1세는 성지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에서의 포로 생활
예루살렘의 문제를 마무리 지은 리처드 1세는 해로를 통해 귀향길에 올랐지만, 그의 여정은 그다지 순탄치 못했다. 그는 악천후를 피하기 위해 케르키라섬에 머물렀는데, 그곳은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키프로스 합병 문제로 불화가 있던 리처드 1세는 순례자인척 신분을 위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리처드 1세의 배는 아퀼레이아 인근에서 난파됐으며, 결국 그는 해로를 포기하고 육로를 통해 귀환하기로 결정하고, 매형인 바이에른의 공작 사자공 '하인리히'를 만나기 위해 이동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 리처드 1세는 정말 운이 안 좋았던 것 같은데, 그는 변장을 하고 사자공 하인리히에게 향하던 도중에, 빈 인근에서 레오폴드 5세에게 체포되었다. 레오폴드 5세는 아레크에서의 한건으로 리처드 1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십자군 원정 도중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되기 직전에 암살당한 '코라도 델 몬페라토'의 건을 리처드 1세와 엮어 고발하였다고 한다. 리처드 1세는 오스트리아의 뒤른슈타인 성에 감금되었고, 이후 1193년에는 레오폴드 5세가 리처드 1세의 신병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6세'에게 넘겨 독일 남서부 안베일레르에 있는 트리펠스 성으로 옮겨졌다. 이 때문에 레오폴드 5세는 십자군을 불법적으로 구금한 이유로 교황 '셀레스티노 3세'에게 파문되기도 하였지만, 당시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그 외의 국가들에게도 상당히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하인리히 6세는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그동안 필리프 2세는 존을 획책하여 잉글랜드를 찬탈하도록 부추겼으나, 존의 거짓말과 회유, 협박에도 잉글랜드의 왕위를 얻지는 못했다. 리처드 1세가 하인리히 6세에게 양도되었을 때, 그의 소식이 프랑스로 전해졌고, 이에 따라 그의 측근들과 정적들 사이에서는 분주한 정치적 싸움이 시작되었다. 엘레오노르와 잉글랜드에서는 리처드 1세를 석방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필리프 2세는 하인리히 6세와 교섭하여 리처드 1세의 구금을 연장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하였다. 1194년 마침내 리처드 1세는 구금에서 풀려날 수 있었는데, 그 대가로 잉글랜드 전체 연수입의 2~3배에 해당하는 돈을 하인리히 6세에게 지불해야 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존은 즉시 파리로 도주하였고, 리처드 1세는 먼저 잉글랜드로 향하여 정권을 안정시켰으며, 이내 군대를 모아 노르망디로 향하였다. 이때 존은 엘레오노르의 도움을 받아 리처드 1세에게 항복했는데, 리처드 1세는 어머니의 중재를 받아들여 존에게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프랑스와의 전쟁과 최후
리처드 1세는 더 이상 필리프 2세와 동맹도 아니었고, 동맹은 커녕 우호적인 관계조차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이 시기 노르망디는 함락 직전의 상태였는데,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의 보급로를 끊고, 빼앗긴 요새를 하나하나 되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필리프 2세는 프랑스 남부의 아키텐의 영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고, 리처드 1세는 다시 이를 진압하기 위해 남하하였다.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는 프레티발 인근에서 싸움을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필리프 2세는 대패하였으며, 본인의 생명도 위급한 처지에 처했었다고 한다. 리처드 1세는 다시 남부로 내려가 반란을 진압하였으나, 그사이 필리프 2세는 다시 북부로 이동해서 공격을 계속하였다. 이 싸움은 결국 교황의 중재로 마무리되어 1195년 말까지를 기한으로 하는 휴전협정이 채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휴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는데, 전투는 이듬해인 1195년 중순에 필리프 2세가 다시 노르망디를 기습공격하면서 재게 되었다. 두 왕은 이 전투를 평화롭게 끝내기 위해 직접 만났는데, 이는 십자군 원정 중 아레크에서 해진 이래 첫 만남이었다. 그러나 필리프 2세는 비열하게 협상 중에도 공격을 계속하였고, 이에 리처드 1세는 화가 나서 협상장을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 왕 사이의 불화는 상당히 누그러진 것 같은데, 게다가 스페인 지역에서 벌어진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에게 크게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더 이상 기독교도들끼리 분쟁을 이어가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물론 이후로도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는 전투와 협상을 반복하여 계속 충돌하였다. 1199년에는 리모주의 자작이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곳은 프랑스와의 국경지대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리처드 1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였다고 한다. 리모주의 자작은 샬루-샤브롤 성에 틀어박혀 농성하고 있었는데, 리처드 1세는 평상복 차림으로 성벽을 관찰하며 거닐다가 성벽 위에서 날아온 석궁에 어깨를 맞았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리처드 1세는 성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는 그의 별칭인 사자심왕(Lionheart)에 걸맞게 전장에서 죽었고, 그에게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포함한 프랑스의 모든 영지는 동생 존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