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의 언니의 아들 '곽거병'(霍去病)은 하동군 평양현 사람으로 기원전 140년경 중국 전한시대에 태어났다. 곽거병의 아버지는 '곽중유'인데, 그는 평양현에서 하급관리로 있을 때 평양후 저택에서 일을 하던 여종 '위소아'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았고, 이 아이가 바로 곽거병이다. 이후 관리로서 임기를 마친 곽중유는 귀향하였기 때문에, 곽거병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어머니 위소아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이렇게 곽거병은 본래 미천한 신분이었는데, 그의 이모가 되는 여소아의 여동생 '위자부'가 당시 전한의 황제인 '무제'의 후궁으로 들어가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위자부의 외척들은 처음에는 아무런 벼슬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위자부를 따라 궁궐에 들어가서 일하던 '위청'이 효무황후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사상 최악의 환관 탄생 '위충현'은 중국 명나라 시대인 1568년에 북직례성 창주 숙녕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위사'인데,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문맹이었으며, 거기에 더해 도박 중독이었다고 한다. 위충현은 도박빚을 갚기 위해 처를 벌리고 딸도 팔아버릴 정도의 위인이었는데, 하루는 도박에서 져 상대 건달들에게 모욕을 당했는데 가진 것도 없고 무식한 처지에 분풀이조차 할 수 없었고, 이에 환관이 되어 황궁으로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생각으로 홧김에 자신의 고환을 훼손하여 고자가 되었다. 이후 1589년에 위충현은 이름을 '이진충'으로 개명하고 사례병필태감 '손섬'의 수하로 환관으로 입궁할 수 있었는데, 그는 일자무식이었지만 눈치가 빠르고 잔꾀를 잘 부렸기 때문에, 금방 황궁의 창고를 관리하는 직책..
와신 '부차'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오나라의 왕 '합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기원전 496년에 합려는 월나라를 쳐들어갔다가 싸움의 도중에 부상을 입어 그대로 사망하였고, 태자인 '희파'는 아내와 함께 요절하였는데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차남인 부차가 재상인 '오자서'의 지지를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오나라의 왕이 된 부차는 이듬해인 기원전 495년에 대부 '백비'를 태재로 세워 오나라를 다시 부흥시킬 수 있도록 하고, 병사들에게 활쏘기를 익히게 하는 등 훈련시켜 월나라에 복수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또 본인은 매일 밤 가시가 많은 장작 위에서 자며 방 앞에 사람을 세워두어, 자신이 지날 때마다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라고 외치게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부차는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패자 헨리 2세의 아들들 '리처드 1세'는 1157년 잉글랜드의 왕이자 노르망디의 공작인 '헨리 2세'와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의 전처로 아키텐의 공작부인인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헨리 2세의 영지는 잉글랜드와 함께, 노르망디, 앙주, 아키텐, 푸아티에, 가스코뉴 등 프랑스 전체의 거의 절반에 이르렀다. 헨리 2세는 '기욤',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조프루아 2세', '존'까지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기욤은 어렸을 때 사망했기 때문에 리처드 1세는 실질적으로 차남이었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8세 때까지는 잉글랜드에서 지내면서 교육을 받은 것 같으며, 1165년에 어머니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갔다고 한다. 1169년에는 헨..
부정 시험의 피해자 '탕현조'(湯顯祖)는 중국 명나라 사람으로 자는 '의잉'(義仍)을 썼다. 그는 1550년에 장시성 임천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병약했지만 총명하여 여러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그중에 양명학 태주학파의 '나여방'이라는 사람이 그가 진보적인 사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인다. 탕현조도 입신양명을 위해 13세부터 본격적으로 과거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1570년에는 21세의 나이로 향시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였는데, 1571년과 1574년에 치러진 진사시에서 연이어 낙방하였고, 1577년에 다시 도전한 진사시에서도 낙방하였다. 이 시기 명나라의 황제는 '만력제'로 당시 조정은 수보 '장거정'이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그는 자신이 아들들..
조나라의 평원군 '평원군'의 이름은 '조승'으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후반인 전국시대에 조나라의 '무령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령왕은 조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로 북방 유목민의 옷을 뜻하는 '호복'을 받아들여 중원에 바지를 보급하는 등 당시에는 상당히 파격적인 인물이었는데, 생전에 총애하는 후궁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혜문왕'으로 세운 뒤 자신은 '주부'라는 직위를 새로 만들어 그 자리에 올라 사실상 상왕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래 놓고는 막상 장자였던 '조장'에게도 나라를 물려주려고 한 것 같은데, 그는 조나라를 둘로 나눠 혜문왕과 조장에게 각각 물려주려고 하였고, 이 일로 아들 중에 가장 똑똑한 평원군을 불러 의견을 물어봤다고 한다. 이에 평원군은 진(晉)나라가 둘로 나뉘어 ..
장남 이남의 소국 오나라 '합려'의 본래 이름은 '희광'으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오나라의 왕 '제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나라의 시조는 '태백'으로 그는 본래 주나라의 시조인 '고공단보'의 장남으로, 주나라의 왕성인 '희'씨 성을 썼다고 한다. 태백에게는 '중옹'과 '계력'이라는 두 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태백과 중옹은 후계자 지위를 계력에게 양보하고 장강 이남으로 내려가 형산 인근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나중에 계력은 태백과 중옹을 다시 중원으로 불러들이려고 하였으나, 태백과 중옹은 현지 이민족의 풍습대로 온몸에 문신을 새겼다고 하는데, 이는 자신들이 이민족과 동화되었다는 것으로 사실상 거절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후 태백과 중옹은 현지의 제후로서 나라를 세워 국호를 '구오'라고 하였고,..
유서 깊은 역사가 집안 '사마천'은 중국의 전한 시대인 기원전 145년경에 '사마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지은 '사기'에 따르면 사마 가문은 본래 주나라 때부터 이어진 가문으로, 그때부터 사관으로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주변 나라들로 흩어졌는데, 그중 진(秦)나라로 간 이들 중 '사마착'은 진나라의 '혜문왕'에게 촉 지역을 정벌할 것을 고하여, 정벌 후에 그 지역의 수장이 되었다고 한다. 사마착의 손자 '사마근'은 '장평 대전'에서 크게 기여하였으며, 사마근의 손자 '사마창'은 국가의 철을 관리하는 관리가 되었고, 사마창의 아들 '사마무택'은 시장을 관리하는 관리를 지냈다. 다시 사마무택의 아들 '사마희'는 오대부의 작위를 받았으며, 사마희의 아들 사마담은 전한에서 태사령..
비천한 출신 '위청'(衛靑)은 중국의 전한 시대 하동군 평양현 사람으로, 자는 '중경'(仲卿)을 썼다. 위청의 아버지는 '정계'라는 하급관리인데 , 그는 전한 '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가 있는 평양후 '조시'의 집에서 일하던 때, 거기서 같이 일하던 노비인 '위온'과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았고, 그 아이가 바로 위청으로 본래 이름은 '정청'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위청은 본래도 미천한 신분인 데다가 그 처지마저 좋지 못하여, 아버지를 따라 평양후 저택을 나선 이후에는 양을 치며 생활하였으며, 정계의 본처인 새어머니와 그 형제들한테는 종처럼 취급당했다고 한다. 한 번은 위청이 우연히 감천궁에 있는 감옥을 구경할 기회가 생겼었는데, 옥 안에서 목에 칼을 쓰고 있던 죄수 한 명이 위청의 얼굴을 보고 후에 귀..
제나라의 왕족 '전문'은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그의 아버지 정곽군 '전영'은 제나라 '선왕'의 이복동생이라고 한다. 전영은 높은 신분으로 설 땅을 영지로 하사 받아 그곳에서 살았는데, 전문은 그의 40여 명의 아들들 중 한 명에 불과하였으며, 전문의 어머니의 신분이 천했기 때문에 좋은 대우를 받기 어려웠다. 게다가 전문은 5월 5일에 태어났는데, 당시에는 이때 태어난 아이들은 문설주만큼 자라면 부모를 해 한다는 미신이 있어, 전영은 갓난아이인 전문을 없애버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전문의 어머니는 그를 버리지 않고 몰래 키웠으며, 전문이 장성한 이후에야 그를 전영에게 보여주었다. 전영은 전문을 보고 분노하여 왜 없애지 않았냐고 물었는데, 전문은 차분하게 사람의 목숨이 하늘에서 온 것이라면 ..
불비불명 '장왕'의 이름은 '미려'인데 중국 춘추전국시대 사람으로 초나라의 '목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전해지지 않으나 기원전 614년 목왕이 사망하였을때, 어린나이로 후계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당시 초나라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는데, 장왕이 즉위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홍수와 냉해로 인한 기근이 발생하는 등 민심이 흉흉해졌고,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재상과 측근들이 궁궐을 비운 사이에 귀족인 '투극'이 왕자 '미섭'을 내세워 수도를 장악한 다음, 다른 신하들의 반발에 대비하기 위해 어린 장왕을 납치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상밀로 도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중에 다른 신하들에 의해 투극이 살해되고 장왕이 풀려나면서 결과적으로 반란은 진압될 수 있었지만, 이후 장왕은 모든 ..
투필종융 '반초'(班超)는 부풍 안릉 사람으로 자는 '중승'(仲升)을 쓰며, 중국 후한시대인 32년에 태어났다. 반초는 전한 '무제' 시절 월기교위를 지낸 반황의 증손자이며, 그의 아버지인 '반표'와 형 '반고'는 모두 후한의 역사가로 유명하다. 반표는 생전에 전한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인 '한서'의 저술을 시작하였는데, 54년에 반표가 사망하자 반고가 이를 이어받아 계속하였다. 그러나 누군가가 반고가 한서를 저술하는 것을 보고 사사로이 역사를 저작한다며 고발하였고, 한때 반고는 체포되어 옥에 갇히기도 하였지만 반초가 상소를 올려 형을 구명하였다고 한다. 이는 악재였지만 전화위복으로 복이되어 돌아왔는데, 당시 후한의 황제였던 '명제'는 이를 통해 반고의 재능을 알아 볼 수 있었고, 그는 반고의 한서 저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