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명나라시대 나라를 망친 환관 「위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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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사상 최악의 환관 탄생

'위충현'은 중국 명나라 시대인 1568년에 북직례성 창주 숙녕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위사'인데,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문맹이었으며, 거기에 더해 도박 중독이었다고 한다. 위충현은 도박빚을 갚기 위해 처를 벌리고 딸도 팔아버릴 정도의 위인이었는데, 하루는 도박에서 져 상대 건달들에게 모욕을 당했는데 가진 것도 없고 무식한 처지에 분풀이조차 할 수 없었고, 이에 환관이 되어 황궁으로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생각으로 홧김에 자신의 고환을 훼손하여 고자가 되었다. 이후 1589년에 위충현은 이름을 '이진충'으로 개명하고 사례병필태감 '손섬'의 수하로 환관으로 입궁할 수 있었는데, 그는 일자무식이었지만 눈치가 빠르고 잔꾀를 잘 부렸기 때문에, 금방 황궁의 창고를 관리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 명나라의 황제는 '만력제'였는데, 조정에서는 실권이나 후계자자리를 놓고 대신들과 궁녀들, 그리고 환관들이 얽혀 정치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중 환관들의 우두머리는 '왕안'이었는데, 그는 보기 드물게 강직하고 정의감이 있는 성품으로 유교를 숭상하는 동림당 계열의 대신들 사이에서도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위충현은 이렇게 신망이 두터운 왕안을 이용할 생각을 하여 그의 측근 중 한 명인 '위조'에게 접근하여 아부하였고, 위조와 결의형제를 맺어 왕안의 수하로 합류하였으며 전선의 직책을 받아 황태손인 '주유교'의 생모 '왕재인'을 챙기는 역할을 맡았다.

혼란스러운 명나라 황실

위충현은 도박중독답게 주유교와 왕재인에게 모든 것을 배팅한 것 같은데, 사실 이는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실제 주유교의 아버지인 '주상락'은 장남으로 만력제에 의해 공식 황태자로 책봉되기는 하였으나, 만력제는 삼남인 '주상순'을 총애하여 그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대신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였으며, 궁궐 내에 정치싸움도 심화되었는데, 주상락은 물론 주유교도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주상락이 무사히 제위를 물려받는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있었는데, 주유교 또한 장남이기는 하였으나 만력제가 주상순을 내세운 이유처럼 주상락과 같이 생모가 천한 신분이었다. 주변사람들도 주유교가 황제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버지인 주상락 조차 주유교에게 무심하여, 주유교는 황족 신분임에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아 글을 읽을 줄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위충현은 주유교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착실하게 노력하였는데, 그의 유모였던 '객씨'에게도 접근하여 환심을 샀다. 사실 객씨는 일개 유모로 주유교가 성장함에 따라 궁에서 나가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는데, 주유교와 객씨의 사이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위충현이 눈치챈 것이다. 그녀는 본래 위조와 대식관계를 맺고 서로 지지하는 관계였는데, 위충현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정무로 바쁜 위조의 눈을 속이고 객씨를 유혹하여 한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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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의 도박에 성공한 위충현

1615년 일어난 '정격안' 사건으로 인해 주상락은 황태자의 자리를 공고히 할 수 있었고, 1620년 만력제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라 '태창제'가 되었다. 이는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는 일이긴 하였으나, 위충현에게 있어 이 정도만 돼도 절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정도였는데, 태창제는 즉위한 지 29일 만에 '홍환안' 사건으로 급사하게 된다. 이후 그 뒤를 이어 주유교가 16세의 어린 나이로 '천계제'로 즉위하면서 위충현은 일생일대의 도박에 성공한 셈이 되었다. 천계제가 즉위하였을 때 태창제의 총애를 받던 후궁인 '이선시'가 황제의 나이가 어린것을 이유로 섭정을 하려고 한 '이궁안' 사건이 있었는데, 그녀는 이때 위충현과 결탁하려고 했다는 것을 보면 이미 위충현이 어느 정도 세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선시의 계획은 실패하여 물러나게 되었지만, 여기에 연루되어 만력제의 총애를 받던 '정귀비'의 세력이 축출되면서 위충현이 실권을 잡는 것이 한층 쉬워지게 되었다. 이때 한낮 유모였던 객씨가 천계제에 의해 봉성부인으로 책봉되어 정식으로 계속해서 궁궐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으며, 위충현도 객씨의 도움을 받아 궁궐의 땔감을 관장하던 하급직인 석신사에서 단번에 사례감의 병필태감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병필태감은 황제와 대신들 사이에 어명이나 상소 같은 말과 문건들을 전달하는 일로 현대로 말하자면 일종의 비서실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상 천계제에게 통하기 위해서는 필히 위충현을 거쳐야 하는 것이 된다. 천계제는 무식한 자신이 황제가 된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정무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취미인 목공일에만 열중하여 나머지는 모두 위충현에게 맡겼다고 하는데, 다만 동생인 '주유검'의 교육에는 무척 신경을 써서 자신처럼 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였다고 한다.

국정 장악

위충현은 사실상 천계제로 향하는 문고리를 쥐게 되었으며, 충성스럽고 현명하다는 '충현'이라는 이름까지 하사 받았지만, 실제로 황제와 같은 권한을 쥐기에는 갈길이 멀었다. 그는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일을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주저하였지만 객씨가 이선시가 쫓겨난 것을 들어 그를 부추겼다고 한다. 가장 먼저 쳐낸 것은 바로 환관이자 자신을 이끌어준 상사인 왕안이었는데, 천계제는 왕안에게 계속 사례감으로 근무하게 하였지만, 강직한 그는 선례를 들어 사양하였다고 한다. 이때 위충현이 나서서 그가 사직하는 것이 맞다며 보태었고, 이후 사람을 시켜 그를 모함하여 환관으로 구성된 군대인 '정군'으로 좌천시켰으며, 끝내 사람을 보내 살해하였다. 또 한때 결의형제를 맺었던 위조 또한 거짓 어명으로 귀양을 보내 숙청하였다. 1622년에는 천계제가 '광종'의 황릉과 경릉을 완공한 공을 들어 위충현에게 상을 내렸는데, 그의 조카가 지휘첨사로 임명되어 금위군을 관리하게 되었다. 또 이듬해에는 명나라의 첩보기관인 '동창'을 관장하게 되었으며, 아예 금위군으로 위장하여 황궁 내에 1만여 명의 사병을 두기도 하였다. 사실상 위충현이 황궁 내의 무력을 완전히 장악하였기 때문에, 이에 우려하여 1624년경부터 동림당을 중심으로 한 여러 신하들이 반발하기 시작하였는데, 사실 이는 너무 늦은 조치였다. 많은 신하들이 위충현을 탄핵하고 상소를 올렸지만, 사실상 천계제에게 전하는 말과 상소는 모두 위충현을 통해야 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천계제는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위충현이나 객씨가 대신 읽어준 것으로 보이는데,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은 쏙 빼버렸다. 여기에 더해 동창과 금위군을 활용하여 자신을 위협하는 이들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잡아다 취조하고 고문하였는데, 죄를 뒤집어 씌우거나 어명을 위조하여 수많은 관료들을 파직하거나 귀양 보냈으며, 그중 일부는 고문을 버티지 못해 옥사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더해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과거를 통해 진출한 관료들 중에서 위충현에게 가담하는 이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환관이 위충현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부하였으며, 앞장서서 걸림돌이 되는 이들을 숙청하였다. 그중에는 소위 '오호', '오표'로 불리는 이들도 있었는데, 문관인 오호들은 음모를 꾸미고 죄를 날조하였으며, 무관인 오표들은 죄인을 잡아다 심문하고 고문하는 일을 맡았다. 사실상 명나라 황제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던 위충현은 자신을 칭송하는 말로 '구천세', 혹은 '구천구백세'라고 외치게 하였는데, 차마 황제만 받을 수 있는 '만세'를 요구하지는 못하였다. 또 자신이 요순임금이나 다름없다며 '요천순덕지성지신'이라는 존호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1626년에는 서호 호반에 죽지도 않은 본인을 모시는 생사당을 만들게 하고, 거기에 절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잡아다 죽였다고 한다.

간신의 말로

위충현은 궁궐에 환관 3,000명으로 구성된 자신의 친위대를 만들었으며, 외출할 때는 위사들을 먼저 보내 길을 정리하게 하고, 수만 명의 인마를 동원하여 뒤따르게 하며 길가의 군중들에게 무릎 꿇고 구천세를 외치게 하는 등 위세를 자랑했다. 또 위충현을 모시는 생사당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졌으며, 그를 공자에 빗대어 칭송하는 간신배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충현의 권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는데, 1627년에 천계제가 2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면서 끝나게 된다. 본래 천계제에게는 몇 명의 자식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들이 자라면 자신의 권력이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한 위충현이 갓난아이 일 때 이미 모두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천계제가 예상외로 일찍 죽게 되자, 동생 주유검이 황위를 이어받아' 숭정제'가 되었고, 위충현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제위 초기에 숭정제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위충현의 부하들을 대우해주기도 하였지만, 이내 대신들의 탄핵이 시작되었고, 숭정제는 일단 위충현을 사직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위충현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서 집을 싸는데만 3일이 걸렸다고 하니, 그동안 쌓아놓은 재산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다. 그러나 위충현이 수도를 떠나자 숭정제는 본격적으로 숙청을 시작하였는데, 먼저 위충현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그의 수하들을 하나씩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위충현은 귀향 도중에 이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완전히 체념하여 길가 나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재산은 짐을 나르던 인부들이 챙겨 도망갔다고 한다. 객씨도 무사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잡혀가서 고문당하면서 그동안의 악행을 자백하였고, 끝내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숭정제에 의해 숙청된 위충현의 일파가 261명에 달했는데, 이는 명나라 전체 관료의 1/4에 달하는 숫자라고 하며, 당시 이미 쇠퇴하고 있던 명나라는 위충현의 8년 간의 국정농단까지 더해 그가 사망한 지 17년 만에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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