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전국사군의 한사람 위나라의 신릉군 「위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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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위나라의 신릉군

'신릉군'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위나라 사람으로 본래 이름은 '위무기'이다. 그는 위나라 '소왕'의 아들로 소왕이 죽고, '안희왕'이 그 뒤를 잇자, 이복동생인 그는 신릉군으로 봉해졌다고 한다. 신릉군은 전국시대의 유력자들인 '전국사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데, 그도 다른 이들처럼 많은 식객들을 데리고 있어, 그 수가 3,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한 번은 신릉군이 안희왕과 바둑을 두고 있을 때, 조나라의 군대가 국경에 출몰했다는 급보를 받았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안희왕은 크게 당황했는데, 신릉군은 태연한 자세로 계속 바둑을 이어가면서 조나라의 왕이 사냥을 나왔을 뿐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후 정말 신릉군의 말대로였기 때문에 안희왕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물었는데, 신릉군은 자신의 휘하에 조나라 왕에 대해 알려주는 이가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식객들의 역할과 이들이 식객들을 두고 보살피는 이유를 단편적으로 알려주는 일화인데, '맹상군'의 '계명구도'에 대한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다른 재주나 남들이 잘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은 현대시대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국사군의 일화들을 살펴보면, 다들 많은 식객들을 데리고 있지만 활약을 하는 것은 고작 몇 명뿐인데, 그만큼 재능이나 정보에는 시의적절성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이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많은 식객들을 보유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효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한 때문인지 한 세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일부 부유한 사람들은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방식으로 인맥을 만들어 소위 '지역유지'라고 불리기도 하였지만, 효율성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방식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어찌 되었던 신릉군은 식객들의 도움을 얻어 남들이 모르는 조나라 왕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지만, 안희왕은 이 일로 신릉군을 두려워하여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후영과 주해

신릉군은 성품이 인자하고 겸손하며, 인재를 대함에 있어 신분 고하를 막론했기 때문에 다양한 식객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이가 '후영'이란 자인데, 그는 모략을 잘 짜는 비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지만,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기 때문에 성문을 지키는 일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신릉군은 늙은 성문지기인 후영이 현인이라는 말을 듣고 많은 재물을 보내어 그와 사귀려고 하였지만, 후영이 번번이 이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신릉군은 위나라 조정의 관료들과 여러 명사들을 모아 연회를 열고서는, 그 자리에 후영을 데려오기 위해 직접 찾아갔다고 한다. 처음에 후영은 이 초대에 대해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신릉군이 마차를 가지고 오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즉시 마차의 상석에 앉았으며, 술자리에 가려면 자기 친구인 '주해'도 데려가야 한다며 손을 들어 방향을 지시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후영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신릉군은 아무 소리 없이 후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마차를 몰았다. 막상 주해를 찾아가자 후영은 또 주해의 집에 들어가 한식경 동안이나 환담을 나누었으며, 또 연회장에 도착해서는 아무런 인사도 없이 술을 받아 마시는 등 안하무인 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이후 연회가 끝나자 후영이 신릉군을 찾아와 말을 했는데, 그가 예의 없이 행동한 일은 모두 신릉군을 위한 것으로, 이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은 신릉군이 너그럽고 진심으로 인재를 찾는 사람이라고 알게 되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과연 얼마 안 있어 이 소문을 들은 많은 인재들이 신릉군의 휘하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위나라의 재상이었던 '위제'가 진나라의 재상 '범수'에게 원한을 사 조나라로 도망쳤다가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 신릉군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하였는데, 신릉군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며 만남을 꺼리자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하였다. 결국 이 일로 많은 신릉군의 식객들이 실망하고 떠나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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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부구조

조나라의 '평원군'은 신릉군의 누이와 혼인하여 신릉군과는 인척관계였는데,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조나라의 수도 한단이 포위되게 되자, 그는 안희왕과 신릉군에게 서신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면서, 동시에 직접 초나라를 찾아가 지원군을 보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안희왕은 군대를 모아 '진비'에게 주어 조나라를 구원하게 보냈으나, 이내 진나라의 협박에 겁을 먹고 국경지대에서 상황을 관망하도록 하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였던 평원군은 신릉군에게 계속해서 지원을 재촉하는데 안희왕은 이를 들어주지 않으니, 그 사이에서 속이 타던 신릉군은 사재로 장비를 마련하여 식객들과 독자적으로 조나라로 향할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사실 당시 안희왕은 위나라의 안위만을 생각하면 되는 입장이었지만 신릉군의 입장은 더 복잡했는데, 왕명을 어기고 조나라를 구하려고 하면 국내에서의 입지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조나라를 버리게 되면 신의를 지키지 않은 인물로 찍혀 전국에서 평판을 잃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때 후영이 나서서 계책을 내놓았는데, 그는 먼저 안희왕의 애첩인 '여희'를 시켜 병부를 훔쳐오게 하라고 하였다. 병부는 당시 군사 지휘권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이를 이용해 위나라의 군대를 탈취하여 조나라를 돕자는 것이다. 본래라면 병부는 절대 몰래 훔쳐올 수 없었겠지만, 마침 신릉군이 과거에 의도치 않게 여희의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준 일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난관이 있었는데, 바로 장군인 진비가 이에 따르지 않고 버티는 경우가 문제였다. 이 때문에 후영은 진비를 찾아가 군대를 넘겨받을 때 주해를 데려갔다가, 진비가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이도록 안배하였다. 주해는 그 능력이 출중하였지만 본래 저잣거리에서 백정일을 하던 자였는데, 후영의 친구로 신릉군도 몇 번 찾아가서 만난 적이 있으나 항상 시큰둥한 태도로 답례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주해는 신릉군에게 지금까지 답례를 하지 않은 것은 사소한 예로 보답하기에 너무 부족해서였다며, 이번에 목숨을 걸고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후 후영의 예상대로 진비는 신릉군을 의심하며 지휘권을 넘기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그러자 주해가 소매 속에 숨겨뒀던 40근짜리 철퇴를 꺼내 진비를 때려죽였다고 한다. 또 후영은 늙은 몸이었기 때문에 신릉군을 따라오지 못하였는데, 대신 그는 신릉군이 위나라 군대를 접수하는 날을 계산하였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신릉군은 역모를 저지른 셈이라, 이후로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위나라에서 활동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신릉군이 병부를 훔쳐 조나라를 구한 것은 고사성어 '절부구조'의 유래가 되었다.

신릉군과 평원군

기원전 257년 조나라는 위나라와 초나라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지만, 대신 신릉군은 왕명을 어기고 장군을 죽이는 등 큰 죄를 저질렀고, 이 때문에 위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조나라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신릉군은 '모공'과 '설공'이라는 이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평원군이 그가 신분이 천한 이들과 어울린다며 흉을 보았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신릉군은 위나라까지 이름이 알려진 인재들도 몰라본다며, 조나라를 떠나겠다고 하자 평원군이 급히 찾아가 이를 만류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일로 평원군은 신망을 잃어, 그의 식객의 절반 이상이 신릉군에게 돌아섰다고도 한다. 이는 신릉군과 평원군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일화로, 신릉군은 '맹상군'처럼 출신성분보다는 그 재주를 중요시한데 반해, 평원군은 재주만큼이나 신분도 중요시하였다. 신릉군은 장장 10여 년을 그렇게 조나라에서 보내게 되었고, 이 때문에 조나라에서는 한때 신릉군에게 영지를 내려주려고도 하였다고 하는데, 위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인지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위나라의 최후

한편 진나라에서는 '장양왕'이 새로 왕으로 즉위하였고, '여불위'가 재상이 되어 기원전 249년에는 동주가 멸망하게 되었으며, 이듬해인 기원전 248년에는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안희왕은 사람을 보내 신릉군에게 도움을 청하였는데, 신릉군은 신릉군대로 안희왕을 믿지 못해 이를 계속 거절하였다고 한다. 결국 모공과 설공이 나서 위나라를 진나라에게 잃으면, 결국 모든 것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득하였고, 안희왕이 위나라의 모든 군권을 신릉군에게 맡기기로 하면서, 신릉군은 오랜 망명생활을 접고 다시 위나라로 귀국하게 된다. 당시 신릉군은 신의를 지켜 이웃나라인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국인 위나라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버린 것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는데, 이러한 신릉군이 모국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지휘관으로 나서자 여러 국가에서 지원군을 보내주었다. 신릉군은 위나라와 조나라, 연나라, 제나라, 초나라 등 각국의 연합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상대하여, 진나라의 군대를 대패시키고 함곡관까지 쫓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전국의 패자자리를 노리고 있던 진나라는 이에 그치지 않았는데, 진나라에서는 무력으로 위나라를 제압하는데 실패하자, 안희왕과 신릉군을 이간질하는 방식으로 공략 방법을 바꾸었다. 그들은 이전에 신릉군이 살해한 '진비'의 전 부하들을 이용하여 그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며 모함하였고, 이에 넘어간 안희왕은 다시 신릉군에게서 군권을 빼앗는 등 다시 그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신릉군은 상심하여 매일 집에서 술이나 마시는 생활을 이어가다가 4년 뒤인 기원전 243년경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후 안희왕도 해가 지나기 전에 사망하였으며, 18년 후에는 아예 위나라가 진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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