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한 월나라의 왕 「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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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변방 이민족의 나라

'구천'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월나라의 왕 '윤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월나라는 중국의 동남부에 위치한 곳으로 당시 중원의 한족들은 이들을 이민족으로 생각하였지만, 월나라의 왕들은 스스로를 하나라의 후손이라고 여겼으며, 구천도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구천이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기록은 없으나, 기원전 500년경부터 아버지 윤상을 대신해 국정을 돌본 것으로부터 추정하여 약 기원전 520년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월나라는 주나라의 변경 밖에 위치하고 있어, 주나라에서 정식으로 봉작을 받기는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이민족으로 취급받았으며, 그 위치상 오나라와 함께 강성한 초나라의 압박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동시에 오나라와는 경쟁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514년 '합려'가 오나라의 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 이러한 역학관계가 변하기 시작하였는데, 합려는 '오자서'와 '손무', '백비' 등을 등용하여 그들의 도움을 얻어 초나라를 정벌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초나라는 큰 피해를 입어 쇠퇴하였으며, '범려'와 '문종' 같은 이들이 월나라에 유입되어 월나라 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취리 전투

기원전 497년에 윤상이 사망하면서 구천이 뒤를 이어 월나라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합려는 이것을 기회로 여겨 대군을 이끌고 월나라로 쳐들어왔다. 당시 초나라를 제압한 합려는 중원을 도모하기 전에 월나라를 정벌하여 후환을 없에려 한것 같은데, 이때 오자서는 합려의 월나라 원정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 오나라의 국력은 월나라와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는데, 이미 오래전부터 중원의 지식과 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이 신장된 오나라와 달리, 월나라는 이제 범려와 문종 등의 협력을 통해 막 국력이 성장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하물며 전 왕의 상중에 적의 대군을 맞이하게 된 구천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취리 전투'에서 오나라의 대군은 월나라에 패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합려는 전투 중 입은 부상이 도져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서 월나라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합려의 뒤를 이어 오나라의 왕이 된 '부차'는 복수하기 위해 장작 위에서 잠을 자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투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이 생기는데, 월나라는 취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범려의 기책으로 오나라를 대패 시킬 수 있었다고 하지만, 그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월나라의 결사대가 3열을 만들어 오나라의 진영 앞으로 다가간 후 고함을 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는데, 전장에서 단지 그런 행동으로 전세를 뒤집을 정도의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는지, 애초에 그것이 사실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추가적인 책략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어찌되었든 이 전투로 말미암아 생긴 큰 원한은 나아가 두 나라의 존망에 영향을 주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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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

기원전 494년 오나라가 월나라에 복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구천에게도 전해졌고, 이에 그는 역으로 먼저 오나라를 공격하여 그들이 기세를 꺽을 생각을 하였다. 구천은 '석매'에게 군대를 주어 오나라를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범려는 이 선제공격에 대해 반대하였지만 구천이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왕인 부차가 월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만큼 월나라가 공격해 올 것에 대해서도 충분한 대비가 되어있었던 것 같은데, 월나라는 '부초 전투'에서 오나라에 대패하였고 지휘관이었던 석매는 그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오나라는 승리의 기세를 타고 그대로 월나라로 침공하여 월나라 수도를 포위하였으며, 구천은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회계산에 들어가 농성하였다. 이로서 월나라와 구천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는데, 범려와 문종은 다시 한번 계책을 내어 월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게 된다. 범려와 문종은 먼저 오나라의 중신인 '백비'에게 뇌물을 주어 자리를 마련하였고, 구천이 직접 부차를 찾아가 항복을 청하게 된다. 구천은 월나라를 오나라에 바치고 스스로 신하와 노비가 되어 부차를 섬기겠다며 애걸하였는데, 승리에 도취된 부차는 백비의 말을 듣고 구천의 항복을 받아주었다. 이때 오자서는 후환을 없에기 위해 월나라를 멸망시켜야 한다고 간언하였지만 부차는 이를 무시하였다고 하는데, 합려도 그렇고, 부차도, 그리고 구천도 꼭 중요할 때는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월나라는 오나라의 속국이 되었고, 구천은 오나라로 끌려가 노비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되지만, 어찌되었던 구천은 월나라와 왕이라는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범려와 문종은 월나라를 부흥시키면서, 동시에 구천을 오나라에서 빼내올 수 있도록 갖은 뇌물을 보내는 등 노력을 다하였고, 구천 또한 부차에게 아부하는 등 치욕을 참아가며 노비 생활을 한 끝에 기원전 487년에 월나라로 귀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구천은 천장에 곰 쓸개를 매달아 놓고 매일 쓰디 쓴 쓸개를 핥으며 부차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였고, 부차가 장작 위에서 잔 것과 구천이 쓸개를 핥은 것이 합쳐져 '와신상담'의 유래가 되었다.

서시와 오자서

부차는 월나라에서의 자신의 대대적인 승리와 구천의 행동을 보고 완전히 자만심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는 월나라를 완전히 복종시켰다고 생각하여 오나라의 창 끝을 북쪽의 제후국들에게 돌리었다. 오자서는 이러한 부차의 행동에 반대하면서 무리한 전쟁을 중지하고 월나라를 경계할 것을 진언하였지만, 부차가 이를 듣지 않으면서 서로 사이만 멀어지게 되었다. 또 부차와 오자서 사이에서 이들을 이간질 한 인물이 있는데, 바로 중국의 미녀로 유명한 '서시'이다. 월나라에서는 부차의 환심을 사고 월나라에 대한 경계심을 없에기 위해 많은 뇌물을 보내었는데, 그 안에는 '시이광'과 '정단'같은 미녀들도 있었다. 서시의 본래 이름이 시이광인데, 부차는 서시에게 빠져 정무를 태만히하고 향락을 즐겼으며, 백비같은 간신의 말만 듣고 오자서를 멀리 했다고 한다. 결국 오자서의 마음이 먼저 오나라에서 떠났는데, 그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을때 자신의 자식을 그곳에 맡기고 돌아왔다. 부차는 이를 빌미로 오자서에게 보검을 내려 자결하게 하였으며, 오자서가 죽으면서 남긴 간언에 분노하여 그의 시체를 장강에 던지도록 하였다. 이렇듯 구천은 월나라의 내부를 다지면서 오나라가 국력을 소모하도록 유도하였고, 그러면서 오나라에 쳐들어갈 기회를 계속 옅보고 있었다.

춘추오패

부차는 패자가 되기 위해 공을 들였는데, 그는 제나라와 노나라를 공격하는 등 다른 제후국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열중하였고, 기원전 482년에는 3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회맹에 참여하여 군사력으로 압박할 계획을 세웠다. 구천은 바로 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는 부차가 정병들을 데리고 나라를 비운 사이에 오나라로 쳐들어 갔으며, 부차의 태자인 '희우'를 생포하였다. 이 소식은 회맹자리에 있던 부차에게까지 전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차는 패자가 되는데에만 신경을 써서, 오히려 월나라에 패배했다는 소식이 다른 제후국들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하려고 입단속을 했다고 한다. 결국 희우는 구천에게 살해당하였고, 오나라는 월나라 군대에게 유린당하게 된다. 이 시기 이미 월나라와 오나라의 국력이 역전되기 시작한 것 같은데, 부차는 끝까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구천은 계속해서 오나라를 공격하였고, 기원전 475년에는 오나라의 수도를 포위하였다. 전쟁에 패배한 부차는 과거의 일을 꺼내면 항복을 받아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범려가 나서 회계산의 일을 잊었냐며 구천을 일깨웠다고 한다. 기원전 473년 한때 패자의 자리에 까지 올랐던 부차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고,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월나라의 기세를 중원에 알렸다. 이후 구천은 중원의 제후들과 회맹하여 부차 대신 패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월나라의 전성기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는데, 강적 오나라가 사라진 월나라에서 자신의 자리가 없어질 것을 염려한 범려는 벼슬을 버리고 잠적하여 제나라로 향했다. 그는 떠나기 전에 동고동락한 공신인 문종에게 편지를 남겼는데,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창고에 들어가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 개도 삶아진다는 것으로 바로 '토사구팽'의 유래가 된 내용의 편지이다. 문종은 이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하는데, 그가 얼마 안있어 구천에 의해 숙청되면서 범려의 염려했던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후 구천도 오래지 않아 병사하였고, 월나라는 쇠퇴의 길을 걷다 기원전 334년에 재기에 성공한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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