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전국사군의 한사람 초나라의 춘신군 「황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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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초나라의 춘신군

'춘신군'의 이름은 '황헐'로 고대 중국 전국시대의 초나라 사람이다. 그가 태어난 해나 유년시절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중국에는 그의 증조부인 '경수공'이 신라로 피난 간 적이 있어 춘신군도 이때 어린 시절을 신라에서 지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그는 초나라의 '경양왕' 휘하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것 같은데, 기원전 273년에 진나라가 위나라와 한나라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공격하자, 사자로 진나라에 보내져 화평을 청했다고 한다. 춘신군은 진나라의 '소양왕'에게 진나라와 초나라가 중원의 최고 강대국인데, 두 호랑이가 서로 싸워봤자 이득을 보는 것은 주변의 개들 뿐이라고 이야기하였고, 이에 설득당한 소양왕이 전쟁을 멈추어 초나라는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이듬해에 초나라에서 태자 '웅완'(웅원)을 화평의 증표로 진나라에 인질로 보내었는데, 이때 춘신군도 함께 진나라로 가서 태자를 보필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263년에는 경양왕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는데, 공식 후계자인 태자가 타국에 있는 상태이다 보니 후계자 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였다. 춘신군은 소양왕에게 태자를 귀국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이에 그는 태자를 마부로 변장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낸 뒤 자신이 태자인척하며 시간을 끌었다고 한다. 춘신군은 일단 꾀병을 들어 사람들을 멀리하였는데, 언제까지나 계속 속일 수는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태자가 진나라 국경을 넘어간 이후에 소양왕을 찾아가 사실을 고하였다. 이때 소양왕은 크게 분노하여 춘신군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진나라의 재상인 '범수'가 나서서 말렸다고 한다. 범수는 태자가 이미 떠나 돌이킬 수 없으니, 차라리 큰 공을 세운 춘신군을 풀어주어 은혜를 입히는 것이 났다고 소양왕을 설득하였고, 덕분에 춘신군은 목숨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초나라로 귀환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태자가 왕으로 즉위하여 '고열왕'이 되자 춘신군도 영윤(재상)으로 임명되었고, 이때 회북 지역의 12개 현을 하사 받아 춘신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전국사군

춘신군은 당대의 유명한 인물들인 '맹상군', '평원군', '신릉군'과 함께 '전국사군'으로 평가받는데, 그도 다른 이들처럼 많은 식객을 두어 그 재주를 빌려 썼다고 한다. 춘신군은 전국사군 중에 가장 젊은 사람으로 알려진 일화도 적은데, 맹상군과 안면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평원군이나 신릉군과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원전 258년에 조나라가 진나라의 침략을 받아 수도 한단이 포위되었을 때는 평원군의 지원 요청을 받아 보낸 초나라 군대의 지휘를 맡기도 하였다. 결국 진나라는 포위를 풀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국가들의 역학구도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였지만, 진나라는 춘신군에게 은혜를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상충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기원전 248년에는 자신의 영지인 회북 지역이 제나라와 접해 있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직할지로 삼아야 한다며 반납했다고 하며, 고열왕은 대신 옛 오나라 땅인 강동 지역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때 춘신군은 오나라의 성을 거점으로 삼았으며, 군대를 이끌고 노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적을 쌓기도 하였다. 이 시기가 춘신군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로, 당시 춘신군의 휘하에는 3,000명에 달하는 식객들이 모여들었고, 그중에서 가장 높은 대우를 받는 상객들은 모두 구슬로 장식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고 한다. 또 춘신군의 식객 중에는 '성악설'로 유명한 '순자'도 있었으며, 그는 춘신군에 의해 난릉현령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기원전 241년에는 여러 나라의 연합군인 합종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함곡관에서 패배하였며, 이로 인해 초나라에서 입지가 다소 약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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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접목

춘신군의 식객 중에 '이원'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매우 아름다운 여동생이 있어 춘신군과 애인사이였고, 그녀는 조만간 춘신군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한다. 한편 그때까지 고열왕은 자식을 갖지 못해 초나라의 후계구도가 불안하였고, 이 때문에 춘신군을 포함한 여러 신하들이 고열왕에게 여자들을 소개해주고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기회로 여긴 이원은 여동생을 이용하여 출세하려고 한 것 같은데, 그는 춘신군을 찾아가 여동생이 이미 춘신군의 아이를 임신했으니, 지금 여동생을 고열왕의 후궁으로 삼게 하면 춘신군의 아이가 다음 왕이 될 것이라고 부추겼다고 한다. 춘신군이 어떤 생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원의 여동생은 고열왕의 후궁이 되었다. 이후 이원은 높은 신분이 되었으나, 자신이 꾸민 일이 탄로 날까 두려워 춘신군을 제거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춘신군의 식객 중 '주영'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도 이 사실을 알고 춘신군에게 이원을 죽이도록 명해달라고 청하였지만, 춘신군은 이원에 대해 별달리 생각하지 않았고, 주영은 춘신군에게 실망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변에도 위험이 닥칠 것을 우려하여 초나라를 떠나 도망쳤다고 한다. 기원전 238년에 고열왕이 병사하고 '유왕'이 즉위하였는데, 그가 바로 춘신군이 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춘신군은 고열왕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고 있었는데, 이원이 매복시켰던 자객들이 나타나 춘신군과 그의 종자를 살해하였으며, 춘신군의 일족과 식객들까지 모두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후 유왕도 재위 10년 만인 기원전 228년에 죽었고, 그의 동생인 '애왕'이 뒤를 이었으나 재위 두 달 만에 이복형인 '웅부추'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러나 초왕 부추도 오래가지 못했고, 기원전 224년에 초나라는 진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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