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명청교체기 명나라와 청나라를 배신한 「오삼계」
- 역사
- 2023. 9. 18.
몰락하는 명나라의 장군
'오삼계'는 1612년 중국 명나라에서 태어났다. 오삼계의 집안은 본래 강소성 고우에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인 '오양'이 명나라의 장수로 요동 지방에서 복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동에서 태어나 자라게 된다. 오삼계는 소년시절에 아버지가 후금군에 포위되자 홀로 뛰어들어 구해냈다고 하는데,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렸을적부터 군대와 가까이에서 생활하며 군사적 재능을 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입대하여 아버지와 함께 군생활을 이어간 것 같고, 1631년에 오양이 '달링허 전투'의 패배로 인해 하옥되면서, 그가 아버지의 직위였던 요동총병을 이어받게 되었다. 1641년에는 29세의 나이로 영원성에서 명나라 군대를 지휘하는 제독이 되었는데, 이후 벌어진 '송산 전투'에서 청나라군에 패배할 때, 미리 퇴각하여 산해관을 접수하였으며, 그대로 눌러앉아 청나라의 진격을 막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전까지 명나라는 산해관이나 영원성 등의 요충지에 의지하여 만주족의 침략에 맞섰으며, 그 과정에서 '영원성 전투'에서 '원숭환'이 '누르하치'를 전사시키는 등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중앙 조정에서의 정치싸움과 관료들의 부패 등으로 인해 국력이 쇠퇴하였고, 그 과정에서 여러 장수들이 이반하여 청나라에 가담하는 등 안 좋은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 동안 청나라는 귀순한 명나라 장수들을 중용하였으며, 그들이 가져온 기술로 명나라의 신식무기였던 '홍이포'를 만드는 등 군사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승리한 송산 전투에서 다시 명나라의 총지휘관이었던 '홍승주'를 항복시키는 등 점점 상황을 역전시키게 된다. 게다가 이 와중에도 명나라 내부에서는 '이자성의 난'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1644년에는 서안을 함락시킨 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대순'을 건국하였고, 그대로 북경을 향했기 때문에 '숭정제'는 오삼계에게 산해관을 나와 북경을 구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북경의 길목을 지키던 자들이 이자성에게 항복해버리면서, 미처 오삼계가 북경에 도달하기도 전에 자금성이 함락되고 숭정제가 자결하여 명나라가 멸망해 버렸고, 이로 인해 오삼계는 산해관에 고립되어 앞 뒤로 청군과 이자성군에 막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게 된다.
청나라의 장군
산해관에 고립된 명나라 군대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가지 였는데, 하나는 이자성의 대순에 투항하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청나라에 투항하는 것이었다. 청나라는 이민족이자 지금까지 자신들과 싸운 적이기도 했지만, 대순도 반란군이었기 때문에 쉽게 선택하기 어려웠는데, 결국에는 같은 한족이자 명나라 출신인 대순에 가담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항복하려는 도중에 이자성이 북경에서 대신들과 백성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약탈을 벌인 소식을 알게되었는데, 북경에 있던 오양 또한 고문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대순에 항복하는 것을 포기하였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오삼계의 첩인 '진원원'이 북경에 남아있었는데, 이자성의 부하인 '유종민'이 그녀를 뺏았았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나 청나라에 투항하였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한 신빙성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어찌되었든 이자성은 오삼계가 투항하지 않자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으로 향했고, 이틈을 노리고 청나라에서도 군대를 보내어 산해관은 사이에 끼인 형상이 될 수 밖에 없었는데, 결국 오삼계는 청나라에 합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청나라와 동맹하여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려고 하였지만, 당시 실질적으로 청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섭정 '도르곤'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항복할 것을 고집하였다고 한다. 결국 오삼계와 산해관의 병사들을은 청나라에 항복하였고, 이어 청나라 군대에 협력하여 대순군을 대패시키고 북경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상황상 오삼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지만, 결국 이 선택 때문에 그는 한족들에게 명나라와 한족을 배신한 배신자이자, 외적인 만주족과 손을 잡은 기회주의자 매국노 취급을 당하게 된다.
운남을 다스리는 평서왕
청나라는 항복한 명나라 장수들의 도움을 받아 재빠르게 화북지역을 장악하였고, 이 과정에서 대순군은 대패하였으며, 1645년에 이자성이 사망하면서 대순은 멸망하게 된다. 그런데 청나라는 옛 금나라의 영토였던 지역을 확보하자 진군을 멈추려고 하였다고 하는데, 애초에 만주족들은 강남지역으로는 내려가 본적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형이나 풍토병 등의 문제로 가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이때 오히려 옛 명나라의 장수였던 홍승주가 나섰는데, 그는 남명을 그대로 남겨두면 큰 후환이 될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진언하였다고 한다. 결국 청나라에서는 타협하여 남벌을 한족위주의 세력에게 맡기기로 하였고, 이에 한족 군사력을 확보하고 있던 오삼계와 '상가희', '경중명' 같은 이들이 주축이 되었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에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기는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명나라는 한족들이 멸망시켰으며, 청나라의 중원 통일도 사실상 한족들이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꼴이다. 이들은 공을 인정받아 번왕으로 봉해져 특권을 누리게 되었는데, 오삼계는 평서왕에 봉해져 운남성과 귀주성을 영지로 하사받았으며, 평남왕 상가희는 광동성과 광서성, 정남왕 경중명은 복건성을 하사받았다. 이때 이들이 받은 왕위는 그저 이름뿐인 봉작이 아니었는데, 청나라를 반청세력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 남부 지방을 다스리는 것을 꺼려하여, 아예 이들에게 실질적인 지배에 준하는 권한을 주었다. 이렇게 청나라에게 받은 근거지를 기반으로 오삼계는 티베트와 요동, 그리고 서양 상인들과 무역을 통해 부를 축척하였고, 다른 왕들도 각자의 근거지에서 세력을 키웠다. 이처럼 명나라 멸망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한족들은 상당히 많은데, 그 중에서도 유독 오삼계는 산해관을 포기한 일이나, 버마로 도망쳤던 남명의 '영력제'를 잡아 죽게한 일로 비난의 표적이 된다.
삼번의 난
오삼계는 운남지역에서 폭정을 일삼았다고 하는데, 그는 휘하의 병사들을 이용하여 토착민들을 탄압하고 약탈하였으며, 그들이 압제에 못이겨 난을 일으키면, 그를 빌미로 군사력을 확장하면서 난을 진압하고 토지와 재산을 빼앗았다고 한다. 또 여러이유를 들어 강제로 토지를 빼앗아 영지로 편입하였는데, 이 때문에 자영농들이 농지를 잃어 오삼계의 영지에서 소작농으로 생활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번왕들도 대체로 비슷하여 무역을 통한 이익을 독점하거나, 폭리를 취하여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하는데, 이런 내용들은 모두 청나라에서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진실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게다가 이는 결코 칭찬받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번왕들에게는 필수불가결한 행위기도 했는데, 그들은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막대한 군사력을 유지하는데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강남 지역은 반청복명의 기치 아래에 활동하는 세력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도 또, 우려되는 청나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강력한 군사력은 필수적이었다. 만약 이들이 아니라 청나라가 직접 통치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말하자면 청나라가 먹을 욕을 이들이 대신 먹은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1661년 '강희제'가 새 황제로 즉위하였는데, 당시에는 겨우 8살의 어린나이로 '구왈기야 오보이' 등이 대신 통치하였고, 그는 번왕들에게 뇌물을 받으며 그들에 대해 방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669년에 구왈기야 오보이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숙청당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는데, 강희제는 이때부터 삼번을 폐지할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삼번은 어디까지나 청나라 안에 있었지만 사실상 독자적인 세력으로 특히 그 군사력면에서 청나라의 위협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강희제는 철번을 생각하면서도 함부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1673년에 상가희가 고령을 이유로 장남 '상지신'에게 평남왕 자리를 물려주고 귀향할 것을 청하였다고 한다. 이때 강희제는 상가희의 귀향을 허가하였지만 평남왕의 세습은 불허하였는데, 이는 정남왕의 자리를 아들 '경계무'와 손자 '경정충'이 세습받은 것과는 다른 결정으로 사실상 철번의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작 상가희 자신은 이러한 강희제의 결정을 얌전히 받아들였는데, 이를 우려한 오삼계와 경정충도 철번하겠다는 상소를 올렸고,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강희제는 아무 의심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이를 위협으로 받아들인 오삼계는 전면에 나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1674년에 반청복명의 기치를 걸고 호남과 호북, 사천 지방을 장악하며 청나라를 압박하였다. 이는 청나라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는데 강희제는 급히 사신을 보내 상가희와 경정충에게 철번을 취소한다는 명령을 보냈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경정충도 복건에서 반란을 일으켜 오삼계에 가담하였다. 반면 상가희는 강희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청나라를 따를 것을 보였는데, 이 과정에서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나게 된 상지신이 상가희가 병이 난 틈을 타 세력을 장악하였고, 그도 반란에 가담하면서 이 반란을 '삼번의 난'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대대적으로 일어난 반란은 생각보다 어이없이 무너지게 되는데, 사실 이 세 번들 사이에는 제대로 된 결속력이 전혀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애초에 복건을 장악하고 있던 경정충은 오삼계처럼 제대로 된 군사 경험이 있는 장군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한편이나 다름 없는 대만의 '동녕 왕국'과 다툼을 벌이다 영토를 빼앗기기도 하였고, 1676년 청나라 군대가 그 틈을 노리고 집중 공격하자 그대로 항복해 버렸다. 그러자 이듬해인 1677년 상지신도 청나라에 항복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려고 했을 뿐으로 애초에 반란에 제대로 가담할 생각도 없었으며, 실제로 반란에 가담하는 행동도 제대로 한 것이 없었다. 결국 제대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오삼계 혼자였는데, 그는 1678년에 국호를 '주'로 하여 스스로 황제를 칭하기도 하였지만 겨우 5개월만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이렇게 오삼계는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도 배신하면서, 만주족 사람들에게도 배신자로 비난 받으며, 청나라 때 만주족에 복속된 내몽골인들에게도 부정적으로 평가 받는다고 한다. 그후 후계는 손자 '오세번'이 이었지만 구심점을 잃은 반란군은 점차 와해되기 시작하였고, 1681년에 청나라 군대가 근거지까지 밀려들어오자 오세번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반란이 막을 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