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한시대 흉노를 토벌한 명장 「곽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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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황후의 언니의 아들

'곽거병'(霍去病)은 하동군 평양현 사람으로 기원전 140년경 중국 전한시대에 태어났다. 곽거병의 아버지는 '곽중유'인데, 그는 평양현에서 하급관리로 있을 때 평양후 저택에서 일을 하던 여종 '위소아'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았고, 이 아이가 바로 곽거병이다. 이후 관리로서 임기를 마친 곽중유는 귀향하였기 때문에, 곽거병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어머니 위소아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이렇게 곽거병은 본래 미천한 신분이었는데, 그의 이모가 되는 여소아의 여동생 '위자부'가 당시 전한의 황제인 '무제'의 후궁으로 들어가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위자부의 외척들은 처음에는 아무런 벼슬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위자부를 따라 궁궐에 들어가서 일하던 '위청'이 효무황후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무제는 총애하는 위자부의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대우해 주었고, 덕분에 곽거병도 미천한 출신이었음에도 생활이 완전히 바뀌어 부유하고 안락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곽중유는 이미 위소아와 헤어져 가족들과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혜를 받지 못하였고, 대신 당시 위소아와 연인 관계에 있던 '진장'이 혜택을 받아 위소아와 곽거병을 보살폈다고 한다.

흉노 토벌

곽거병은 어렸을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고 하며 자신감이 넘치고 오만한 태도를 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사랑받은 것 같고, 18세에는 무제의 총애를 얻어 시중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한편 무제는 기원전 134년경부터 흉노를 토벌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고, 이 과정에서 곽거병의 숙부가 되는 '위청'이 두각을 나타내어 대장군에 임명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위청도 본래 곽거병처럼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누이 위자부의 덕택에 벼슬을 하고 있었으며, 무제가 그에게 공을 세우게 해주려고 했던 원정에서 뜻밖의 큰 공을 세워 계속해서 흉노 정벌에 힘을 쏟고 있었다. 기원전 123년에도 위청이 군대를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는데, 이때 무제는 곽거병에게도 공을 세우게 할 요량으로 표요교위로 임명하고 위청과 동행시켰다. 이 전쟁에서 위청은 1만에 가까운 흉노족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등 전공을 세웠지만, 부하 장수였던 '소건'과 '조신'이 흉노 선우의 본대에게 대패하면서 공을 내세울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때 곽거병만이 공을 인정받았는데, 그는 80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본대를 벗어나 수백리를 진격하면서 2천여 명 이상의 흉노족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그중에는 선우의 큰 아버지뻘이 되는 적약후 '산'과 작은아버지인 '나고비'도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 같은 행위는 군기위반으로 탈영이나 그에 준하는 행위로 처벌받아 마땅한 일이었지만, 무제는 곽거병을 총애하여 죄를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군후로 삼아 큰 상을 내렸다. 이후로도 곽거병은 흉노족과의 사이에서 군공을 쌓은 것 같은데, 기원전 121년에는 21살의 나이로 표기장군에 임명되었다. 표기장군은 대장군 바로 아래의 직책으로 원래 없던 것을 무제가 곽거병을 위해 새로 만든 것인데, 당시 곽거병이 군에 몸을 담은 지 겨우 3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의 군사적 재능이 매우 뛰어났거나, 혹은 무제의 총애가 그만큼 대단하였을 것이다. 곽거병은 1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1천 리 가까이 행군하였으며, 그 사이 흉노족을 격퇴하여 죽거나 사로잡은 무리가 8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또 흉노의 절란왕고 노호왕을 죽였으며, 휴저왕이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쓰던 금인을 탈취하였다고도 한다. 그해 여름에 다시 '공손오'와 함께 흉노 정벌에 나섰는데, 두 사람은 본래 흉노의 땅에서 만나기로 하였지만 공손오의 군대가 지체되어 연락이 끊겼고, 이에 곽거병은 그냥 혼자 흉노족의 땅으로 진격하기로 하였다. 곽거병의 부대는 배를 타고 거연수를 건너 기련산까지 당도하였는데, 여기서 흉노의 추도왕과 2,500여 명의 흉노족을 사로잡았으며, 3만여 명을 넘게 처형하였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원정 동안 흉노의 왕 중 다섯 명과, 그들의 어머니, 선우의 연지, 왕자, 상국과 장군 등 수백 명을 사로잡았다고 하며, 맞붙었던 흉노군의 7할을 분쇄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다. 어찌 되었던 곽거병은 큰 공을 세워 많은 상과 녹봉을 받았고, 반대로 시일 내에 도착하지 못한 공손오는 사형을 받았지만, 막대한 벌금을 내고 간신히 목숨만 건질 수 있었다. 이때 곽거병이 출전하면서 하동군을 지나가게 되어 하동태수가 마중을 나왔는데, 마침 근처에서 관리로 일하고 있던 곽중유를 데려와 곽거병과 만나게 했다고 한다. 사실 곽거병은 자신의 아버지가 곽중유라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으나 따로 그를 찾아가지는 않았었는데, 막상 곽중유와 만나게 되자 절을 하고 무릎을 꿇으며 아버지에 대한 예를 다하였다. 이후 그는 곽중유에게 집과 노비를 사서 주었으며, 원정에서 돌아올 때는 이복동생인 '곽광'을 데려가 돌보았다고 한다. 곽광도 이후 무제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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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북 전투

계속되는 전한과의 싸움으로 피해를 입은 흉노족들은 지형적인 유리함을 이용하기 위해 전한의 국경에서 먼 북쪽에 자리 잡고, 넓은 사막과 초원을 이용하여 전한의 원정군을 소모시키는 전략을 택했다고 한다. 전한에서도 이러한 흉노의 전략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이에 무제는 아예 대군을 편성하여 대대적인 원정을 통해 흉노족을 일거에 정벌할 생각을 하였다. 기원전 119년에 무제는 위청과 곽거병에게 병사를 주어 원정에 나서도록 하였는데, 그 규모가 매우 거대하여 각각 5만의 기병과 수십만으로 이루어진 보병과 보조병을 편성하였으며, '이광'과 '공손하' 같은 흉노족과의 전투경험이 풍부한 무장들을 모두 원정에 참여시켰다. 이때 곽거병은 본래 정양에서 출발하기로 하였는데, 흉노의 선우가 동쪽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군으로 옮겼으며, 정양에서는 위청이 출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정예병인 흉노 선우의 본대는 위청과 만나 싸우게 되었으며, 위청은 흉노의 본대를 패퇴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선우를 사로잡는 데는 실패하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곽거병은 제대로 된 흉노의 군대를 만날 수 없게 되었는데, 그는 그냥 그대로 북쪽으로 계속 진군하였다. 곽거병의 군대는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만나는 흉노족을 모조리 쳐부수었는데, 선우의 측근인 '장거'를 사로잡고 왕호 '비거기'를 처형하였으며, 흉노 좌대장의 군대와 싸워 물리치고 깃발과 북을 노획하는 등 공을 세워, 산과 강을 건너며 흉노의 왕 3명을 죽이고, 장군과 상국, 당호, 도위 등 80여 명을 살해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죽이고 사로잡은 흉노족이 무려 75,000여 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포로들을 관리하는 일만 해도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곽거병의 부대는 바이칼호 부근까지 계속 북상하며 원정을 이어갔고, 출진하던 초기에 물자들을 행군하는데 방해된다고 버려 버렸기 때문에, 흉노족의 식량을 약탈하여 보급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곽거병은 이 원정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전한은 원정에 동원한 14만필에 달하는 말 중에 겨우 3만 필만 귀환하는 등 크게 소모하였기 때문에, 이후 한동안 흉노에 대한 원정을 멈추게 된다. 여담이지만 이 원정에서도 위청은 선우를 놓쳤다는 이유로 아무런 상을 받지 못하였지만, 무제는 대사마라는 직위를 새로 만들어 대장군과 표기장군을 모두 대사마로 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곽거병은 승진한 격이 되었으며 녹봉 또한 올라 대장군과 같게 받게 되었다.

젊은 영웅의 최후

위청은 어린 시절 노비와 같은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높은 관직을 받아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음에도 항상 솔선수범하며 병사들과 같이 생활하였다고 한다. 반대로 곽거병은 어렸을 때부터 높은 신분에서 부유한 생활을 누렸는데, 이 때문에 매우 오만한 성격이었으며, 병사들이 굶는 와중에서 자신은 막사에서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러나 병사들과 주변 사람들의 평가는 정반대였는데, 그들은 위청이 높은 사람의 눈치만 본다며 싫어하였고, 곽거병은 오히려 패기가 있다며 좋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차이는 '이감'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이감은 이광의 아들로 이광은 막북 전투에서 위청 휘하에서 종군하였으나, 무제는 위청에서 이광이 운수가 사나우니 전투를 벌이기 전에 그를 배제하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위청은 이 말에 따라 이광을 멀리 돌아가게 보내었고, 결과적으로 공을 세우지 못한 이광은 이 때문에 질책을 듣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게 되었다. 이때 이광의 아들 이감은 곽거병의 휘하에서 원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는데,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이감은 위청이 대장군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만나 폭행하기에 이르렀다. 위청은 신중한 사람으로 자초지종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감의 죄를 덮어두려고 하였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곽거병은 사냥터에서 이감을 활로 쏴 죽여버렸다. 이는 곽거병의 원한도 아닌데, 사사로이 황제가 있는 사냥터에서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무제는 총애하는 곽거병을 감싸주기 위해 이감이 사슴뿔에 받혀 죽었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결국 위청은 곽거병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승승장구하였지만, 곽거병이 나타난 이후에는 퇴물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큰 권세를 가지고 있던 곽거병은 기원전 117년에 2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무제는 곽거병을 애도하여 무릉에 기련산을 본뜬 무덤을 만들어주었으며, 그에게 경환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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