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마지막 왕, 장작 위에서 잠을 잔 「부차」
- 역사
- 2023. 9. 12.
와신
'부차'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오나라의 왕 '합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기원전 496년에 합려는 월나라를 쳐들어갔다가 싸움의 도중에 부상을 입어 그대로 사망하였고, 태자인 '희파'는 아내와 함께 요절하였는데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차남인 부차가 재상인 '오자서'의 지지를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오나라의 왕이 된 부차는 이듬해인 기원전 495년에 대부 '백비'를 태재로 세워 오나라를 다시 부흥시킬 수 있도록 하고, 병사들에게 활쏘기를 익히게 하는 등 훈련시켜 월나라에 복수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또 본인은 매일 밤 가시가 많은 장작 위에서 자며 방 앞에 사람을 세워두어, 자신이 지날 때마다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라고 외치게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부차는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원한을 되새겼고, 이러한 그의 행동이 후에 고사 '와신상담'의 '와신'부분이 되었다.
월나라 정벌
기원전 494년 월나라의 왕 '구천'은 이러한 부차의 소식을 듣고는 오나라를 선제공격 하기로 마음먹었고, 측근 '범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행해 옮겼다 대패하게 된다. 이전의 구천은 월나라 군대를 이끌고 최전성기의 오나라 왕 합려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기도 하였지만, 이는 범려의 기책에 의지한 결과로, 실상 당시 오나라 군대는 왕인 합려가 부상을 당하여 물러났으며, 그 후 합려가 사망하면서 공격을 멈춘 것에 불과하였다. 이 시기 오나라와 월나라의 국력차이는 매우 커서 이를 뒤집기는 어려웠고, 결국 월나라의 수도가 오나라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으며, 구천은 회계산으로 도망쳐 농성하였다. 이로서 부차는 복수의 달성을 눈앞에 두게 되었지만, 이후 구천이 월나라를 오나라에 바치고 스스로 신하와 노비가 되겠다고 청하자 그대로 용서해 주게 된다. 사실 이는 구천의 측근인 범려와 '문종'이 백비 등을 뇌물로 회유하여 항복을 받아주도록 유도한 것도 컸지만, 그만큼 부차가 구천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서 복수심이 옅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용서는 후에 부차에게 커다란 재앙으로 다가오게 된다.
나라를 기울게 만드는 미모
부차는 성공적으로 월나라를 정벌하여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구천을 오나라로 끌고 와 자신의 노비로 삼았다. 이에 대해서는 구천이 아니라 범려가 대신 오나라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구천은 목숨을 부지하고 월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부차에게 아부를 하며 마부 노릇을 하는 등 치욕을 당하였으며, 범려와 문종은 본국에서 월나라의 병사들을 보내 오나라의 전쟁을 돕게 하거나 재물을 모아 뇌물을 보내는 등 백방으로 노력하였고, 결과적으로 구천은 2년여 만에 풀려나 월나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기원전 487년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자신의 방 천장에 곰쓸개를 매달아 놓고, 매일 쓸개를 핥아 쓴맛을 느끼며 복수를 다짐하였다. 구천은 월나라를 부흥시키면서 오나라를 쇠퇴시킬 방법을 강구하였는데, 범려는 부차가 여색을 좋아하는 것을 이용하여 미녀를 보내 타락시키기는 방법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때 월나라에서 보낸 미녀 중에는 '시이광'과 '정단'이 있는데, 그중 시이광이 중국의 '경국지색'으로 유명한 '서시'이다. 구천의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어 부차는 완전히 방심을 하였고, 이 때문에 월나라를 경계해야 된다는 오자서와는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춘추오패
당시 오나라는 합려가 서쪽의 초나라를 정벌하였으며, 부차는 남쪽의 월나라를 완전히 복속시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패자가 되기 위해 북쪽을 공략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부차는 기원전 489년에 제나라의 '경공'이 사망하자 이 틈을 노려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였는데, 오자서는 이에 반대하여 간언 하였다고 한다. 그는 구천이 음식의 맛을 보지 않고 옷의 화려함을 신경 쓰지 않으며, 죽은 자를 위문하고 병든 자를 위로한다고 이야기하였는데, 이는 일신의 안위보다 명분을 중요시한다는 것으로 장차 그가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부차는 오자서의 간언을 무시하고 그대로 제나라를 공격하였으며, '애릉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노나라의 '애공'에게 제사용 가축을 무리하게 요구하는 등 야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이때 노나라에서는 '공자'의 제자인 '자공'을 보내 오나라를 설득해 요구를 철회하게 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487년에 부차는 노나라를 공격하였다가 화친하였고, 이듬해인 기원전 486년에는 오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제나라를 공격하는 등 부차는 오나라의 힘을 북쪽이 제후국들에게 과시하였다. 기원전 485년에는 구천이 다시 뇌물을 보냈는데, 오자서가 다시 월나라를 경계해야 한다고 간언 하자, 부차는 그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버렸다. 제나라에 간 오자서는 오나라의 끝을 예감하고 자신의 아들을 제나라의 대부에게 맡기고 돌아왔는데, 이를 알게 된 부차는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하였으며, 그 시체를 자루에 담아 장강에 던져버리게 하였다. 결국 오나라에는 더 이상 부차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이 남지 않게 되었고, 기원전 483년에 부차는 노나라와 위나라의 군주를 불러 회맹을 하는 등 공식적인 패자가 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기원전 482년 부차는 이번에는 3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여러 제후들을 불러 회맹 하였는데, 이틈을 노린 구천이 월나라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에 침공하여 태자 '희우'를 포로로 잡는 일이 벌어졌다. 이 소식은 부차에게도 전해졌는데, 부차는 패자가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 오히려 월나라에 패한 사실이 다른 제후국에 알려지지 않도록, 이를 발설하는 사람들을 죽여 입을 막았다고 한다. 이때 부차는 진나라의 '정공'과 패자의 자리를 두고 다투었는데, 그는 군대를 이용해 진나라를 압박하였으며, 패자가 되기 위해 왕의 칭호를 버리고 '오공'이 되라고 하자 이를 승낙했다고 한다. 이로서 부차는 형식적으로는 패자가 되기는 하였지만 이는 허울뿐인 것으로, 그나마도 부차는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오나라의 멸망
부차가 패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북쪽에서 국력을 소진하는 동안 월나라는 착실하게 내실을 다졌고, 결국 오나라는 월나라에 밀리는 처지가 되었다. 오나라는 기원전 478년과 476년에 월나라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으며, 기원전 475년에는 월나라 군대에게 수도를 포위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기원전 473년에 오나라는 월나라에 의해 멸망한 처지가 되었는데, 이때 부차는 과거에 자신이 항복을 받아주어 구천의 목숨과 월나라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한 예를 들면 자비를 청했다. 승리한 구천은 과거의 부차처럼 마음이 흔들렸는데, 범려가 나서서 쓸개를 핥던 일을 잊었냐고 경고하였다고 한다. 이에 구천은 부차에게 살려줄 테니 100호의 장으로 살라고 모욕하였고, 결국 부차는 저승에서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며 얼굴을 가리고 자결하였다. 부차는 아버지 합려가 이루지 못한, 오나라가 중원의 패자가 된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명재상 '오자서'와 나라를 내팽개쳤고, 결국 이름뿐인 패자가 되었으며, 그나마도 얼마 안 있어 오나라가 멸망하게 되면서 흐지부지 되게 된다. 일부 사람들은 부차의 실력을 들어 그를 춘추오패 중 한 사람으로 인정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을 거론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