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춘추오패 중 한 사람, 초나라의 장왕 「미려」
- 역사
- 2023. 9. 3.
불비불명
'장왕'의 이름은 '미려'인데 중국 춘추전국시대 사람으로 초나라의 '목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전해지지 않으나 기원전 614년 목왕이 사망하였을때, 어린나이로 후계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당시 초나라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는데, 장왕이 즉위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홍수와 냉해로 인한 기근이 발생하는 등 민심이 흉흉해졌고,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재상과 측근들이 궁궐을 비운 사이에 귀족인 '투극'이 왕자 '미섭'을 내세워 수도를 장악한 다음, 다른 신하들의 반발에 대비하기 위해 어린 장왕을 납치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상밀로 도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중에 다른 신하들에 의해 투극이 살해되고 장왕이 풀려나면서 결과적으로 반란은 진압될 수 있었지만, 이후 장왕은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매일 사냥과 주연을 즐기며 간언하는 자는 누구든 용서치 않겠다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장왕이 장장 3년여간 국정을 내팽개치고 유흥을 즐겼기 때문에, 조정에는 간신이 들끓었고, 국력은 나날이 쇠락해갔다고 한다. 기원전 611년에 이러한 장왕의 방탕한 생활을 보다못한 '오거'가 목숨을 걸고 간언하였는데, 이때 오거는 장왕에게 언덕에 앉아 3년간 날지도 울지도 않는 새가 어떤 새인지 물었다고 한다. 이에 장왕은 새가 3년간이나 날지 않았기 때문에 날기 시작하면 하늘을 찌를 것이고, 3년간 울지 않았기 때문에 울기 시작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답했다. 또 몇달이 지나 오거의 친구인 '소종'이 찾아와 장왕에게 목숨을 걸고 간언을 하자, 그제서야 장왕은 술상을 치우고 소종과 함께 국정을 논했다고 한다. 이윽고 장왕은 그동안 조정을 가득 매운 간신들을 모두 숙청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았으며, 오거와 소종을 중용하여 새로 인재들을 뽑아 체워넣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때 오거는 '오자서'의 아버지로 추정되기도 하는데, 그가 살았던 시대와 차이가 있어 동명이인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또 오거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오삼이라고 하는 기록도 있으며, 애초에 사서마다 이름이 달라 실제 어떤 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주나라와 대결
본격적으로 국정을 시작한 장왕의 기세는 노도와 같았는데, 기원전 611년에는 용나라를 공격하여 정벌하였고, 기원전 608년에는 송나라를 공격하여 전차 200승을 빼앗았다고 한다. 기원전 606년에는 융을 정벌하고, 낙하(뤄허강)에 이르러 주나라의 국경 부근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는데, 이는 주나라에 대한 군사적 시위나 다름 없는 행위였다. 춘추전국시대에 중원의 지배자는 주나라의 왕으로 제후국의 군주들은 어디까지나 주나라의 신하를 자처하였고, 이에 주나라의 왕 이외에는 모두 '공'이라는 호칭까지 밖에 사용하지 못했으나, 초나라는 주나라의 신하로 시작한 나라도 아니었을 뿐더러, 한족의 나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스스로 왕을 자처하고 주나라와 대결하였다. 이 때문에 이 시기까지 천하의 패자는 어디까지나 주나라의 신하로서 내부 제후들간의 사이를 조정하고, 외부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주나라 왕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위치에 머물러있었으며, 초나라는 외부 이민족의 위치로 주나라와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모양세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장왕의 시기에 와서 드디어 초나라가 직접 주나라와 대결할 수 있는 위치에 다다를 수 있었고, 이에 주나라에서는 왕족인 '희만'을 사신으로 보내 장왕과 회담하도록 하였다. 이때 장왕은 '구정'의 무게가 얼마나 나가냐고 물었는데, 희만은 중요한 것은 덕으로 솥은 중요치 않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구정은 본래 하나라 때 만들어진 물건으로 중원을 차지한 한족 국가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는데, 장왕이 이에 대해 물었다는 것은 언제든지 주나라의 왕권에 도전할 수 있다는 뜻을 암시한 것이기도 했다. 장왕은 또 구정은 초나라의 창끝만 부러트려도 만들 수 있다며, 명분이 아니라 힘으로도 중원을 정복할 수 있다는 뜻을 나타내었는데, 여기에 희만은 구정이 하나라에서 상나라(은나라), 그리고 주나라로 옮겨 간 것을 이야기하여, 중원을 온전히 정복하기 위해서는 피지배자들의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결국 장왕은 희만의 이야기를 인정하고 물러났는데, 이때부터 초나라는 주나라의 외적으로서 주나라를 정복하는 목표를 버리고, 주나라의 제후국들과 같이 주나라 안에서 명분을 얻어 중원을 손에 넣기로 목표를 수정한 것 같다. 만약 이때 초나라가 그대로 공격했다면 주나라를 정복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초나라는 일시에 여러 제후국들의 공격을 견뎌내야 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중원은 여러 개별 국가로 완전히 쪼개져나갔을 지도 모른다.
백발백중
기원전 605년에 장왕은 '투월초'를 재상으로 임명하였는데, 어떤 이가 그를 모함하자 투월초는 죽음이 두려워 먼저 나서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투월초는 활 솜씨로 유명하였는데, 그는 반란을 진압하러 온 장왕에게 활을 쏘아 두 번이나 위태로운 지경을 만들었고, 이 일로 군사들 사이에서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고 한다. 이에 장왕은 초나라에 내려오는 보물 화살이 3개가 있는데, 그 중에 두 개를 투월초가 훔쳐간 것이라며, 이제 모두 사용하였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없다고 병사들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그리고나서 장왕은 갖은 수단을 써서 투월초가 화살을 쏘지 못하게 막으며 반란을 진압하였다고 한다. 이 투월초를 쓰러트린 것은 그와 같이 활의 명수로 유명한 '양유기'인데, 양유기는 투월초와 강을 사이에 두고 활 대결을 펼쳤다. 두 사람은 서로 세 발씩 활을 쏘기로 하였는데, 먼저 투월초가 화살 세 발을 쏘자 양유기는 첫 발은 활대로 쳐내고, 두번째 화살은 몸을 비틀어 피했으며, 세번째 화살은 이로 물어서 막았다고 한다. 이어서 양유기의 차례가 되었는데, 양유기는 먼저 빈 활을 울려서 투월초를 기만하였고, 소리만 듣고 화살이 날아오는지 알고 몸을 피한 투월초를 쏘아 맞추어 단 한발로 숨통을 끊었다고 한다. 양유기는 활솜씨 하나로 잡병에서 대부가 되었으며, 백보 밖에서 버들잎을 맞출 정도의 그의 활솜씨를 보고 '백발백중'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고 한다. 이후 장왕은 기원전 601년에 서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진나라의 하희
진(陳)나라의 '하어숙'은 정나라 출신의 '하희'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미인으로 매우 유명하였다고 한다. 이윽고 하어숙이 죽자 하희는 진나라의 여러 사람들과 바람을 피웠는데, 그 중에는 진(陳)나라의 군주인 '영공'도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598년 영공은 하희와 관계를 가진 신하들과 하희에 대한 음담패설을 하였는데, 이를 듣다못한 하희의 아들 '하징서'가 영공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 일로 영공의 태자인 '규오'는 진(晉)나라로 달아났다고 한다. 장왕은 이를 구실로 진(陳)나라로 쳐들어갔으며, 하징서를 죽이고 하희를 생포해 초나라로 돌아왔다. 이때 장왕은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초나라의 영토로 삼으려고 하였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진(晉)나라에서 규오를 데려와 나라를 돌려주었다고 한다. 초나라로 돌아온 장왕은 처음에는 하희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신하 중 '굴무'라는 자가 하희는 남자를 망치는 미녀라며 이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결국 장왕은 얼마전 아내를 잃은지 신하에게 하희를 주었고, 이후 그 신하도 죽자 하희를 다시 고향인 정나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그 15년 후에 제나라로 사신을 보낼 일이 생기자 굴무가 자청해서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 굴무는 초나라의 재상과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굴무는 제나라로 가던 도중에 정나라에서 하희를 데리고 진(晉)나라로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이에 대노한 장왕은 굴무의 아들을 처형하고, 그 재산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적반하장으로 굴무가 대노하였다고 한다. 굴무는 진(晉)나라의 군주에게 자신을 오나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면서, 오나라를 크게 키워 초나라의 근심거리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굴무의 공이 얼마나 되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이후 오나라는 크게 성장하여 오왕 '합려' 시절에는 '오자서'와 '손무'의 활약으로 초나라의 수도를 함락시키기도 하였다.
절영지연
한번은 장왕이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여러 신하들을 불러 야심한 밤에 연회를 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취하고 즐기는 가운데 갑자기 강한 바람이 풀어 촛불이 모두 꺼져버렸다고 한다. 이때 누군가가 장왕의 애첩을 껴안고 희롱하였는데, 애첩은 비명을 지르고 장왕에게 다가가 이를 일렀다고 한다. 애첩은 장왕에게 그의 갓끈을 뜯어 표시를 해 놓았으니 불을 켜면 알 수 있다고 이야기 하였는데, 이를 들은 장왕은 불을 켜지 못하게 하고 모든 신하들에게 갓끈을 풀게하여 그를 보호해주었다. 그 몇년 후 초나라가 진(秦)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도중에 초나라의 형세가 불리하여 장왕의 목숨도 위태로운 지경에 쳐했는데, 이때 한 장수가 목숨을 걸고 싸워 피투성이가 되어 장왕을 구했다. 장왕은 이 장수에게 고마워하면서도 의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장수에게 그를 중용하지도 않았는데 왜 목숨을 걸고 분전하여 자신을 구했는지 물었다. 이에 장수는 지난 연회에서 불경을 저지른 것이 자신이며, 자신을 감싸준 장왕에게 은혜를 갚은 것이라고 말하고 사망하였다고 한다. 혹은 죽지는 않았지만 이후 낙향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듯 장왕은 신하의 사소한 실수를 너그럽게 감싸주었고, 이에 여러 신하들이 장왕을 위해 힘썼다는 것이다.
춘추오패
장왕은 하희의 일로 진(陳)나라를 영향력 안에 두었고, 이후 기원전 597년 정나라를 공격하여 세 달만에 함락시켜 속국으로 삼았다. 이때 진(晉)나라에서 정나라를 도우려 원군을 보냈는데, 장왕은 '필 전투'에서 이를 쳐부수고 대승하였다. 이전의 패자였던 진(晉)나라를 깨뜨린 장왕은 이로서 중원의 패자로서 자리메김한게 된다. 사실 초나라는 이전까지는 패자들이 막아야 할 이민족으로 취급되었는데, 초나라가 주나라의 조정을 인정하고, 그 질서아래에서 패권에 대한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패자의 정의가 변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는 이후 패자의 자리를 노리게 되는 오나라나 월나라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후 장왕은 패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노나라를 영향력 아래 두었고, 제나라로 보낸 사신이 송나라에서 살해당한 것을 빌미로 송나라로 쳐들어가서 수도 '상구'를 포위했다. 그러나 송나라의 극렬한 저항으로 기원전 594년까지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그대로 철수하였다고 한다. 결국 송나라는 초나라에 항복하게 되지만, 기원전 591년에 장왕이 사망하였다. 그후로 초나라는 중원 남방을 장악한 강대국으로 약 70년 후인 기원전 518년 '평왕' 때 오나라에게 패해 쇠락하기 전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