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전국사군의 한 사람 조나라의 평원군 「조승」
- 역사
- 2023. 9. 9.
조나라의 평원군
'평원군'의 이름은 '조승'으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후반인 전국시대에 조나라의 '무령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령왕은 조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로 북방 유목민의 옷을 뜻하는 '호복'을 받아들여 중원에 바지를 보급하는 등 당시에는 상당히 파격적인 인물이었는데, 생전에 총애하는 후궁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혜문왕'으로 세운 뒤 자신은 '주부'라는 직위를 새로 만들어 그 자리에 올라 사실상 상왕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래 놓고는 막상 장자였던 '조장'에게도 나라를 물려주려고 한 것 같은데, 그는 조나라를 둘로 나눠 혜문왕과 조장에게 각각 물려주려고 하였고, 이 일로 아들 중에 가장 똑똑한 평원군을 불러 의견을 물어봤다고 한다. 이에 평원군은 진(晉)나라가 둘로 나뉘어 '곡옥대진'이 일어난 일이나, 정나라의 장공이 동생을 죽이게 된 일을 빗대어 반대하였는데, 조장이 이러한 낌세를 눈치채고 반란을 일으켜 결국 조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내란은 혜문왕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지만, 무령왕은 그 와중에 유폐된 상태로 방치되어 굶어 죽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후 평원군은 혜문왕을 지지한 공으로 평원 땅을 영지로 받아 군에 봉해졌다. 새로 영지를 받은 평원군은 이를 이용해 식객을 모으는데 더 힘을 쏟았는데, 일설에 의하면 평원군의 식객은 3,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장평 대전
평원군도 다른 전국사군들처럼 많은 식객을 데리고 있었고, 이들에게 여러 도움을 받기도 하였는데, 한 번은 평원군의 첩이 식객 중 한 명이 다리를 저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이 식객은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였으며 매우 분노하였는데, 그는 평원군에게 가서 그 첩을 죽여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평원군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평원군은 웃으면서 건성으로 그러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도 평원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실망한 식객들이 하나둘씩 그의 슬하에서 떠나기 시작하였고, 그제야 심각성을 느낀 평원군이 결국 첩을 죽여 식객들을 붙잡았다고 한다. 이 일로 평원군의 명성이 널리 퍼졌는데, 이때 진나라의 '소양왕'도 이 소문을 듣고 평원군을 초청하려 하였는데, 주변에서 제나라의 '맹상군'이 더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하자, 대신 맹상군을 진나라로 불러들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조나라에는 제나라에 맹상군이 있다면 조나라에는 평원군이 있다는 노래가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기원전 266년에는 위나라의 재상인 '위제'가 진나라의 재상 '범수'에게 원한을 받아 조나라로 도망쳐왔는데, 평원군은 그를 식객으로 받아들여 보호해 주었다. 이에 소양왕이 범수를 위해 평원군을 진나라로 초청하고는 위제를 죽이지 않으면 돌려보내주지 않겠다고 하며 그를 구금하였다. 이때 평원군은 이를 거절하여 식객들과의 신의를 지켰지만, 조나라의 '효성왕'이 위제를 잡기 위해 병사들을 보냈기 때문에, 위제는 조나라의 재상인 '우경'과 함께 위나라의 '신릉군'에게 의탁하기 위해 다시 위나라로 돌아갔으나, 신릉군이 만나기를 꺼려하자 결국 위제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어찌 되었건 위제가 죽었기 때문에 소양왕은 평원군을 풀어주었고, 그는 다시 조나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이처럼 당시 진나라의 위세는 대단하였는데, 진나라는 주변국인 위나라와 한나라를 적극적으로 공략하였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던 조나라 정도가 진나라와 대치할 수 있었다. 기원전 263년에는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빼앗았고, 이 때문에 한나라의 북쪽 영토였던 상당군이 고립되어 가까운 조나라에 귀순하기를 청했다고 한다. 이는 한나라뿐만 아니라 진나라와도 관계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효성왕은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어보았는데, '평양군'은 진나라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이를 거부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평원군은 나라에 큰 이득이 될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상당군은 조나라의 영토로 편입되었지만, 이는 진나라와의 사이에서 큰 불화로 돌아오게 되었고, 결국 기원전 260년에 진나라와 조나라는 전쟁을 벌이게 된다. '장평 대전'에서 초기에 명장인 '염파'의 활약으로 조나라가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효성왕은 도중에 '조괄'로 지휘관을 교체하였고, 이후 조나라는 대패하여 조괄은 전사하고 40만에 가까운 병사들이 진나라에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진나라는 이러한 대규모의 포로를 관리할 역량이 없었고, 그렇다고 돌려보낼 수도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모두 생매장시켜 버렸다고 한다. 조나라는 이 패배로 수많은 병사와 동시에 수많은 노동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낭중지추
기원전 259년 진나라의 군대는 승기를 잡아 조나라로 진군하여 수도 '한단'을 포위하였고, 이에 평원군은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초나라로 떠나기로 했다. 이때 평원군은 자신과 같이 갈 20명의 사람을 뽑았는데, 문무 양쪽 모두 뛰어난 사람으로 하려고 하다 보니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고, 이에 오랫동안 평원군의 식객으로 있던 '모수'라는 자가 나서서 함께 가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평원군은 모수에게 훌륭한 선비는 송곳과 같아 주머니 속에 있어도 그 끝이 드러난다고 하며 거절하려고 하였지만, 모수는 자신은 끝이 아니라 손잡이도 튀어나올 것이라며 아직 주머니 속에 넣은 적이 없으니 이참에 주머니에 넣으라고 설득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낭중지추'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또 모수가 자신을 스스로 추천한 것을 들어 '모수자천'이라는 말도 나왔다. 평원군은 초나라의 고열왕을 만나 '순망치한'을 이야기하며 설득하였지만 긍정적인 대답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모수가 나서서 칼을 꺼내 쥐고 진나라가 초나라를 침공하여 수도를 불태우고 선조들을 욕보인 것을 거론하여 초나라의 도움을 받아낼 수 있었고, 초나라의 도움을 얻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모수는 귀국한 후에 평원군에게 상객으로 대접받았다고 한다.
평원군의 한계
한편 위나라도 조나라에 원군을 보냈는데, 위나라의 군대는 국경지대에 멈춰 서서 정세를 관망하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도우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평원군은 신릉군에게 도움을 구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평원군이 신릉군의 누이와 결혼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매우 돈독한 관계였다. 그러나 신릉군은 위나라의 '안희왕'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하였는데, 대신 병부를 훔쳐 군사 지휘권을 탈취하고, 그걸로도 모자라 위나라의 지휘관까지 죽여서야 군대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사이 평원군은 다시 한단으로 돌아왔는데, 당시 한단은 이미 진나라에 포위된 지 오래되어 무기라고는 나무를 깎아 만든 창 밖에 없었고, 성안의 백성들도 아사직전의 상태로 자식을 서로 바꾸어 잡아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나라의 귀족들은 변함없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는데, 이를 보다 못한 '이담'이라는 병사가 평원군을 찾아와 성이 무너지면 모두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니 가진 재산을 모두 내놓아 사람들을 독려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이에 평원군은 순순히 재산을 내놓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덕분에 모처럼 성 안에 활기가 돌고 사람들 사이에 사기가 올랐다고 한다. 이담은 다시 평원군을 찾아와 자신이 특공대를 모아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겠다고 제안하였고, 평원군이 이를 수락하여 이담은 3,000명의 병사를 모집하여 성을 나가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의 공격에 진나라 군대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마침 도착한 지원군 덕분에 조나라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평원군은 그 공을 치하하기 위해 이담을 찾았지만, 그는 이미 전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신 그의 아버지를 불러 '이후'에 봉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때의 위기를 벗어난 것뿐으로 결국 조나라는 다시 융성하지 못하고, 후에 진나라에 함락되어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게 된다. 어찌 되었든 진나라의 군대가 물러간 후에도 신릉군은 위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한동안 조나라에 있었는데, 그는 어느 날 노름꾼과 간장을 빚는 사람을 불러 놓고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고 한다. 평원군이 이 모습을 보고 신릉군에게 천한 사람들과 교류한다고 면박을 주었는데, 이에 신릉군은 현명하다고 불리는 사람들과 만남을 가졌는데 신분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며 화를 내고 떠나려고 하였다고 한다. 평원군은 다급히 신릉군을 만류하여 붙잡을 수 있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식객들이 평원군을 떠나 신릉군에게 가담하여, 평원군의 식객은 절반이나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후 기원전 251년에 평원군이 사망하였고, 그 후계는 자식들이 이어받았다. 하지만 조나라가 진나라에게 멸망할 때 대가 끊기게 되어 평원군의 후손이 남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