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시대 토이토브루크 숲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아르미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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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

체루스키 부족 출신의 게르만족

'아르미니우스'는 기원전 18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게르만족의 하나인 '체루스키 부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을 로마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기원전 11년경부터 있었던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大드루수스)의 '게르마니아' 원정 때 그의 동생 '플라부스'와 함께 인질로 로마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후 두 형제는 로마에서 교육받으며 자랐는데, 젊었을 때부터 로마 군에 입대하여 보조병으로 근무하였고, 4년경에는 로마 보조병 부대의 지휘를 맡을 정도로 승진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판노니아' 지역에서 근무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군 경력 덕분에 로마 시민권도 획득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소위 기사계급(에퀴테스)라고 불리는 위치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아르미니우스는 다시 게르마니아로 돌아가 체루스키 부족의 부족장이 된 것 같다. 그가 로마를 떠나 게르마니아로 돌아간 이유가 체루스키 부족의 부족장이 되어야 하는 의무 때문인지, 아니면 로마 제국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 행적을 보면 후자의 영향도 없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동생 플라부스는 계속 로마에 남아 군생활을 이어갔다.

로마 제국과 게르만족

이 시기 로마 제국은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닿았으며, 동쪽으로는 아나톨리아 반도와 시리아 지역까지 영향력 아래 두었으며, 북으로는 잉글랜드까지 진출하였고, 남으로는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에 이르러, 지중해를 '우리 바다'(Mare Nostrum)라고 부르며 내해 취급하기도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였다. 이러한 로마 제국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역을 정복하면서 본격적으로 게르만족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는데, 소위 게르마니아라고 불리는 게르만족이 사는 라인강 일대 지역이 로마 제국의 다음 목표가 되고 있었고, 당시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등을 보내 착실하게 이 지역을 공략하였다. 6년에 아우구스투스는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를 게르마니아 지역의 새 총독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그가 시리아 총독 시절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유대인들의 반란을 잘 진압한 경력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는 잘못된 인선이었는데, 바루스는 게르만족에 대해서 잘 몰랐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알려고 하지도 않은 것 같으며, 대화와 법을 내세우며 북아프리카와 시리아 총독 시절의 방식대로 통제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당시 게르만족은 문명화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을 매우 중요시 여겼고, 또 바루스가 세금을 금과 귀금속으로 바칠 것을 강요하였는데, 이것도 게르마니아 현지 실정에 맞지 않는 방식이었다. 결국 바루스는 게르만족들이 반항한다고 여겨 시리아에서처럼 이를 가혹한 방식으로 진압하려고 했고, 게르만족들은 로마 제국이 자신들을 억압하고 괴롭힌다고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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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9년에 게르마니아에는 3개의 군단만이 남아있었는데, 나머지 군단들은 모두 '일리리쿰'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이때 바루스는 이 군단들을 이끌고 겨울을 나기 위한 본부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인근에서 게르만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반란 소식은 사실 아르미니우스가 꾸며낸 것이었는데, 그는 체루스키 부족장으로 바루스와 게르만족 사이를 주선하면서 바루스의 신뢰를 얻으며, 동시에 뒤에서는 체루스키, '마르시', '차티', '베룩테리', '차우키', '시캄브리' 등의 게르만족들과 손잡고 로마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현지인 조력자로 길 안내를 자청한 아르미니우스는 로마 군단을 미리 준비한 대로 '토이토부르크' 숲으로 데려왔고, 반란을 일으킨 게르만족들을 유인해 오겠다면서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이후 아르미니우스는 게르만족들을 이끌고 습격을 시작하였다. 로마 군단은 게르만족의 첫 습격을 버텨내고 임시 숙영지를 구축하는 등 첫날을 버텨내었지만, 인근지리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포위망을 빠져나가고도 숲을 벗어나지 못했다. 로마 군단은 전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밤새도록 헤매었지만, 결국 아르미니우스가 파 놓은 함정에 걸려 다시 포위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군단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바루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후 아르미니우스의 게르만 군대는 게르마니아 지역의 모든 로마군 요새와 주둔지, 도시를 공격하였고, 이로 인해 20여 년에 걸쳐 개척한 게르마니아의 영토를 모두 잃게 되었으며, 로마 제국은 증원군을 보내 간신히 이들의 갈리아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게르마니아 포기

아르미니우스는 이 승리를 계기로 게르만족의 거대 부족 중 하나였던 '마르코만니족'의 왕과 접촉하였지만 협력을 얻지 못하였고, 소규모 부족들의 연합에 불과했던 아르미니우스의 세력은 로마 제국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지는 못했다. 10년경부터는 티베리우스가 라인강을 건너 다시 게르마니아 지역에 진출하였는데, 그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매우 신중하게 움직였으며, 게르마니아 지역을 직접적으로 장악하는 것보다는 친로마 성향의 부족들을 로마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분열책을 폈다고 한다.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고 티베리우스가 새 황제로 즉위한 이후로는 게르마니아 지역의 로마 군단은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지휘하였다.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좀 더 공세적인 움직임을 취했는데, 그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전장을 찾아서 유해를 수습하고 추모비를 세우는 등의 행동을 했다고 한다. 다시 시작된 아르미니우스와 로마 군단의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하였고, 16년 '베저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을 때는 로마 군단에 속해있던 동생 플라부스가 강 너머로 아르미니우스에게 투항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고 한다. 로마 군단은 아르미니우스를 상대로 '이디스다비소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전과를 올렸지만, 로마 군단의 피해도 적지 않았고, 결국 로마 제국은 게르마니아 지역의 속주화를 포기하고 대신 라인강 전선을 강화하여 국경으로 삼게 된다. 이후에도 아르미니우스는 게르만족의 통합을 계속 이어가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는 자신의 세력을 모아 마르코만니족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르코만니족을 완전히 제압하는데 실패하였고, 도중에 부족 내에 자신의 반대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한다. 아르미니우스의 아내 '투스넬다'는 15년에 포로로 잡혀 로마로 이송되었는데, 그녀는 로마에서 진행된 게르마니쿠스의 개선식에 전리품으로 전시되었고,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는 알 수 없다고 한다. 한 가지 알려진 점은 투스넬다가 포로로 잡혔을 때는 이미 아르미니우스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아르미니우스의 아들 '투멜리쿠스'는 라베나에서 성장했다는 이야기만 남아있다.

독일 민족주의의 상징

그러나 아르미니우스는 시간을 뛰어넘어 19세기 초반에 독일에서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났다. 당시 독일은 '나폴레옹 전쟁' 겪으면서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해졌고, 1808년에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아르미니우스를 주인공으로 한 '헤르만 전쟁'(Die Hermannschlacht)를 발표하여 반나폴레옹 감정을 고양시켰다. 이는 아르미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게르만 정복을 저지하여, 결과적으로 게르만의 민족성이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견해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아르미니우스가 라틴어로 '아르민'이라고 줄여서 불린 것에 대한 해석으로 게르만어에 위대하다는 뜻을 가진 '이르민'(Irmin)이나, 전사라는 뜻의 '헤르만'(Hermann)이 본래 이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839년에는 토이토부르크 숲의 한 언덕에 아르미니우스의 거대한 동상을 건설하기도 하였으며, 1870년 프로이센이 '보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기공식을 갖기도 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아르미니우스는 나치 독일 시절에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선전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여담이지만 아르미니우스는 한때 프랑스에서도 인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프랑스 혁명 후의 프랑스인들이 '부르봉 왕조'를 로마 제국의 후예로 생각했기 때문에, 로마의 진격을 저지한 아르미니우스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가졌고, 이를 바탕으로 아르미니우스를 소재로 한 연극 등이 다수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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