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영국 플랜태저넷 왕가의 시작 「헨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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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무정부시대를 지낸 잉글랜드의 후계자

'헨리 2세'는 1133년경 앙주의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과 잉글랜드의 왕이자 노르망디의 공작인 '헨리 1세'의 딸 '마틸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틸다는 헨리 1세의 공식 후계자였기 때문에, 순조롭게 간다면 헨리 2세가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상속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헨리 2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1135년, 노르망디의 반란 진압 직후에 헨리 1세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상황이 어그러지게 되었다. 마틸다 부부는 헨리 1세 생전에 노르망디 공작위를 승계하기를 원하였지만 거절되었고, 이 때문에 노르망디의 반란군 편을 들고 있었다. 게다가 헨리 1세의 공식 후계자인 마틸다가 여자였고, 어린 시절에 전남편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 이렇다 할 지지세력도 없었다. 결국 헨리 1세 사후에 마틸다는 잉글랜드의 왕위도 노르망디의 공작위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승계할 수 없었고, 그 틈을 타 헨리 1세의 조카인 블루아의 '스티븐'이 잉글랜드의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후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는 사실상의 내전상태로 마틸다 부부는 앙주를 기점으로 남부 노르망디부터 침략하여 차츰 세력을 늘려나갔고, 1139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잉글랜드에서 스티븐과 왕위를 다투었다. 잉글랜드 내전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압도하지 못했고, 내전 기간이 길어지면서 완전히 교착되었다. 이 시기 헨리 2세는 앙주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1142년에는 잉글랜드로 건너가 1년가량 친척인 글로스터의 백작 '로버트'의 아들들과 같이 교육받았다고 한다. 1147년에는 14세의 나이로 잉글랜드로 건너가 내전에 참가하였는데, 이는 본격적인 군사활동이라기보다는 부유한 귀족 자제의 군사 놀이 정도의 수준으로 볼 수 있다. 헨리 2세는 소규모의 용병부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윌트셔를 공격했는데, 원정 자체는 성공적이었지만 용병들에게 지불한 돈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그는 처음에는 어머니 마틸다에게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오히려 공격당한 측인 스티븐이 헨리 2세의 자금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물론 스티븐도 헨리 2세의 친척이기 때문에 이러한 배려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내전을 평화롭게 끝내고 싶은 스티븐이 의도적으로 헨리 2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149년에 헨리 2세는 또 한 번 잉글랜드 내전에 개입했는데, 이번에는 잉글랜드 북부의 스코틀랜드와 체스터의 '라널프' 백작과 동맹을 맺었으나, 스티븐의 신속한 대처로 동맹은 붕괴되었으며, 헨리 2세는 다시 노르망디로 귀환하였다고 한다.

잉글랜드 탈환

1144년 조프루아는 잉글랜드 본토에서 내전이 한창 벌어지는 중에 상대적으로 관심을 못 받고 있던 노르망디를 공략하여 수도 루앙을 점령시켰고, 이를 통해 프랑스 왕 '루이 7세'로부터 정식으로 노르망디의 공작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공작위는 1150년 사실상 잉글랜드 내전에서 손을 땐 것으로 보이는 마틸다가 은퇴하면서, 헨리 2세에게 승계되었다고 한다. 또 이듬해인 1151년에는 조프루아가 사망하면서 헨리 2세는 앙주의 백작을 겸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1152년에는 루이 7세와 이혼한 '엘레오노르'와 결혼하였는데, 이 결혼으로 헨리 2세는 아키텐, 푸아티에, 가스코뉴를 차지하게 되어 프랑스에서 프랑스 왕보다도 더 넓은 영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에 헨리 2세를 큰 위협으로 판단한 루이 7세는 헨리 2세의 세력에 대항하는 동맹을 만들어 공격하였는데, 헨리 2세의 신속한 대처와 마침 루이 7세가 병에 걸리면서 타협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1153년에 헨리 2세는 소규모의 군대를 데리고 잉글랜드에 상륙하였는데, 곧 그의 지지자들을 모아 스티븐의 군대와 대치하였다. 그러나 여러 귀족들은 더 이상 내전을 끌고 가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둘 사이에 직접적인 전투가 벌어지진 않았고, 성직자들과 귀족들의 중재로 평화협상을 진행하였다. 두 사람은 '월리퍼드 조약'(윈체스터 조약)을 맺어 평화에 합의하였는데, 이 조약에서 헨리 2세는 스티븐의 잉글랜드 왕위를 인정하고 그의 후계자의 보호를 약속하였고, 대신 스티븐은 자신의 사후 잉글랜드의 후계자가 헨리 2세임을 확인하였다. 이후 스티븐은 혼란스러웠던 잉글랜드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헨리 2세가 잉글랜드에서 하는 행위들에 대해 묵인하였으며, 이듬해인 1154년 스티븐이 사망하고 헨리 2세가 정식으로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헨리 2세에게는 여러 과제가 산적해 있었는데, 긴 내전으로 황폐해진 잉글랜드를 정비하면서,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해야 했으며, 동시에 대륙에서 루이 7세의 견제를 견뎌내야 했다. 헨리 2세는 일단 한발 양보하는 형태로 루이 7세와 평화협정을 맺었고, 잉글랜드의 재건에 힘을 쏟았으며, 그 와중에 한창 내전 중인 인접 영지 브르타뉴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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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확장 정책과 프랑스 왕과의 반목

1157년 헨리 2세는 내전을 틈타 스코틀랜드가 차지한 북부 지역을 되찾아왔고, 1158년까지 웨일스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자신의 장남인 '청년왕 헨리'와 루이 7세의 딸 '마르가리트'와 약혼시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는데, 헨리 2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명분을 이용하여 계속해서 주변지역을 장악하려고 하였고, 루이 7세는 계속해서 헨리 2세의 행동을 견제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1160년에 헨리 2세는 다시 한번 루이 7세와 평화조약을 맺어 관계를 도모하려고 하였는데, 그 직후 루이 7세는 노골적으로 헨리 2세를 견제하는 행동을 취했고, 이는 화가 난 헨리 2세는 협정을 포기하고 블루아 지역으로 전격적으로 침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이러한 전면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1161년에 전쟁이 확대되기 이전에 협상이 진행되었고, 1162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주선으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헨리 2세의 영향력이 확장됨에 따라 그의 반대자들의 동맹도 늘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 2세는 계속해서 영지를 늘리는데 관심을 두었다. 1166년에는 브르타뉴에 개입하기 위하여 무력으로 침공하였고, 브르타뉴 공작을 강제로 퇴위시켰으며, 후계자인 딸을 자신의 삼남 '조프루아 2세'와 약혼시켰다. 헨리 2세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구심점이 되는 루이 7세를 중점적으로 공략하였는데, 1169년에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영국과 노르망디, 아키텐, 브르타뉴를 나누어 상속할 것을 선포하고, 이를 허가받기 위해 아들들에게 루이 7세에게 충성을 서약하도록 하였다. 또 차남인 '리처드 1세'를 루이 7세의 딸 '아델'과 약혼시켰다. 이 시기 아일랜드는 내전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헨리 2세는 이 내전에도 개입하였다. 교황 '아드리안 4세'는 아일랜드에 교회를 조직한다는 명분으로 이 침략을 승인하였고, 이로서 잉글랜드의 왕이 본격적으로 아일랜드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대반란

1170년 헨리 2세의 장남인 청년왕 헨리는 공동왕으로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이는 왕의 사후에 있을 후계자 다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컸는데, 청년왕 헨리는 명목상으로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지만, 그 실권은 헨리 2세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아무런 권한도 없었다고 한다. 청년왕 헨리는 이에 더해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고 하는데, 그는 1173년 형제들과 함께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그 외 지역의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으로 헨리 2세는 프랑스 지역에서는 상당한 위기에 몰렸지만, 상대적으로 잉글랜드 지역은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1174년에 스코틀랜드의 사자왕 '일리엄 막 안리크'가 사로잡히면서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고, 헨리 2세가 프랑스 지역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루이 7세는 군대를 물렸고, 두 세력 간에 평화협상이 시작되었다. 헨리 2세는 반란자들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약속했는데, 사실상 자신의 후계자들이 반란의 주요 가담자들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년왕 헨리와 리처드 1세, 조프루아 2세는 각각 적당한 보상과 함께 사면받았고,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존은 청년왕 헨리가 가지고 있던 영지 중 일부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헨리 2세는 존이 유일하게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편애했다고 하는데, 사실 반란 당시 존은 7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신 아들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한 엘레오노르는 감금되었으나, 다른 남작들은 한동안 투옥되거나 벌금을 지불하였고, 한편 사자왕 일리엄은 '팔레즈 조약'에 서명해야 했으며, 1175년에는 헨리 2세에게 충성을 서약함으로써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 왕국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반란을 이겨낸 헨리 2세의 위세는 막강하였고, 루이 7세도 한동안 조용히 지내기도 했지만, 이내 두 사람의 갈등은 다시 시작되었다.

계속되는 가족 간의 권력 투쟁

1177년 헨리 2세는 존을 아일랜드의 영주로 삼았고, 1179년에는 '필리프 2세'가 새로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리처드 1세와 조프루아 2세는 공식적으로 아키텐과 브르타뉴의 공작으로 인정받았으며, 이들은 필리프 2세에게 충성서약을 했다고 한다. 1182년에는 아키텐에서 리처드 1세에 대해 대대적으로 반란이 일어났는데, 여기에 청년왕 헨리와 조프루아 2세가 가담하였고, 형제간의 분쟁의 중재에 실패한 헨리 2세가 리처드 1세의 편을 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번엔 형제들 간에 분쟁이 일어난 것인데, 이는 사실 필리프 2세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뒤에서 부추긴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전투는 1183년에 벌어졌는데,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청년왕 헨리가 이질로 사망하였다. 이로서 이 반란은 흐지부지 끝나 버렸지만, 이내 새로운 반란으로 번지게 되었다. 헨리 2세는 후계자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승계 구도를 재편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리처드 1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잉글랜드의 왕위와 노르망디의 공작위를 잇게 하였고, 대신 리처드 1세가 가지고 있던 아키텐의 공작위를 사남 존에게 넘겨주도록 하였다. 이번에는 리처드 1세가 아키텐의 반환을 거부하고 대군을 일으켜 조프루아 2세와 대립하였다. 사실 청년왕 헨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잉글랜드의 왕이자 노르망디의 공작이어도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불만을 가지게 된 것인데, 그러나 명분은 어디까지나 정식 후계자로서 헨리 2세가 사망할 경우에 정식으로 잉글랜드의 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또 리처드 1세가 아키텐에 대해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라거나, 어머니 엘레오노르에게 받는 영지라 애착이 깊었다고나 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키텐의 공작으로서 실권을 쥘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잉글랜드의 왕위와 또 가문의 전체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다. 이뿐만 아니라 존이 아키텐을 승계받은 것도 단지 헨리 2세의 편애 때문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이전에 리처드 1세에게 아키텐을 승계하도록 한 것이 편애 때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존의 청년왕 헨리와 리처드 1세, 조프루아 2세 때에 영지를 나누어 준 것을 보면 형제 서열 순서대로 명목상 더 좋은 것을 나누어 준것이 명백하고, 존의 경우도 리처드 1세가 정식 후계자로 바뀌게 되면서 그 대신 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형제들은 프랑스 왕의 공작에 아주 쉽게 놀아났는데, 필리프 2세는 세 형제의 사이를 솜씨 좋게 이간질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제일 가까운 조프루아 2세를 은근히 밀어주면서 갈등을 부추겼다. 결국 헨리 2세는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번지기 전에 리처드 1세를 잉글랜드로 불러들였으며, 엘레오노어까지 데려와 리처드 1세를 설득시켜 간신히 분쟁을 미연에 종식시킬 수 있었다.

모든 아들의 반역과 불우한 최후

1186년에 필리프 2세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오던 조프루아 2세가 파리에서 급사하였다.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조프루아 2세의 브르타뉴 공국과 그의 자녀들의 양육권을 요구하는 등 갈등을 유발하기 시작하였고, 헨리 2세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다시 리처드 1세에게 접근하여 동맹을 시도하였다. 이듬해인 1187년에는 예루살렘이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에게 점령되었기 때문에 십자군 원정이 요구되었고, 이로 인해 헨리 2세와 필리프 2세는 분쟁을 중단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1188년 교황의 중제로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와 아델을 공식적으로 혼인시키고, 그를 헨리 2세의 공식 후계자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헨리 2세는 이러한 요구에 대답하기를 주저하였으며, 리처드 1세의 거듭된 후계자 인정 요구에도 침묵하였다. 사실 헨리 2세 입장에서는 필리프 2세의 정치적 음모에 대해 저항해야 했고, 사실상 필리프 2세에게 놀아나 자신에게 반항하며 반란이나 일으키는 리처드 1세가 못 미덥기는 했을 것이나, 이로서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의 사이는 완전히 갈라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듬해인 1189년에 다시 열린 협정에서 헨리 2세는 리처드 1세 대신 존을 아델과 혼인시키는 것에 대해 제안했지만, 그것은 필리프 2세에게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논의되지도 않았다고 한다. 협상이 결렬되자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는 즉시 헨리 2세를 기습하였고, 그는 노르망디까지 탈출하였다가 앙주를 향하는 도중에 시농성에서 병으로 쓰려졌다고 한다. 결국 헨리 2세는 평화협상을 진행하여, '제3차 십자군 원정'이 끝나는 데로 리처드 1세와 아델이 결혼하는 것을 승인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자신의 공식적인 후계자인 것도 인정하였다. 이후 헨리는 다시 시농성으로 옮겨졌는데, 거기서 막내 아들인 존까지 리처드 1세의 편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숨졌다고 한다. 사실 이 시기에 이르러 존이 이미 승리자인 리처드 1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기도 했겠지만, 애초에 존이 누구의 편을 들었던 아무 상관이 없었을 것 같은데, 어찌 되었던 이로서 헨리 2세는 자신의 모든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웃지 못할 일을 겪게 되었다. 헨리 2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광대한 영지를 소유하여 이를 '앙주 제국'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는데, 그의 영향력은 막강하여 명분만 있었다면 프랑스의 왕과도 겨룰 수 있었겠지만, 결국 그 프랑스 왕의 간계에 집안이 갈라져 서로 싸워 풍비박산 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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