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진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상앙 「공손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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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

위나라의 공손앙

'상앙'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인 기원전 390년경에 태어났는데, 위()나라 사람으로 위()나라 군주의 서자 출신이라고 한다. 그의 본래 이름은 '공손앙'으로 어렸을 때부터 법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형명학에 관심을 가졌고, 장성하여서는 위(魏)나라로 건너가 당시 위(魏)나라의 재상이었던 '공숙좌'의 휘하에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공숙좌는 기원전 360년에 사망하였는데, 그는 죽기 전에 모시고 있던 위나라의 '혜왕'에게 자신의 후임으로 상앙을 추천하면서 쓰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죽이라고 진언하였다고 한다. 이는 상앙이 다른 나라로 가게 되면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제거하라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전폭적으로 추천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는데, 혜왕은 공숙좌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러고 나서 공숙좌는 다시 상앙을 찾아 혜왕이 중용해 줄 것 같지 않으니 차라리 도망가라고 말해주었는데, 상앙은 천거하는 말도 듣지 않았으니 죽이라는 말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후 공숙좌가 죽고 나서도 혜왕은 늙은이의 노망 난 말로 취급하며 신경 쓰지 않았고, 상앙은 위(魏)나라에서의 출세를 포기하고 진나라로 옮겨가게 되었다고 한다.

진나라의 상앙

진나라는 전통적인 군사강국이었지만 변방 국가로 반 이민족 취급을 받고 있었으며, 당시에는 본래부터 강대국이었던 제나라와 초나라뿐만 아니라 위(魏)나라가 두각을 나타냈는데, 기원전 389년에 위(魏)나라는 '음진 전투'에서 5만의 병력으로 진나라의 5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당대의 패자로 자리 잡고 있었다. 진나라에서는 기원전 361년에 '효공'이 군주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는 구현령을 내려 널리 인재를 모집하며 부국강병의 의지를 표명하였고, 그 소식은 상암에게도 전해져 이듬해 공숙좌가 사망하자 진나라로 향했다. 그러나 진나라에는 이미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때 상앙은 남들보다 빨리 효공과 직접 만나기 위해, 효공의 측근인 '경감'이란 자의 도움을 구했다고 한다. 상앙은 효공과 만나 먼저 성인의 도에 대해 설파하였는데,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듣고자 하지 않은 효공은 내내 코를 골며 졸았다고 한다. 상앙은 다시 경감에게 부탁해 효공과 또 만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천자의 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역시 효공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세 번째로 경감을 찾아간 상앙은 효공과 만나 패자의 도를 소개하였고, 네 번째로 만났을 때 패자의 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 이에 큰 관심을 가진 효공은 몇 날 며칠 동안이나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효공은 예나 도 같은 것보다는 당장 진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계책을 필요로 했는데, 그는 상앙이 말하는 패자의 도에 감화되어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후 상앙은 군제, 세제, 법제를 정비하고, 토지제도와 군현제를 시행하는 등 대개혁을 통해 진나라를 중앙집권적 국가로 변모시켰으며, 그 공적으로 열후에 봉해져 상 땅을 봉토로 받았는데, 이때부터 상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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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의 개혁

상앙은 법가사상을 중심으로 변법을 단행하여 진나라를 부국강병하게 만들려고 하였으며, 이를 통해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는 중앙집권적인 국가형태로 나아갔고, 농업을 장려하여 고대국가의 국력에 근본이 되는 농업 생산량 증대를 추구하였다. 그의 지휘아래 정부는 낙후된 지역에 인력과 자금을 투입하여 거점화하였고, 정부 주도로 철광을 개발하거나 관개수로를 정비하는 등 지금까지의 자연발생적인 취락을 영토로 삼는 것에서 벗어나 국가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국토를 개발하는 방식을 선보였다. 그리고 정부를 대대적으로 개혁하여 번잡한 제도를 과감히 없애었는데, 군사생산징세 등 행정에 관한 내용을 법으로 일원화하였으며, 위로는 '군현제'를 만들어 체계적인 관료제의 근간을 열었고, 아래로는 '십오제'를 시행하여 효율적인 국민 관리를 꾀했다. 또 토지를 국유화하여 거두어들인 후 구획법을 통해 다시 공평하게 나누어주었으며, 노비들을 해방시켜 자유농민이 될 수 있도록 도왔고, 집에 일하지 않는 남자가 많을수록 세금을 많이 거두어 노동력과 생산력을 증대시키면서 자연스럽게 그에 따른 세수증가도 이룰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이십등작제'를 시행하여 공과 과에 따라 승급과 강등이 유동적으로 가능한 계급제도를 신설하였으며, '군공수작제'를 통해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이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보상을 받게 함으로 동기부여도 하였으나, 이로 인해 토지나 노비, 신분적 특권들을 잃게 된 귀족들이 크게 반발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엄격한 법에 따라 처벌도 시행했기 때문에, 새로운 제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백성들에게도 원망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상앙은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는 긴 장대를 남문에 세우고 이를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 10금을 주겠다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이 이를 의심하여 아무도 나서지 않았는데, 이에 상앙은 다시 50금을 주겠다며 상금을 올렸다. 어떤 사람이 이 소리를 듣고 장난 삼아 이를 북문으로 옮겼는데, 상앙은 즉시 그에게 50금을 주어 나라에서 정한 법과 제도들이 실제로 지켜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 일화가 고사성어 '이목지신'의 유래가 되었는데, 상앙은 이래놓고 그가 시행하는 법을 칭찬하는 자를 잡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는 법을 싫어하는 자만큼 찬양하는 자도 해롭다고 하였는데, 그 의도가 어찌 되었든 간에 상앙은 너무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결국 미움받게 되었다. 그 외에도 상업의 발전을 억제하여 상대적으로 농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한다던가, 상평제도를 통해 농축산물 가격을 안정시키는 등 노력하였고, 오랫동안 진나라에서 계속되었던 이민족의 풍습을 억제하고 미신 숭배를 타파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앙의 개혁은 국가발전을 위한 국가발전이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국가를 위해 국가 발전을 시키는 것으로,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른 효과들은 그 부작용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그가 발전시킨 진나라는 전국시대의 패자가 되어 후에 중원을 통일시키기도 하지만, 거기서 얻어지는 왕이나 귀족, 백성들이 얻는 이익들은 국가 발전의 부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법을 가장 위에 두었는데, 그것은 기존의 국가들과 달리 군주도 그 아래에 두었으니, 그야말로 국가발전이라는 명제를 위해 국가의 지배자조차 법에 예속시킨 셈이다. 물론 이는 실제로 이루어지진 못했는데, 효공의 태자인 '영사'가 변법이 불편하다며 이를 어기자, 그의 스승인 '영건'을 불러 처벌하였으며, 이후 영건이 죄를 저지르자 그의 코를 베는 형벌을 내려, 그는 죽을 때까지 사람을 만나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상앙의 개혁은 진나라에 소위 태평성대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를 가져왔다고 하는데, 그의 법이 시행된 지 10년이 지나자 진나라에서는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았고, 산에는 도적이 없으며 집집마다 풍족하여 백성들이 모두 만족스러워하였다고 한다. 이는 대략적인 평가에 불과하겠지만, 고대 국가 중에서는 상당히 이질적이었겠지만, 현대와도 상당히 비슷한 사회 분위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너무 엄격했던 상앙의 최후

상앙의 개혁을 통해 변화된 진나라는 착실하게 국력을 쌓았고, 기원전 341년에는 위(魏)나라가 '마릉 전투'에서 제나라에 크게 패하자, 상앙은 이 틈을 노리고 위(魏)나라로 쳐들어가 하서 지역을 되찾아오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상앙은 평소 친분이 있던 위(魏)나라의 지휘관을 회담을 구실로 불러내어 사로잡는 행위를 하였는데, 이는 비열한 행위이기는 했으나 전국시대의 전투가 춘추시대에 비해 얼마나 더 현실적으로 진행되었는지에 대해 단편적으로 알 수 있다. 이후 진나라는 함양으로 천도하여 중원 진출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상앙은 대량조의 직위에 올라 사실상 진나라의 공동 군주나 다름없게 되었다. 한 번은 상앙은 '조량'이라는 사람을 소개받아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상앙은 그에게 자신이 진나라에서 펼친 정치에 대해 평가해 달라고 하였다. 조량은 처음에는 우려하며 말을 아꼈지만 상앙이 걱정하지 말고 바른대로 말해달라고 하자 말문을 열었는데, 그는 진나라의 '목공' 때 재상인 '백리해'를 들어 이야기하였다. 조량은 백리해가 소를 기르던 신분에서 재상이 되어 시기하는 자가 많았으나, 자신을 낮추고 어진 정치를 펼쳐 외출할 때도 호위병을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지금 상앙은 법과 정치를 잘못하여 많은 원한을 사고 있는데, 높은 자리에 올라 위세를 떨치면서도 외출할 때는 많은 호위병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다며, 관직과 영지를 반납하고 은퇴하는 것이 났겠다고 권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국가들은 그 실제 모습은 어떠했든 간에 기본적으로 예를 따르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정치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국가는 발전하였을지 언정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삶을 괴롭게 만든 상앙에 대해 조량이 좋은 평가를 내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점은 넘어가더라도 중요한 문제가 있었는데, 상앙의 너무 엄격한 법 집행은 많은 이들의 불만을 일으켰으며,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고 고관대작으로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외출하기 위해 여러 대의 마차와 수많은 호위병을 준비해야 했던 상앙이 은퇴한다고 해서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상앙은 이런 조량의 권유도 따르지 않았다. 결국 기원전 338년에 상앙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효공이 사망하자, 상앙과 갈등을 겪었던 태자 영사가 진나라의 군주가 되어 '혜문왕'이 되었고, 그는 변법에 반대하던 이들을 모아 상앙을 탄핵하게 하였다. 상앙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위(魏)나라로 도주하려고 하였는데, 진나라의 국경인 함곡관은 해가 진 뒤로는 새벽 첫닭이 울 때까지 문을 열지 않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밤중에 도착한 그는 함곡관을 넘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다시 여관을 찾아 하룻밤 묵으려고 하였는데, 이번에는 여행증이 없는 사람은 법에 따라 재워줄 수 없다며 여관 주인이 거절하였다. 이 모든 것은 상앙이 만든 법이었는데, 그 법에 되려 자신이 걸려든 꼴이 되어버렸고, 이를 유래로 '작법자폐'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결과적으로 상앙은 위(魏)나라로 도주하는 데는 성공하였는데, 위(魏)나라에서는 이전에 있었던 전투의 원한으로 그를 잡아다 다시 진나라로 돌려보내버렸다. 결국 그는 자신의 근거지인 상 땅에서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여 전사하였고, 그의 시신은 함양으로 보내져 자신이 만든 형벌인 '거열형'에 처해졌으며, 연좌제에 의해 삼족이 몰살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혜문왕은 상앙이 만든 법은 그대로 존속시켰는데, 그는 진나라의 기득권층인 귀족세력을 이용하여 당대의 실력자인 상앙을 처리하였고, 다시 상앙의 법을 이용하여 귀족세력을 억누르고 상앙이 만들어낸 강력한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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