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전조를 세운 흉노족의 「유연」
- 역사
- 2023. 9. 25.
한족화된 흉노족
'유연'(劉淵)은 중국의 후한말 삼국시대인 252년경에 '조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한족이 아닌 흉노족 출신으로 흉노족의 이름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까지 전해진 내용은 없다. 유연의 일족이 중원에 정착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인 '어부라' 때인데, 어부라는 187년에 아버지 '강거선우'의 명을 받아 한나라의 내전에 개입하였다가, 이듬해 이에 반발한 이들이 반란을 일으켜 강거선우를 죽이면서 근거지인 '이석'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중원을 떠돌게 되었다. 196년 어부라가 사망한 이후에는 동생 '호주천'이 선우의 자리에 올라 세력을 이어받았으며, 아들 '유표'도 그의 휘하에서 중원의 군웅할거의 시대를 보내게 된다. 여기서 유표가 유연의 아버지인데, 그는 스스로 한족화되어 한족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모계 조상중에 한나라 출신의 공주가 있었기 때문에 유씨 성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유연은 어렸을 때부터 비범하여 문무를 겸비했다고 하는데, 인질로서 조위의 수도 낙양에서 생활하면서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였고, 학자 '최유'에게 가르침을 받아 한족의 문화에도 정통했다고 한다. 이후 조위가 멸망하고 사마씨가 '서진'을 세웠는데, 이 시기 유표가 사망하였고, 유연은 그의 뒤를 이어 흉노의 좌부수가 되었다. 279년에는 당시 서진의 황제였던 '사마염'의 동생 '사마유'가 유연의 자질이 너무 뛰어나니 후환을 우려하여 제거해야 한다고 상소하였지만, '왕혼'이 부당한 처형을 만류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의 재능은 서진에서도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은데, 몇 번이나 그를 중용하자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가 공적을 바탕으로 세력을 이룰까 두려워 기용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흉노족의 대선우
289년 서진은 남흉노 5부에 도위를 설치하였는데, 유연은 그중 북부 도위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유연은 높은 자리에 올랐음에도 과시하지 않았고, 대신 베풀기를 좋아하고 손님 대접을 잘해 5부의 호걸들과 인근의 명사들이 상시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정치적 능력도 꽤 뛰어났던 것 같고, 5부 전체 사람들로부터 상당히 인정을 받아 290년에는 건위장군에 흉노오부대도독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서진을 건국한 사마염이 죽고 아들 '사마충'이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는데, 외척인 양씨와 가씨가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싸우면서, 291년부터 소위 '팔왕의 난'으로 불리는 내전이 시작되었다. 서진에서 혼란이 시작되자, 복속돼 있던 여러 이민족들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 갈길을 찾아 서진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유연의 휘하에 있던 이들도 반란을 일으켜 탈출하였기 때문에, 그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면직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서진의 관직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하였는데, 유연은 관직이 사라졌을 뿐으로 그 세력은 그대로 건제하였기 때문에, 팔왕의 난 중에 업성에 세력을 두고 있었던 성도왕 '사마영'에게 협력하여 사실상 용병이나 다름없는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304년에 유연의 종조부이자 흉노의 좌현왕이었던 '유선'이 여러 흉노의 유력자들과 협력하여 유연을 대선으로 추대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유연은 흉노의 병사들을 데려오겠다며 업성을 떠나 흉노족의 근거지로 향했다. 유연은 좌국성에서 정식으로 대선우가 되었으며, 이석에서 병사를 모아 거병하였는데, 그 무리가 5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사이 사마영은 업성을 버리고 낙양으로 달아났으며, '사마등'과 '왕준' 등의 공격을 받은 업성은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호한(전조)의 건국과 죽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유연은 계속 사마영을 도우려고 했던 것 같은데, 사마영의 장수인 '왕수'가 사마등에게 패배하고, 자신도 사마등을 돕는 선비족에게 패배하면서 사마영의 영역과 완전히 분단되었고, 이에 좌국성을 수도로 삼아 나라를 건국하여 스스로를 한왕으로 칭하였다. 유연은 스스로 유씨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유씨 황가를 잇는다는 의미로 국호를 '한'으로 하였지만, 이는 후에 나라를 이어받은 '유요'가 국호를 '조'로 바꾸면서 '전조'로 불리게 된다. 유연은 사마등이 보낸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차츰 영토를 확장하면서 일대를 장악하였고, 이 모습을 본 여러 세력이 유연에게 귀순하였다. 308년에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309년에는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낙양을 공격하게 하는 등 서진을 크게 위협하였다. 그러나 낙양을 쉽게 함락시키지는 못했는데, 서진의 기세가 강성하였기 때문에 일단 군대를 물려 상황을 보기로 하였으나, 310년에 유연은 갑작스럽게 병사하게 된다. 307년부터 시작된 이민족에 의한 서진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영가의 난'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유연이 시작하였지만 본인이 끝을 내지 못하고, 이를 이어받은 아들 '유총'이 서진을 멸망시키게 된다. 유연은 팔왕의 난을 시작으로 활약하였기 때문에, 흔히 '오호십육국시대'를 연 장본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