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명청교체기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 「주유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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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소외된 유년시절

'주유검'은 1611년 중국 명나라 때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태자인 '주상락'의 5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주유검은 명나라 황태자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형편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의 어머니인 숙녀 '유씨'는 낮은 신분으로 주상락의 총애를 받지도 못했고, 그가 5세가 된 1614년에 사망하였다고 하며, 그 또한 다섯 명의 아들 중 한 명으로 주상락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당시 만력제는 주상락의 이복동생인 '주상순'을 새로 후계자로 세우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궁궐 내 정치싸움의 한가운데 있던 주상락은 주유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1615년 '정격안' 사건으로 주상락의 태자 지위가 공고해졌지만, 이미 실질적 보호자도 잃고 정치적 보호자도 없는 주유검의 처지가 나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1620년에는 만력제가 사망하고 주유검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태창제'가 되었는데, 그는 '홍의안' 사건으로 제위 한 지 겨우 29일 만에 사망하였고, 다시 그의 장남 '주유교'가 뒤를 이어 '천계제'가 되었다. 그러나 애초에 주상락이 황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장남인 주유교도 상대적으로 소외된 상태였는데, 그는 문맹으로 글자를 읽을 줄도 몰랐으며, 정사를 내팽개치고 취미인 목공일에만 열중하여, 환관인 '위충현'에게 모든 일을 맡겨버렸다. 여기에 더해 유모였던 '객씨'에 대해 상당히 의존했던 것 같은데, 객씨는 유모의 역할을 끝냈음에도 퇴궁하지 않고 계속 주유교를 모셨다. 결국 조정은 위충현과 객씨의 손에 완전히 맡겨졌고, 그들은 국정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았으며, 정적들을 숙청하고 재물을 모으는 등, 안 그래도 몰락하고 있던 명나라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무능한 주유교였지만 자신이 모자라다는 것에 대해서 자각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주유검을 교육시키는 것에는 충분한 신경을 썼다고 하는데, 덕분에 주유검은 상당히 훌륭한 인물로 자랄 수 있었다.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행운인지 불행인지 주유교는 즉위한 지 7년 만인 1627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고, 그에게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주유검이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라 '숭정제'가 되었다. 그는 통찰력이 있고, 신중하며, 부지런했다고 하는데, 그의 업무 능력과 근면함은 명나라 황제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도 있다. 그만큼 부지런했던 황제는 중국 역사상에도 많지 않다고 하는데, 여기에 더해 검소하여 황제의 옷소매가 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주유검이 즉위하였을 때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첫 1년간은 '서광계'가 대신 섭정을 하였으며, 위충현을 비롯한 그의 일파들을 숙청하는 등 조정을 정상화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후 친정에 나서면서도 서광계를 중용하였고, 자신의 상업적 수완을 이용해 수만 냥을 국고에 보태기도 하였으며, 증세를 할 때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백성들에게 1년만 폐를 끼치겠다며 호소하기도 하는 등 어진 군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 시기 명나라는 이미 되돌리기 힘들 정도로 몰락하고 있었는데, 외부에서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었고, 국내에서는 그가 즉위한 1627년부터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의심이 많고 독단적인 성격이었는데, 이 때문에 실정을 거듭하기도 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조정 내에서 계속해서 정치싸움이 분분하였고, 관리들 사이에 부정과 비리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에, 주유검은 실책을 저지른 신하들을 매우 엄하게 처벌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이러한 면모가 실책으로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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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멸망

주유검이 저지른 실정 중 명나라의 멸망을 앞당기게 된 두 가지 큰 실책이 있는데, 첫 번째는 바로 홀로 청나라를 막고 있던 '원숭환'을 처형한 것이다. 원숭환은 영원성을 쌓아 명나라의 방어망을 효과적으로 확장하였고, 영원성 전투에서 청나라의 대군을 물리쳐 '누르하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영웅이었지만, 주유검은 그가 위충현에 의해 요서 지방 책임자로 승진한 것을 두고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 결국 1629년 원숭환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능지형을 받아 사망하게 된다. 두 번째 실책은 섣부르게 이자성의 난을 평정했다고 판단한 것인데, '홍승주'는 1636년 '위남 전투'에서 반란군을 대패시켰으며 반란군 수괴 중 하나인 '고영상'을 잡아 처형하였고, 이후에도 공격을 계속하여 반란군의 여러 우두머리들을 항복시켰다. 1639년에는 '동관 전투'에서 이자성을 대패시켰는데, 이때 이자성은 측근 18명만 데리고 간신히 도망쳤다고 한다. 사실상 반란 세력은 거의 와해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의 우두머리들이 대부분 생존해 있었는데, 주유검은 이를 반란이 완전히 평정되었다고 생각하고 홍승주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여 청나라를 상대하도록 요서지방으로 보냈다. 이는 내외로 적이 존재하던 당시 명나라 상황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원숭환이 살아있었다면 불필요한 결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군대가 없어지자 반란군은 다시 세력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명나라에 항복했던 반란군 우두머리들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게다가 1641년 '송산 전투'에서 홍승주가 청나라에 대패하면서 명나라에는 청나라와 반란군을 상대할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었다. 그나마 '오삼계'가 기지를 발휘하여 산해관을 접수하고 청나라를 막고 있었지만, 이도 상당 부분 난공불락이라는 산해관의 명성에 의지한 위장성세이기도 했기 때문에, 사실상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게 된 반란군은 노도와 같이 명나라를 위협하였다. 1644년 이자성은 서안을 함락시킨 후 '대순' 건국을 선포하며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그대로 북경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주유검은 산해관에 있는 오삼계에게 연락하여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 북경을 수비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청나라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 진군 속도를 조절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반란군이 북경으로 가는 길목의 명나라 장수들이 차례차례 반란군에 항복해 버렸고, 결국 반란군은 오삼계의 군대보다 훨씬 먼저 북경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북경의 외성수비를 맡은 태감 '조화순'도 이자성에게 항복해 버렸고, 그 이틀 뒤에 황궁인 자금성도 반란군에 의해 함락된다. 최후를 예감한 주유검은 조회를 열어 대신들을 소환하였는데, 이미 북경이 함락된 상태라 대신들도 참석할 수 없었고, 웬만한 이들은 모두 도망쳤기 때문에 환관 '왕승은' 한 명만이 그를 따랐다고 한다. 주유검은 아들들을 도망시키고 첩과 딸들을 직접 살해하였으며, 자신도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매었다. 황후 주씨도 그 뒤를 따랐으며, 왕승은도 주군과 최후를 함께하였다고 한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원에는 청나라가 들어섰기 때문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킨 것으로 보통 생각하는데, 엄밀히 따지면 이자성의 반란군이 멸망시켰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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