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예를 중시한 송나라의 양공 「자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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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송나라의 양공

'양공'의 이름은 '자자보'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송나라의 '환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송나라는 상나라(은나라)의 왕족인 '미자'가 나라가 멸망한 후에 주나라 '무왕'의 배려로 받은 봉토에 세운 제후국으로, 제후국들 사이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제나라, 진나라, 초나라가 강성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중견국가로 밀려나게 되었는데, 양공은 상나라 왕족의 후예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다시 송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기원전 652년 환공이 사망하자 양공이 뒤를 이어 송나라의 군주가 되었고, 이복형제인 '목이'를 재상으로 삼았다. 본래 환공 생전에 양공은 군주 자리를 목이에게 양보하려고 하였다고 하는데, 환공은 목이가 서자인 것을 들어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결국 양공이 송나라의 군주가 되었지만, 대신 목이를 재상으로 삼은 것을 보면 두사람 사이에 우애가 돈독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중원의 패자는 제나라의 '환공'이었는데, 양공은 아버지의 장례도 마치기 전에 그가 주최한 회맹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행동은 평소 인의를 따르고 예를 중시한 양공의 생각과는 괴리감이 있어보인다.

패자에 대한 야심

기원전 643년 제나라의 환공이 사망하자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면서 제나라는 극심한 혼란에 휩쌓이게 되었고, 이 때문에 병중에 보살핌을 받지 못해 굶어죽은 환공의 시체는 67일간이나 방치되었다고 한다. 양공은 이전에 환공으로부터 후계자인 아들 '강소'의 후견을 부탁받은 일도 있어 이에 개입하였고, 기원전 642년 강소가 제나라의 군주의 자리에 올라 '효공'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제나라는 극심한 내분으로 국력을 소모하여 더 이상 패자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양공은 전대 패자였던 제나라의 혼란을 잠재운 자신이 새로운 패자라고 생각하고 이를 공고히 할 야심을 품은 것 같다. 기원전 641년에 양공은 초나라에 제후들의 소집을 요구하며 회맹을 개최하였는데, 이때 목이가 작은 나라가 회맹에 지나치게 관여하면 화를 불러온다고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양공의 패자에 대한 야심은 확고했던 것 같은데, 그는 그대로 회맹을 진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회맹에 늦게 참석했다는 이유로 증나라의 군주를 삶아 죽였다고 한다. 이는 명백하게 과도한 만행으로 양공이 실제로 패자였다 할지라도 도를 넘는 행위였는데, 이 일로 양공은 많은 이들의 신임을 잃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는 이에 이의제기를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조나라의 공공만이 양공을 비난하며 중간에 돌아갔다고 한다. 자신에게 대적하는 조나라에 분노한 양공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갔지만, 조나라도 송나라와 비슷한 국력을 가진 국가였기 때문에, 6개월 동안이나 소규모 전투를 벌이며 대치하다가 별다른 성과없이 물러났다고 한다. 기원전 639년에 초나라와 제나라 등 여러 제후국들과 우나라에서 회맹을 열었는데, 양공은 이 회맹을 통해 정식 패자로 인정받으려고 한 것 같지만, 목이는 양공의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부를까 병사들을 데리고 참가하도록 조언하였다고 한다. 양공은 군사를 대동하지 않고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이를 거절하였는데, 막상 초나라의 '성왕'은 회맹 장소에 군대를 끌고왔고, 양공에 맞서 대립하였으며 다툼끝에 그를 붙잡아 억류하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송나라에서 목이가 양공을 대신하여 군주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성왕은 다시 박나라에서 회맹을 열어 양공의 처우를 논의하였다. 이는 사실 성왕의 책략으로 자신은 여러 제후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양공을 풀어주는 패자의 모양세를 취하면서, 동시에 풀려난 양공과 목이가 서로 싸워 송나라의 국력이 소진되는 것을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풀려난 양공이 송나라로 돌아오자 목이가 순순히 양공을 다시 송나라의 군주로 세웠다. 본래 목이는 양공과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공위를 찬탈할 목적이 없었고, 반대로 자신이 군주가 된 척을 하여 성왕을 속여 양공을 석방하기 위한 계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목이의 책략은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지만, 그 결과는 결코 송나라에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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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양지인

초나라에서 풀려난 양공은 온전히 송나라의 군주로 되돌아올 수 있었지만, 초나라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었다. 그러나 송나라의 국력으로 온전히 초나라를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원전 638년에 초나라의 동맹으로 소국인 정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당연하지만 성왕도 송나라의 공격이 자신에 대한 분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군대를 일으켜 정나라를 돕기위해 원군을 파견하였다. 송나라와 초나라의 군대는 '홍수'에서 대치하였는데, 이때 초나라의 군대는 아직 강 건너편에 있었다고 한다. 초나라군은 싸움을 시작하기 위해 도하를 시작하였고, 이를 본 목이가 양공에게 이 틈을 타 공격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다고 한다. 당시 초나라의 군대는 송나라에 비해 강군으로 그 규모도 더 많았다고 하는데, 양공은 절호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초나라 군대는 무사히 강을 건넜지만 무질서하여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다시 한번 목이가 양공에게 공격할 것을 권하였지만, 양공은 또 다시 목이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결국 양공은 초나라의 군대가 완전히 준비를 마칠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홍수 전투'에서 송나라는 초나라에 대패하였으며 양공 본인도 넓적다리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이 일로 양공은 송나라에서 거세게 비난 받았는데, 양공은 이에 대해 군자는 부상입은 자를 공격하지 않고 반백의 노인을 사로잡지 않는다며, 준비되지 않은 초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목이는 화가나 전쟁을 하는데 평소의 예의를 차리면 안된다며, 그럴바에 예의를 차려 차라리 미리 항복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나온 것이 '송양지인'이라는 고사로 쓸데없는데 예의를 차린 양공은 이 일로 이후로도 계속 비난받게 된다.

춘추오패

홍수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양공은 병석에 누워있었고 송나라의 기세는 크게 쇠하게 된다. 이후 후에 '춘추오패' 중 한명이자 진나라의 군주가 되는 '문공'이 망명중에 송나라에 찾아왔는데, 양공은 병석에 누워서도 예를 중시하는 태도를 견지하여 그에게 마차 20승을 보내어 환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송나라의 상황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문공은 곧 초나라로 떠났고, 양공은 기원전 637년에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사망하였다. 그래도 양공이 문공에게 지킨 예의는 크게 도움이 되었는데, 문공은 망명 중 여러 나라에서 환대와 냉대를 받아 이를 기억하고 있었고, 귀국하여 진나라의 군주가 된 이후에는 은혜와 복수를 철저하게 갚았다. 이때 양공이 배푼 은혜는 후에 초나라의 공격으로부터 구해주는 것으로 돌아와 송나라는 망국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양공은 스스로를 중원의 패자로 생각하고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한 것 같지만, 송나라의 국력이나 본인 스스로의 능력이 그를 뒷받침하기에는 상당히 모자랐다. 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그를 중원의 패자로 춘추오패 중의 한명으로 꼽기도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회의적인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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