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명청교체기 명나라 말기 사천지방을 장악한 대서황제 「장헌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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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반란군의 우두머리

'장헌충'은 중국 명나라 시기인 1606년 섬서성 연안부 정변현의 유수간보에서 태어났다. 장헌충의 집안은 매우 가난했는데, 그도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대추 장사를 하며 집안을 도왔다고 한다. 이후 독학하여 연안부의 포졸이 되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파면당했고, 다시 군에 입대하여 국경을 지키는 일을 하다가 범죄를 저질러 쫓겨나게 되는데,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연거푸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보면, 사람이든 인생이든 어딘가 꼬여있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안 좋은 전력이 생긴 장헌충은 앞으로 출세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 것인데, 행인지 불행인지 당시는 명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시기로 1627년에 섬서성 일대에서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나게 된다. 이듬해인 1628년에는 '왕가윤'이라는 자가 나타나 이들을 규합하여 본격적으로 반란이 일어났는데, 1630년에 장헌충도 고향인 유수간보를 중심으로 한 18개 마을의 농민들을 모아 반란군에 합류하였으며, 이때 자기 자신을 '팔대왕'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왕가윤은 1631년에 사망하였는데, 장헌충은 '왕자용'의 휘하에 있다가 1633년에는 황하 이남으로 향하여 '고영상'의 휘하로 합류하였다. 1634년에는 사천성을 공격하다가 도중에 '진양옥'에게 패해 도주하였고, 1635년에는 하남성에서 관군에게 포위되어 고전하였으나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화북의 봉양부에서 2만의 관군을 섬멸하였으며, 부자들을 모두 끌어내 처형하고 봉양부 창고를 열어 전리품과 식량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인근 황릉을 훼손하거나 주원장이 출가한 '용흥사'를 철거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고 한다. 그는 남하를 계속해서 장강 인근 고을을 돌아다니며 습격하였으며, 다시 호북성과 하남성을 거쳐 다시 관중 지방으로 복귀해서는 '홍승주'가 이끄는 명나라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장헌충은 이렇게 섬서성과 산서성, 하남성, 안휘성, 호북성, 사천성 등지를 전전하며 전공을 쌓았는데, 휘하의 장병들이 수십만에 달할 정도의 세력을 이루었다고 한다.

대서황제

그러나 이들은 '위남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에게 대패하였는데, 1636년에 고영상은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사실상 반란군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이때 장헌충도 한번 명나라에 투항했다고 한다. 반란군의 우두머리 중에서는 '이자성'만이 투항하지 않고 남아있었는데, 그도 1638년 '동관 전투'에서 패배하여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도주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이러한 형세가 완전히 반전되게 되었는데, 1639년 명나라 조정에서는 반란이 이미 진압되었다고 판단하고 홍승주를 불러들여 청나라를 상대하게 하였다. 그 틈을 타고 이자성을 포함한 반란세력들은 다시 재기에 성공하였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1641년 '송산 전투'에서 명나라군이 청나라군에게 대패하면서 국내에서 반란군을 대적할 세력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 시기에 장헌충도 다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는 이자성에게 합류하지 않고 따로 세력을 이끌고 화남지방으로 향했다. 그는 호북성으로 향해 양양을 함락시켰으며, 이때 황족인 양왕 '주익명'을 처형하였고, 1643년에는 무창을 함락시킨 후에 스스로 '대서왕'을 칭했다고 한다. 1644년 이자성은 서안을 함락시키고 '대순'을 건국하여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장헌충도 성도를 함락시키고 '대서국'을 세웠으며, 스스로 '대서황제'를 칭하였다. 그는 단지 이름뿐인 국가가 아닌 나름 체계적인 정부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한 것 같은데, 이를 위해 본래 자신들이 죽이고 다녔던 명나라의 관리들이나 지방 호족과 신사 세력을 적극적으로 포섭하였고, 모자란 관료 자리를 채우기 위해 독자적으로 과거시험을 개최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당시 그리스도교 전도를 위해 사천에 있었던 서양인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부길로'와 '가브리엘 데 마갈량이스'도 장헌충의 세력에 합류하였다. 그 사이 이자성은 북경을 함락하여 명나라를 멸망시켰으나, 이후 '오삼계'와 청나라의 연합군에게 크게 패배하였으며, 결국 1645년에 사망하게 된다. 장헌충은 이때 섬서성으로의 세력확장을 꾀했던 것 같은데, 이를 위해 몇 차례 한중을 공격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잇따른 군사적 실패와 이자성의 죽음 등으로 대서국 내부에서 혼란이 심화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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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대학살

장헌충의 이름을 역사적으로 크게 알린 것은 반란군의 우두머리나 대서황제로서가 아닌, 사천 대학살의 주범으로서라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는 청나라 군이 압박해 오자 사천의 백성들은 자신의 손으로 얻은 것이니, 자신의 손으로 거두겠다며 대학살극을 벌였다고 한다. 장헌충은 휘하의 병사들에게 할당량을 주어 매일매일 일정 숫자 이상의 사람들을 죽이도록 했으며, 일정 수 이상의 사람을 죽인 병사들을 승진시켜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죽이고 또 죽이다가 죽일 뱅성들이 없어지자, 이번에는 병사들끼리 서로 죽이게 했다고 한다. 또 근처에 죽일만한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자, 오늘 밤에는 죽일 놈이 하나도 없다면서 직접 자신의 아내와 애첩들, 그리고 자식들까지 모조리 죽이고서는, 다음날 일어나서 다시 아내를 찾아도 오지 않아 그의 측근이 이미 어제 모두 죽였다고 알려주었는데, 왜 말리지 않았냐고 그 측근까지 죽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에는 죽일 사람이 없어서 대신 소나 말 등을 죽이며 돌아다녔다고도 하고, 명 말기인 1578년에 조사한 사천 지역의 인구가 310만 명 정도였는데, 청나라의 강희제가 1685년에 조사했을 때는 18,090명이었다고도 하며, 일설에 의하면 그가 죽인 사람이 수억에 이른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상당히 과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 대부분의 내용이 청나라 때 쓰였다는 것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의 압박이 시작되면서 사천 지방에서도 장헌충에 대한 반란이 상당히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사천지방을 장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 유지나 관리들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그 명분을 떠나서 반발심을 갖고 있는 자들도 많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청나라와의 전투 중에 죽은 사람들이나, 이후 청나라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까지 생각하면, 그 숫자가 그리 적지는 않았을 것이기는 하나 전해지는 희생자의 숫자들에 대해서는 현실과 맞지 않게 상당히 과장된 점이 많이 보인다.

반란군 수괴의 최후

장헌충은 청나라의 압박이 계속되자 탈출을 결심한 것 같은데, 1646년 소수의 인원만을 데리고 섬서로 향하던 도중, 미처 사천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청나라군에 공격을 받았고, 청나라의 하석숙친왕 '아이신기오로 호오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한다. 이후 대서군은 그의 측근이었던 4명의 부하들이 이어받았으며, 그들은 1659년까지 저항을 계속 이어갔다고 한다. 그가 사천 대학살을 벌인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어느 정도 규모의 학살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그의 사후에 사천지역이 완전히 청나라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잔존 세력들이 수년간이나 버틴 것을 보면, 적어도 알려진 만큼의 대학살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청나라 입장에서는 정복의 명분을 위해 명나라 조정이나, 반란군 세력들의 악행을 과장할 만한 충분한 필요가 있었고, 특히 사천의 대학살을 알린 기록들의 대부분이 장헌충에게 피해를 입은 관료들이나 신사 출신들이 작성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또 사천의 일부 지역에서는 사당에 그의 동상을 모시고 제사 지낸다는 것을 봐도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사실이 있었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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