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영국 잉글랜드의 가장 인기없는 왕 「존」
- 역사
- 2023. 9. 21.
랙랜드 존
'존'은 1166년 잉글랜드의 왕이자 노르망디의 공작이며, 프랑스 왕국에서 가장 넓은 영지를 소유한 '헨리 2세'와 '에레오노르'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위로는 형이 3명 있었는데, 1169년에 각각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아키텐, 브르타뉴를 상속받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헨리 2세는 존이 별도로 상속받을 땅이 남지 않은 것을 보고 우스갯소리로 '랙랜드'(Lackland)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헨리 2세는 막내아들에게 영지를 구해주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는 사보이의 백작 '훔베르트 3세'의 딸과 존을 약혼시켜 백작 사후에 영지를 상속받을 수 있게 하였으며, 동시에 이 정략결혼을 통해 아키텐 남부의 국경지대의 안정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헨리 2세는 이 정략결혼의 격을 맞추기 위해 존에게 3개의 성을 주었는데, 그 성들은 본래 장남인 '청년왕 헨리'에게 명목상 상속되기로 정해져 있던 성이었다고 한다. 청년왕 헨리는 이전부터 실권 없이 명목상의 지위에 있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1173년 이를 계기로 프랑스 왕 '루이 7세'에게 합류하여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어서 동생인 '리처드 1세'와 '조르푸아 2세'까지 반란에 가담했고, 이 반란이 일어나는 데는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부추김이 큰 역할을 했다고도 한다. 헨리 2세는 성공적으로 반란을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스코틀랜드에 대한 영향력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후계자들이 숙적인 프랑스의 왕에게 가담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뼈아픈 경험을 하였다. 헨리 2세는 반란을 일으킨 후계자들을 용서하고 관대한 처분을 하였지만, 주변 사람들은 이때부터 헨리 2세가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존을 편애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 시기의 존은 겨우 7살에 불과하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반란에 가담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찌 되었던 이 일로 인해 헨리 2세는 존에게 영지를 주면서 동시에 다른 후계자들이 반발하지 않도록 조심한 것 같은데, 1175년 헨리 2세는 잉글랜드의 콘월 백작이 사망하자 그의 차용하여 존에게 주었으며, 부유한 글로스터의 '이사벨'과 약혼시켰다. 또 1177년에는 새로 영향력을 확보하기 시작한 아일랜드의 영주로 임명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명분뿐인 직함에 불과했다. 한편 이번엔 형제들 사이에 불화가 생겼는데, 1183년 청년왕 헨리와 조르푸아 2세가 손을 잡고 아키텐의 반란을 획책하면서 리처드 1세를 공격하는 일이 일었났다. 리처드 1세는 이전의 아버지에 대한 반란 이후 아키텐 지역에서 반란세력을 제압하고 있었는데, 그는 잔혹한 진압 방식 때문에 휘하 영주들로부터 신임을 잃고 있었으며, 새로 즉위한 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가 이 틈을 이용하여 이들 형제 사이를 이간질했다고 한다. 헨리 2세는 형제간의 분쟁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였고, 이에 상대적으로 불리한 리처드 1세의 편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반란은 어이없게 마무리되는데, 청년왕 헨리는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이질로 사망하였고, 반란은 흐지부지 끝나버렸지만, 대신 헨리 2세에게는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기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승계문제였는데, 헨리 2세는 사망한 장남의 자리를 차남인 리처드 1세에게 넘겨주기로 하여,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승계하도록 하고, 대신 아키텐을 존에게 넘겨주도록 결정하였다. 그러자 이번엔 리처드 1세가 반발하였는데, 그는 아키텐의 권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한때 헨리 2세와 조르푸아 2세, 존은 리처드 1세와 사이에서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치닫기도 했다. 1184년 이 승계 문제는 원만하게 합의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결국 존은 아키텐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리처드 1세의 동생 존
1185년 존은 기사와 관리들을 데리고 아일랜드로 넘어갔는데, 이것이 그가 아일랜드를 처음으로 방문한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헨리 2세는 아일랜드 내부의 내전을 이용하여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하였는데, 그 기간이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아일랜드 내부는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은 아일랜드의 유력자들을 조롱하면서 불화만 일으켰고, 아일랜드의 총독과 반목하는 등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잉글랜드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이후 교황이 교체되면서 존의 아일랜드에서의 지위를 인정받을 가능성이 커지고, 존과 반목하던 아일랜드의 총독이 암살당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었는데, 1186년 헨리 2세의 삼남 조프루아 2세가 파리에서 급사하면서 존의 아일랜드 재방문은 미뤄지게 된다. 여기서 다시 프랑스가 개입을 시도하였는데, 조프루아 2세는 생전에 필리프 2세와 친해서, 종종 파리에서 만나 반란음모를 꾸미곤 했고, 필리프 2세는 이러한 친분을 이용하여 조프루아 2세의 자식들에 대한 양육권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헨리 2세와 필리프 2세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는데, 여기에 더해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를 끌어들여, 또다시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획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듬해 예루살렘이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에게 점령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십자군 원정에 대한 기대가 일면서 기독교 세력간의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으로 분쟁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는데, 이후 이어진 평화협상에서 헨리 2세가 리처드 1세의 상속을 확정하는 것을 주저하면서 내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헨리 2세가 병으로 쓰러졌고, 내란은 리처드 1세의 승리로 막을 내렸으며, 헨리 2세가 그대로 사망하면서 사실상 모든 영토는 리처드 1세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때 존은 처음에는 헨리 2세를 지지하였다가, 후에 리처드 1세를 지지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꿨다고 하며, 패배 후에 병석에 있던 헨리 2세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비관하였고, 이것이 그의 죽음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보았을 때 고령의 헨리 2세가 내란에서 승리하였다고 하더라도, 리처드 1세의 승계구도가 쉽게 바뀌기 어려웠을 것이며, 리처드 1세가 사망하지 않는 이상 제대로 된 통치경험도 없는 존에게 후계를 물려준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태에서 헨리 2세가 병으로 쓰러졌을 때 존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리처드 1세를 지지하는 것은 상황적으로 이상하지도 않다. 그런데 산전수전 다 겪으며, 특히 정략결혼을 통해 영지를 늘리거나 동맹을 늘리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던 헨리 2세가 겨우 존의 이반 소식으로 낙담하거나 건강을 해쳤다는 건 조금 이해하기 힘들다. 사실상 이로서 헨리 2세는 자신의 모든 아들에게 반란을 당한 꼴이 되었는데, 아들들의 반란과 반란 모의에 대해 숫하게 들어왔을 헨리 2세가 존에게 조금 실망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의 생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상당히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든 잉글랜드의 왕이 된 리처드 1세는 즉위하자마자부터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였고, 그사이 존은 프랑스 북부의 작은 영지를 가진 모흑땅의 백작이었지만, 글로스터의 이사벨과 정식으로 결혼하여 잉글랜드에 꽤 많은 영지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리처드 1세는 존에 대한 견제를 확실하게 하였는데, 리처드 1세는 존에게 3년간 자신의 허락 없이 잉글랜드에 상륙하지 못하도록 맹세를 강제하였고, 그가 부재중인 동안 잉글랜드를 통치하면서 왕위를 보호할 섭정단을 꾸려놓고 출발하였다. 또 원정 중에 조르푸아 2세의 아들인 조카 '아서'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별도의 정치적 목적에 의한 것이기는 했으나, 존의 왕위 찬탈 명분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역할도 되었다.
잉글랜드 왕위 찬탈 시도
1190년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을 출발하자 잉글랜드 내부에서는 곧바로 혼란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을 위해 시행했던 무리한 증세와 매관매직 행위 등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존은 이틈을 타서 잉글랜드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원정 도중에 리처드 1세가 결혼하는 등 존의 후계자로서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효과를 보기가 힘들었다. 1191년 리처드 1세와 함께 원정을 떠난 필리프 2세가 원정을 포기하고 프랑스로 돌아왔는데, 존은 필리프 2세와 협력하여 리처드 1세의 지위를 찬탈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필리프 2세는 존을 이용하여 프랑스 내의 그들의 영지를 빼앗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리처드 1세의 몰락이라는 목적이 일치하였는데, 필리프 2세는 존의 찬탈을 지원하고, 대신 존은 필리프 2세의 여동생 '아델'과 혼인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사이 리처드 1세는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귀환하고 있었는데, 배가 난파되어 육로로 이동하던 중 오스트리아의 공작 '레오폴트 5세'에게 체포당하게 된다. 1192년 레오폴트 5세는 리처드 1세의 신병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넘겼는데, 이때 리처드 1세의 소식이 처음 파리로 전해졌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존은 급하게 군대를 모아 잉글랜드를 압박하였고, 아키텐에 있던 엘레오노르는 리처드 1세를 구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였다. 존은 군대를 이끌고 무력으로 압박하면서 동시에 리처드 1세에 대한 악평을 퍼트리고, 심지어 그가 이미 사망했다는 거짓 주장까지 하였으나, 잉글랜드의 섭정단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1194년 존은 리처드 1세가 풀려나자 즉시 파리로 도주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에 도착하여 혼란을 추스리고 노르망디로 향하자, 즉시 리처드 1세를 찾아가 항복하였다. 이때 두 사람의 어머니인 엘레오노르가 리처드 1세에게 존을 살려줄 것을 간청하였는데, 리처드 1세는 존이 어려서 사악한 자들에게 속았다고 하면서 용서해주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후에 '아이반호'라는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유명한 '로빈 후드'가 '록슬리'라는 가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후로 존은 리처드 1세에게 충성하였고,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에게 빼앗긴 프랑스 영지를 하나하나 되찾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 무능한 존
1199년 리처드 1세는 반란을 진압하던 도중에 석궁에 맞았고, 상처가 심해 그대로 사망하였다. 당시 리처드 1세에게는 정식 후계자가 없었는데, 사망할 때까지 상당한 여유가 있었음에도 그는 정식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것 같고, 이에 존과 브르타뉴의 아서 사이에서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아서는 존의 형 조르푸아 2세의 아들이었고, 한때 리처드 1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기도 했지만, 후계자 순위로 보자면 존보다 아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존은 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올렸고, 아서는 군대를 이끌고 앙주로 향했으며, 아서를 지지한 필리프 2세도 마찬가지로 군대를 이끌고 투르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존은 아서에게 가담한 앙주의 유력한 귀족을 회유하는 등 노력하였고, 리처드 1세 때에 맺어진 반 프랑스 동맹이 아직 유효하였기 때문에 이 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1200년 필리프 2세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교황의 중재 아래 존의 지위를 인정하며 협상하면서 상황은 종결되었지만, 이후 존은 스스로 자신의 발목을 잡는 행동을 계속하게 된다. 존은 이 시기 글로스터의 이사벨과 이혼하고 앙굴렘의 '이사벨'과 재혼하였는데, 앙굴렘의 이사벨은 이미 뤼지냥 가문의 사람과 약혼한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이 결혼으로 인해 아키텐 지역의 안정을 추구할 수 있었으나, 대신 푸아투와 노르망디 동부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뤼지냥 가문과 적대하면서 다시 분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사실 중세시대에는 이러한 약혼자가 있는 상대와 결혼하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는데, 존은 새 아내의 이전 약혼상대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주기는 커녕, 오만한 태도로 그를 모욕하였다고 한다. 뤼지냥 가문에서 이에 대해 필리프 2세에게 불만을 제기하였기 때문에, 필리프 2세는 존을 파리의 법정으로 출석하도록 요구하였는데, 존이 이를 거부하면서 필리프 2세는 그의 모든 프랑스 영지를 몰수하여 아서에게 수여하겠다고 하였다. 1202년 이로인해 존과 필리프 2세는 다시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초기에 존은 노르망디 동부의 수비에 전념하면서, 아키텐으로 쳐들어 온 아서를 물리치고 그를 사로잡는 등 전과를 세워 전쟁의 승기를 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존은 이전 후계자 분쟁에서 자신을 도운 앙주의 유력 영주를 무시하였고, 새로 사로잡은 반란 영주들을 감옥에서 죽게 내버려 두는 등 비도덕적인 행동을 일삼았는데, 그중에서도 아서는 존에게 감금된 상태로 행방불명이 되었기 때문에, 그 진실은 알 길이 없으나 지금도 많은 이들은 존이 아서를 살해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존은 이 전쟁 내내 생각보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며 활약하였지만, 그의 정치적 재능은 절망적이었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아군이었던 많은 중소 영주들이 적으로 돌아서면서 패배하게 된다. 1204년 필리프 2세는 노르망디를 점령하고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앙주와 푸아투도 까지 손에 넣었으며, 존은 브르타뉴와 그 외 지역에서도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사실상 프랑스 내에서 아키텐 공국을 제외한 모든 영지를 잃게 되었다.
교황과의 분쟁
잉글랜드에서 존의 상황은 프랑스보다는 나았는데, 잉글랜드의 사람들은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 때 전쟁을 위한 증세로 고통받긴 하였지만, 직접적인 반란이 일어나거나 하진 않았었다. 존은 본래부터 잉글랜드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던 것 같은데, 프랑스에 있는 대규모 영지를 잃고 난 후에는 더욱 인기가 없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존은 잃어버린 프랑스 영지를 되찾기 위하여 군비를 확보하기 위해 증세를 일삼았고, 자신의 측근이 아닌 지방 영주들에게 무례하게 구는 등 잉글랜드에서도 착실하게 불만의 씨앗을 심어나갔다. 원래 존의 아버지인 헨리 2세는 잦은 전쟁과 과도한 증세로 인해 잉글랜드 국민들 사이에서 불만이 많았다고 하는데,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 등을 위해 무리한 증세를 반복한 것으로 모잘라, 존은 리처드 1세보다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였다고 한다. 또 존은 교회와의 사이에서도 분쟁이 있었는데, 1205년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사망하자 그 후계자의 임명을 놓고 존과 교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그러나 막상 로마의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존이나 캔터베리 교구에서 원하는 후보가 아닌 제삼자 '스티븐 랭턴'을 마음대로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존은 파리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랭턴에 대해 의심하였고, 그의 잉글랜드 입국을 금지하는 등 사실상 임명을 거부하였다. 결국 1207년 교황은 잉글랜드 전역에서 성무를 금지하는 등 압박하였고, 1209년에는 아예 존을 파문하기도 하였다. 이에 존은 잉글랜드 내 성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 수익을 국가에 귀속시키는 등 극심하게 반발하면서 갈등은 지속되었다. 1213년에 교황은 아예 프랑스의 잉글랜드 침략을 종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전쟁을 불러올 만한 힘이 있는 행위는 아니었지만, 프랑스의 침략 위협을 신경쓰고 있던 존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는데 충분히 작용하였고, 결국 존은 잉글랜드 전체를 형식적이나마 교황에게 양도하였으며, 교회의 손해에 대한 보상을 해야 했다. 1214년 존은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4세와 볼로뉴의 영주, 플랑드르의 영주와 동맹을 맺고 본격적으로 다시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 전쟁에서 존은 잉글랜드의 군대를 이끌고 아키텐에서 공격을 시작하였고, 오토 4세를 비롯한 연합군이 프랑스 북부를 공격하여 양면전선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러나 존은 대군을 이끌고 앙주까지 진군하였지만, 프랑스의 지방 영주들의 협력을 얻지 못해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북부에서는 연합군이 '부빈 전투'에서 필리프 2세에게 패배하면서, 존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잉글랜드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마그나카르타와 최후
잉글랜드에서 존의 인기는 최악의 상태로 떨어졌다. 그는 프랑스 영지의 문제로 막대한 세금을 걷어가고서도, 무엇하나 성과를 내지 못한체 빈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1215년 많은 남작들이 존에게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존은 한때 교회의 도움을 얻기 위해 십자군이 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하였다. 애초에 두 세력은 정면으로 맞붙기를 주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교회의 중재도 있어 존은 후에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또는 '대헌장'(Great Charter)으로 불리게 되는 협정문에 서명하였다. 이 협정의 내용은 단순히 남작들을 비롯한 귀족들만의 요구가 아닌, 자유 농민을 포함한 다양한 계층의 자유인들의 권리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잉글랜드가 대륙의 국가들보다 늦게 봉건화가 진행되었고, 과거부터 전해 내려 오던 방식을 토대로 한 일종의 관료제와 비슷한 방식의 통치체제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잉글랜드에는 자유 농민의 숫자가 노예나 다른 없었던 농노와 비슷한 수준으로 많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의 합의는 실제로 지켜지지 못했는데, 남작들은 합의 이행을 감시하기로 한 남작 평의회가 존에게 인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하였고, 존은 교황의 힘을 빌려 왕권에 반하는 행동을 한 남작들을 파문시켜 버렸다. 존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윌리엄 마셜' 등의 기사들을 중용하며, 남작들을 런던에 묶어두고는 하나하나 그들의 영지를 점령해 갔는데, 1216년 남작들이 프랑스의 왕자 '루이 8세'를 끌어들이면서 전세는 다시 대등하게 되었다. 그러나 존은 얼마 안 있어 내전이 한창인 와중에 병으로 사망하였고, 아들인 '헨리 3세'가 9세의 나이로 후계를 잇게 되었다. 그는 윌리엄 마셜 등이 도움을 받아 루이 8세를 물리치고 반란을 진정시켰으며, 이에 따라 마그나 카르타의 협정도 유지된 것 같지만, 헨리 3세가 나이가 들면서 다시 마그나 카르타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존의 행적들은 사실 당시의 왕들에 비추어 보면 별다를게 없어보이기도 하지만, 그가 프랑스의 대규모 영지를 잃어버림으로서 잉글랜드 왕가는 대륙에 대한 영향력의 대부분을 상실하였고, 이는 후에 '백년전쟁'이라는 결과로 돌아오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이런 존은 형 리처드 1세의 인기에 의한 영향도 있어, 현대 영국에서는 가장 인기없는 잉글랜드의 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