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청나라시대 세 명의 황제를 세운 서태후 「예허나라 행정」

반응형

인물사진

말단 관리의 딸에서 황태후까지

'서태후'는 중국 청나라 시대인 1836년에 태어났는데, 성은 '예허나라'(葉赫那拉)로 추정되며 이름은 '행정'(杏貞) 또는 '행아'(杏兒)라고 전해진다. 불분명한 것은 이름뿐만이 아닌데, 서태후의 출신지가 안후이성 우후라는 이야기도 있고, 내몽골 자치구의 후허하오터, 산시성의 창치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그의 부친인 '예허나라 후이정'이 베이징에서 하급 관리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이징의 피차이 후통에서 태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그녀는 어려서는 꽤 유복한 생활을 하였던 것 같지만,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화병으로 사망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이 때문에 허드렛일을 하다가 당시 청나라의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으로 입궁하였다고 하며, 당시 태후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성질이 드세겠다며 난귀인으로 봉해졌다고 한다. 이후 함풍제에게 성은을 입고 의비가 되었다가, 1856년에 함풍제의 첫아들을 낳으면서 의귀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데만 신경을 쓰고 육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대신 아들이 없는 흔히 '동태후'로 불리는 '효정현황후'가 키웠다고 한다. 한편 이 해에 영국은 '애로호 사건'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켰고, 프랑스도 이에 동조하여 자국 선교사인 '오귀스트 샤프들랭'이 처형된 것을 빌미로 하여 참전하여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청나라는 이미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느라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었는데, 1858년에 한 번 '텐진 조약'을 맺어 화의 하려 했으나 너무 불평등한 조약 내용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베이징까지 쳐들어왔으며, 함풍제와 서태후를 포함한 황제 일가는 별궁인 '피서산장'으로 피난하였다. 결국 러시아의 중재로 '베이징 조약'을 맺어 화의 하였으나, 그사이 서양의 연합군은 원명원, 이화원 같은 황실 재산을 마음껏 약탈하였고,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남부와 북부의 영토도 할양해야 했다. 이후 함풍제는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고 피서산장에서 지냈으며, 외국 공사와의 접견 등을 거부하며 연회와 공연 감상 같은 것에만 열중하다가, 1861년에 3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고, 그와 서태후 사이에서 나은 하나뿐인 아들이 10세의 나이로 뒤를 이어 '동치제'가 되었다. 함풍제는 죽음을 앞두고 서태후의 야심을 걱정하여, 그녀가 조정에 개입하면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하는데, 서태후는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과 동태후의 협력을 얻어 '신유정변'을 일으켰고, 함풍제가 생전에 어린 동치제의 섭정을 맞긴 8명의 보정대신들을 숙청하고 황태후로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

본래라면 당시 황실에서 가장 위치가 높은 동태후가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문맹으로 정치에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이에 서태후가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동태후도 완전히 침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공친왕도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조정은 다소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러나 서양에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며 '양무 운동'을 통해 과학 기술과 군사 기술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서양의 지원을 받아 1868년에는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등 성과를 내어 이 시기를 '동치 중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점차 동치제가 자라면서 문제 발생했는데, 동치제는 자신에게 냉담하게 대하는 친모 서태후보다, 따뜻하게 감싸주는 동태후와 사이가 좋아, 황후를 간택할 때도 동태후가 추천한 후보를 선택했다고 한다. 게다가 친정을 하려는 동치제와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서태후 사이에서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동치제는 정무를 포기하고 유흥에만 관심을 두었다가 1875년 18세의 나이로 천연두로 인해 병사하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매일 밤마다 환관의 옷으로 변복하고 궁궐을 나가 유곽을 드나들었는데, 거기서 걸린 매독으로 인해 죽었다고도 한다. 이때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놓치게 될까 우려하여, 그의 장례도 치르기 전에 '순친왕'과 자신의 여동생의 아들인 조카를 양자로 삼아 새 황제로 즉위시켰다. 당시 동치제의 황후인 '효철의황후'는 동치제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서태후는 동치제의 죽음을 구실로 그녀를 유폐시켰으며, 결국 그녀는 서태후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금 조각을 삼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반응형

서태후의 조카 광서제

본래 황제가 죽으면 그다음 대가 뒤를 잇는 것이 보통이나, '광서제'가 동치제와 같은 대 임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된 것은 서태후가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태후의 자리에 있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서태후는 이를 위해 경쟁자가 될 수 있었던 효철의황후도 죽음으로 몰았으며, 심지어 광서제가 즉위할 당시에 그는 겨우 4살에 불과하였는데, 이는 서태후가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군림하기 위해서 가장 어린아이로 골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 더해 서태후는 광서제의 교육을 포함하여 사소한 부분까지 직접 챙겼다고 하는데, 이는 동치제 때의 실수를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돈독한 모자관계를 의도적으로 만들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또 1881년에는 동태후가 43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는데, 그녀는 계단에서 떨어져서 생긴 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하지만, 일각에서는 서태후가 독살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로서 서태후는 온전히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으며, 광서제의 황후와 후궁들까지 직접 고르는 등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광서제는 어디까지나 꼭두각시 황제에 불과하였으며, 서태후의 지휘아래 청나라는 황제의 위상을 다시 세운다는 명목으로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불타버린 이화원을 재건하거나, 외세에 맞서기 위해 북양함대를 증강하는 등의 일을 하였고, 1884년에는 베트남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었던 프랑스에 의해 '청불 전쟁'이 발발하기도 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여러 외세에 침탈당하는 중에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하였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제국화 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두 세력은 조선을 놓고 끊임없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4년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는데, 조선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각각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되었고, 일본은 이를 기회로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내정간섭을 시작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파견한 병력을 증강하여 이에 맞서려고 하였는데, 일본은 이미 파병한 군대의 숫자적 우위를 이용하여 청군을 포위하려고 하였으며, 청나라의 군함을 공격하여 '풍도 해전'을 일으키는 등 본격적으로 공세에 나섰다. 결국 얼마 뒤 '청일 전쟁'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으며, 곧 청나라 군대는 조선에서 축출되어 요동반도까지 밀려났고, '요동 전투'와 '위해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또 요동반도와 대만 일대의 섬들을 일본에 빼앗기게 되었고, 막대한 배상금 또한 지급해야 했는데, 특히 일본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이 청나라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변법자강운동과 의화단 운동

청일 전쟁의 패배로 청나라에서는 소극적인 근대화인 양무 운동이 힘을 잃게 되었고, 대신 더 적극적인 개혁 움직임이 일어나 '변법자강운동'이 시작되었다. 1898년 광서제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조하여 개혁을 시행하였지만, 서태후를 중심으로 하는 수구세력과의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개혁세력과 수구세력 모두 쿠데타를 기획하다가 개혁세력의 편을 들고 있던 '위안스카이'가 배신하면서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수구세력은 '무술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연금하고 개혁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으며, 결국 개혁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서 청나라 자체를 없애어야 한다는 혁명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다. 서태후는 이때 아예 광서제를 폐위시키고 새 황제를 세우려고 하였지만, '이홍장' 등의 많은 대신들의 만류와 서양 열강들의 압력을 받아 그만두었다고 한다. 변법자강운동이 실패한 것은 근본적으로는 실각할 것을 두려워한 서태후와 수구세력의 권력에 대한 집착에서 시작되었지만, 변법을 추진하던 개혁세력이 일본의 꾐에 넘어가 청나라의 주권을 일본과 미국, 영국에 넘기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외국에 의해 나라가 침탈되는 상황이 계속되자 민중들 사이에서 서양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였는데, 격화된 감정은 폭발하여 대대적인 폭동이 시작되었고, 선교사와 외교관, 상인 등의 외국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믿는 중국인 또한 같은 패거리로 취급하여 공격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를 '의화단 운동'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본래 반청세력이었지만, 계속되는 서양의 침탈에 반 서양 기운이 더 강해졌으며, 청나라 황실에서도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청나라는 이를 어디까지나 의화단의 소행으로 규정하며 발뺌하였지만, 서양 열강들은 이를 빌미로 베이징까지 쳐들어갔고, 결국 1901년 '신축조약'을 통해 서양의 청나라 침탈은 오히려 가속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때 서태후는 광서제가 협상을 빌미로 서양 세력과 손잡고 자신을 몰아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반 강제로 함께 서안까지 피난하였으며, 황제는 베이징에 있어야 된다며 이를 말리던 광서제의 황후를 우물에 빠뜨려 죽였다고도 한다. 결국 청나라는 한번 실패하였던 개혁을 다시 시작하였지만, 1908년에 광서제가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게 된다. 광서제는 당시 37세였는데, 조정에서는 계속 앓고 있었던 지병 때문에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독살당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떠돌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2008년에 진행된 조사에서 비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누가, 어떤 목적으로 독살하였는지에 대해서까지는 알 수 없다.

서태후의 죽음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시안에서 돌아온 서태후는 이때까지 와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연회를 열어 외국 공사의 부인들을 초청하는 등 상당히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한편 광서제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서태후는 다시 새 황제가 필요했는데, 광서제의 조카인 '부의'(푸이)를 황제로 세워 '선통제'로 즉위하였다. 당시 서태후는 이미 72세의 고령이었는데도 3세에 불과했던 선통제를 황제로 삼았는데, 이때까지도 아직 권력에 대한 집착을 포기 못 했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서태후는 선통제를 새 황제로 지명한 지 하루 만에 사망하였으며, 이때 다시는 자신처럼 여자들이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당시 서태후는 과식으로 인해 이질을 앓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암살설이 있기도 하다. 그녀의 사후 청나라도 오래가지 못했는데, 4년 후인 1912년에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