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춘추오패로 꼽히는 진나라의 목공 「영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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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진나라의 목공

'목공'의 이름은 '영임호'로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진()나라의 '덕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진나라는 중원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주나라의 서쪽 국경 역할을 하였으며, 지리적 위치상 주로 이민족인 '서융'과 경쟁하며 영토를 확장하다. 진나라는 중원의 다른 제후국들과는 풍습이 크게 달랐다고 하는데, 이를 토대로 생각해 보면 백성들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이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대다수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진나라는 초나라처럼 완전히 이민족으로 취급받지는 않은 것 같고, 어디까지나 주나라의 제후국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기원전 676년에 덕공이 사망하자 장남인 '선공'이 진나라의 군주가 되었으나, 기원전 664년 그는 공위에 오른 지 9년 만에 사망하여 동생인 차남 '성공'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660년에 성공도 공위에 오른 지 몇 년 안 되어 사망하면서 목공이 후계를 이어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백리해와 건숙

기원전 656년 목공은 진(晉)나라 '헌공'의 딸 '목희'와 혼인하였는데, 이듬해인 기원전 655년에 헌공은 결혼 예물로 진(晉)나라가 멸망시킨 우나라의 신하였던 '백리해'를 목공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 백리해는 재주는 뛰어났지만 몹시 운이 없는 인물로 집안이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제나라 사람인 '건숙'의 집에 얹혀살았다고 한다. 백리해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제나라에서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나섰는데 건숙이 나서서 뜯어말렸다고 한다. 당시 제나라는 '공손무지'가 반란을 일으켜 '양공'을 죽이고 공위를 찬탈했던 시기였는데, 얼마 안 가 공손무지가 죽고 '환공'이 다시 군주가 되었다. 만약 이때 백리해가 그대로 벼슬을 하겠다고 나섰다면, 공손무지의 잔당 취급을 받아 신세를 망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백리해는 다시 주나라로 가서 벼슬을 할 생각을 하였는데, 이번에도 건숙이 나서 그를 만류했다고 한다. 이때 주나라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시기로 '혜왕'의 숙부인 왕자 '희퇴'가 혜왕을 몰아내고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희퇴는 민심을 얻지 못했고, 곧 정나라의 '여공'이 군대를 일으켜 그를 처단하고 혜왕을 다시 복위시켰다. 이번에도 백리해가 벼슬에 나섰더라면, 잘못하면 역모로 몰려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난한 백리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던 것이기도 했는데, 그가 제나라나 주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벼슬에 나서려고 한 것은, 그만큼 혼란한 상황이 아니면 쉽게 벼슬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이나 연줄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백리해는 고향인 우나라로 돌아가 벼슬에 나섰는데, 이때도 건숙이 백리해를 말렸지만, 가난한 백리해에게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건숙의 염려대로 우나라도 얼마 안 가 진(晉)나라에 의해 멸망하였고, 백리해는 70세의 고령으로 결혼 예물로 보내지는 굴욕을 겪게 된 것이다.

오고대부

백리해는 진나라로 보내지던 도중에 도망쳐 초나라로 향했는데, 그는 운이 없는 만큼 사람 보는 눈도 부족했던 것 같다. 사실 목공은 신하 '공손지'에게 백리해가 인재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를 중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래 진나라는 가축을 키우는 재주를 인정받아 주나라 왕실로부터 영지를 하사 받아 시작된 나라였는데, 백리해도 가축을 키우는 재주가 비범하였다고 하니 목공이 관심을 가질만하다. 그러나 백리해는 이 사실을 몰랐던 것 같은데, 그는 결혼 예물로 보내지는 자신의 처지에 비관하여 초나라로 도망쳤고, 거기서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아서 하고 있었다. 목공은 백리해를 데려오기 위해 초나라 왕실에 선물을 보내려고 하였는데, 이때 공손지가 적은 선물만을 보내도록 조언하였다. 공손지는 초나라의 왕이 아직 백리해의 진가를 몰라 하찮은 일만 시키고 있는데, 여기에 많은 선물을 보내 그를 요구한다면 의심만 사게 될 것이라고 하였고, 목공은 이에 따라 초나라의 왕에게 검은 염소의 가죽 다섯장(오고양피)을 보내 도망친 백리해를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백리해는 진나라로 끌려오게 되었는데, 목공은 백리해를 중용하여 대부의 자리를 주고 국정을 맡겼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백리해는 '오고대부'로 불리기도 한다. 또 백리해는 인재를 찾는 목공에게 자신과 건숙의 일화를 들려주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목공은 건숙도 데려와 신하로 삼았다. 이처럼 목공이 널리 인재를 모았기 때문에, 그의 치세동안 진나라는 융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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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 혜공과의 불화

기원전 651년 헌공이 사망하자 진(晉)나라에서 후계자 자리를 놓고 혼란이 생겼는데, 목공은 이를 바로잡고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진(晉)나라에 개입하기로 하였고, 처음에는 적자인 '문공'을 세우려고 하였지만, 그가 거절하였기 때문에 문공의 동생 '혜공'을 군주로 세웠다. 이 과정에서 혜공은 목공에게 성 5개를 넘겨주기로 하였는데, 그는 군주의 자리에 오르자 이 약속을 무시하였지만, 그럼에도 목공은 별다른 질책을 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고 한다. 혜공은 즉위하자마자부터 문제를 일으켰지만 기원전 648년에 진(晉)나라 흉년이 들자 뻔뻔하게 목공에게 원조를 요청하였고, 이에 진나라의 신하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혜공을 지원하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목공은 백성들에게는 죄가 없다며 양식을 원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646년에 진나라에 기근이 들어 원조를 요청하자, 혜공은 양식을 보내주기는 커녕 이 틈을 타 진나라를 쳐들어갈 생각을 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645년에 벌어진 '한원 전투'에서 목공은 진(晉)나라 군대에 포위당하여 위기에 처했는데, 이때 어디선가 나타난 300명의 군사들이 목공을 구했다고 한다. 이 300명의 병사들은 목공에게 은혜를 입은 이들로 과거 목공이 잃어버린 명마를 잡아먹었다가 발각된 일이 있었다. 이때 관리는 이들을 모두 처형하자고 주장했는데, 목공은 짐승 때문에 사람을 해칠 수 없다며 이들을 처벌하기는커녕 고기와 곁들여 먹으라고 술까지 내렸다고 한다. 목공이 베푼 은혜가 다시 되돌아와 그를 살린 격이다. 이후 진나라의 군대는 반격에 성공하여 혜공을 사로잡았지만, 혜공의 누나인 아내 목희의 간청으로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고, 대신 혜공의 태자 '희어'를 인질로 진나라로 데려와 자신의 딸과 혼인시켰으며, 이전에 약속한 5개의 성도 받아내었다. 그러나 혜공과의 문제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는데, 기원전 638년에 혜공이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희어는 몰래 빠져나가 진(晉)나라로 도망쳤다. 희어는 이듬해인 기원전 637년에 진(晉)나라의 군주의 자리에 올라 '회공'이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이 군주가 되지 못할까 봐 목공을 의심하여 목공의 딸을 내팽개치고 귀국한 꼴이 되었다. 이에 대노한 목공은 전국을 유랑하다 당시 초나라에 있던 문공을 진(晉)나라의 군주로 세우기로 하였다. 기원전 636년 진나라의 군대와 함께 돌아온 문공이 진(晉)나라의 군주가 되었으며, 인심을 잃은 회공은 도주하였다가 문공이 보낸 자객에게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서융 정벌

기원전 635년 목공은 문공과 함께 반란으로 쫓겨났던 주나라의 양왕이 복위하는 것을 도왔다.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문공은 사망할 때까지 8년여간의 짧은 치세에도 불구하고 '춘추오패' 중에 한 명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기원전 626년 문공은 정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정나라는 진(晉)나라 너머에 있어 먼 거리 때문에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목공은 백리해의 아들 '백리시'와 건숙의 아들 '건술'과 '건병'에게 병사를 주어 보냈는데, 이들은 정나라의 계책에 빠져 진(晉)나라의 속국을 공격했다가 큰 피해만 입고 돌아오게 된다. 진(晉)나라에서는 이들 세명을 처형하려고 하였다가, 목공이 벌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냥 돌려보냈는데, 목공은 오히려 소복을 입고 교외까지 이들을 마중 나갔으며, 자신이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된 것이라며 이전보다 더 후하게 대했다고 한다. 기원전 624년에는 서융에서 '유여'라는 자가 사신으로 진나라를 방문하였는데, 목공이 위엄을 세우기 위해 진나라의 화려한 궁궐을 보여주자, 유여는 이 궁궐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고생했을 것이라며 한탄하였다고 한다. 이에 유여가 인재임을 알아본 목공은 그를 손에 넣기 위해 계책을 세웠는데, 먼저 유여가 서융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시간을 끌면서, 서융의 왕에게는 16명의 미녀를 보냈다고 한다. 후에 유여가 가까스로 서융에 돌아왔을 때, 서융의 왕은 진나라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그를 의심하였으며, 미녀들에게 빠져 정사를 내팽개쳤다고 한다. 여기에 목공의 신하가 유여를 찾아가 설득하였고, 결국 유여는 진나라로 와서 서융을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진나라는 이전에 주나라의 '평왕'으로부터 서융의 12개 땅을 하사 받았었는데, 이때 서융을 평정하면서 그 땅을 실제로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622년에 목공은 다시 백리시 등에게 군대를 주어 진(晉)나라를 치게 하였고, 이들은 강을 건넌 후 돌아갈 배를 불태워버리는 등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후 진(晉)나라의 군대는 진나라의 군대의 사기에 눌려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진나라는 승리하여 과거의 패배를 설욕할 수 있었다.

순장

기원전 621년에 목공은 사망하였는데, 이때 목공의 아들 '강공'이 177명이나 되는 이들을 순장시켰다고 한다. 그중에는 '자거씨'의 세 아들 '엄식', '중항', '겸호'도 있는데, 이들은 매우 어질고 뛰어나며 덕이 높아 '삼량'이라고도 불렸다. 이 때문에 많은 백성들에게 원망을 사기도 했다고 하며, 이렇게 많은 인재들이 사라지게 되면서 이후 진나라의 국력이 크게 저하되었다고 한다. 인재를 아끼고 존중하여 진나라를 크게 키운 목공은 춘추오패의 한 명으로 꼽히기도 하지만, 그의 치세가 다른 춘추오패인 문공과 시기적으로 겹치기도 하고, 마지막에 순장으로 인해 오히려 국력을 크게 쇠퇴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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