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오자병법을 지은 뛰어난 병법가 「오기」
- 역사
- 2023. 9. 20.
고향을 등진 오기
'오기'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위(衛)나라 사람으로, 그 출신이 명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본래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고 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강단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하루는 자기보다 훨씬 센 건달과 시비가 붙어 두들겨 맞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오기는 다음날 다시 그 건달을 찾아가 시비를 걸었고, 또 두들겨 맞고 나서도 계속 그를 찾아다니면서 덤벼들었는데, 결국에는 오기의 집념에 진 건달이 싸움에서 일부로 져주었다고 한다. 이렇듯 오기는 심지가 굳고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그는 벼슬을 얻어 출세하기 위해 여러 명망 있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는데, 실속은 얻지 못하고 집안의 재산만 날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는데, 오기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신을 비웃은 30여 명의 사람들을 살해하였고, 죄를 피하기 위해 나라를 떠나면서 어머니에게 재상이 되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후 오기는 노나라로 건너가 공자의 제자로 유명한 '증삼'의 아들인 '증신'의 휘하에서 유학을 공부하였다고 하는데, 도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오기가 맹세를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효를 중시했던 증신의 눈 밖에 나서 더 이상 유교에 대한 공부를 이어나갈 수 없었고, 이에 진로를 바꿔 병법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다른 이야기도 있는데, 본래 오기는 법을 중시하는 태도를 가져 이를 토대로 관직에 진출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내가 띠를 짜왔는데, 그 폭이 법으로 정해진 치수에 맞지 않아 다시 짜오도록 시켰다. 그러나 아내가 고쳐온 띠도 여전히 치수가 맞지 않았고, 이에 오기가 화를 내자 아내는 이미 그 정도의 치수에 맞는 날실을 넣었기 때문에 고칠 수 없다고 항변했다고 하는데, 오기는 이런 아내와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혼해 버렸다. 그런데 아내의 동생은 위나라 군주의 신임을 받는 신하였고, 그는 군주의 힘을 빌어 오기와 아내를 재결합시키려고 시도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오기는 위나라에 실망하여 그대로 나라를 떠났다고 하는데, 둘 중 어느 이야기가 진짜 오기의 이야기인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노나라의 오기
오기는 배운 병법을 바탕으로 노나라의 관직에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이 시기에 제나라가 노나라를 쳐들어왔다고 한다. 이때 노나라의 군주와 신하들은 병법에 능한 오기에게 지휘를 맡기려고 하였고, 오기도 내심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막상 정식으로 오기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지 않고 계속 주저하였다고 한다. 당시 오기의 아내는 제나라 사람이었는데, 노나라 조정에서는 이 때문에 오기가 진심으로 제나라와 싸우지 않을 것을 우려하고 있었고, 이에 오기는 주저 없이 아내를 죽이고 장군이 되어 제나라와의 싸움에 임했다고 한다. 또는 아내를 그냥 제나라로 돌려보냈다고도 하는데, 어찌 되었건 오기는 노나라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오기가 아내가 제나라 사람인 것을 이용하여 협상을 제의한 후에 제나라 군대를 기습하여 승리를 거둔 것을 빌미로 비난당하게 되었고, 일부에서는 오기가 고향에서 저지른 범죄를 이유로 그를 추방해야 한다고 간언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당시 노나라에서 쿠데타로 노나라의 군주가 시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오기가 노나라를 떠났다고도 하는데, 오기가 노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시기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어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위나라의 오기
노나라를 떠난 오기는 위(魏)나라로 향하였는데, 당시 위(魏)나라의 군주는 '문후'로 위(魏)나라의 전성기를 만들어낸 인물로, 오기는 그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벼슬을 하기 위해 찾아갔다. 이때 문후는 오기를 시험하기 위해 짐짓 전쟁에 관심이 없는 척을 하였는데, 오기는 오는 길에 이미 갑옷과 병장기를 만드는 것을 보았다며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고 한다. 이에 문후는 재상인 '이회'(이극)에게 오기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오기가 명성과 여자에 대한 욕심이 있지만 '사마양저'보다 용병술이 뛰어나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후 문후는 오기를 대장으로 삼아 진나라를 공격하게 하였으며, 그가 진나라로부터 빼앗은 성 5개를 하서군으로 만들고, 그를 하서군수로 삼아 관리하도록 하였다. 오기는 위나라에서 '무졸'이라는 정예병사들을 양성하였는데, 이들은 기존의 소집병들과 다른 일종의 직업 군인으로 혹독한 훈련과정을 통해 단련되었으며, 그만큼 대단한 혜택을 받아 무졸의 병사가 되면 노비 출신인자는 평민이 될 수 있고, 평민이었던 자는 부자나 귀족이 된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 오기는 지휘관이면서도 항상 병사들과 함께하였는데, 늘 일반 병사들과 같은 것을 먹고 마셨으며, 행군을 할 때에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짐을 진채 병사들과 함께 걸었다고 한다. 한 번은 한 병사의 등에 종기가 나자 오기가 고름을 입으로 빨아 짜내어주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그 병사의 어머니가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이 그녀에게 장군이 직접 아들을 챙겨주었는데 어째서 울고 있냐고 묻자, 그녀가 말하기를 그 병사의 아버지도 오기가 종기를 빨아내준 적이 있는데, 이후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기를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는 것이다. 이 일화에서 '연저지인'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는데, 이처럼 오기는 일선에서 병사들과 함께하는 리더십으로 부대를 이끌었으며, 청렴하고 공정하였기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진심으로 따랐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오기는 76회의 전투를 치르면서 그중 64번을 승리하였으며, 나머지 12회도 무승부에 그치는 등 무패를 자랑하였다. 기원전 396년에 문후가 사망하고 '무후'가 그 뒤를 이었는데, 오기는 무후에게도 조언을 계속하였고, 그가 쓴 '오자병법' 중 현재 전해지는 내용도 문후와 무후와의 사이에서 대화한 것이 주된 내용이다. 또 기원전 389년에는 '음진 전투'에서 5만의 병사를 데리고 진나라의 50만 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어 진나라가 하서지역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기도 하였으며, 기원전 378년에는 조나라, 한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여 제나라 첫 수도였던 '영구'까지 진격했다고 한다. 군주가 된 문후는 '전자방'의 아들 '전문'을 재상으로 삼았는데, 큰 공을 많이 쌓았던 오기가 불만을 품고 전문을 찾아가 따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 오기는 처음에는 하서지역을 장악하고, 군사를 잘 부리며, 한나라와 조나라 등을 따르게 만든 자신의 공을 내세웠는데, 전문이 문후가 군주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백성들과 신하들을 문후와의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이 중요하여 자신이 재상이 됐다고 하자 금세 납득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전문이 죽고 '공숙좌'가 다음 재상이 되었는데, 공숙좌는 오기를 싫어하여 그를 축출할 음모를 꾸몄고, 먼저 무후를 찾아가서 오기의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해 위(魏)나라의 공주와 혼인시켜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다시 공숙좌는 집으로 돌아와 오기를 초대하였는데, 이때 일부로 위(魏)나라의 공주 출신인 자신의 부인을 자극하여 추태를 보여줘 오기에게 선입관을 심어주었다. 결국 오기는 무후의 혼인 제안을 거절하였고, 이에 의심을 품은 무후는 오기를 하서 군수에서 해임하여 중앙으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오기는 하서지역을 떠나면서 얼마 안 가 진나라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이는 이후 진나라의 재상이 된 '상앙'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초나라의 오기
위(魏)나라에서 실각한 오기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다시 초나라로 향했는데, 초나라의 '도왕'은 오기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오기는 초나라에서 드디어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오기가 초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재상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고 1년간 다른 직책에서 실무를 보았다고 한다. 오기는 초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도왕에게 진언하여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먼저 정부를 개혁하여 불필요한 관직을 없애는 등 효율적으로 개선하였고, 이름뿐인 왕족과 귀족들의 특권을 폐지하여 불필요한 지출을 줄였다. 또 높은 신분의 사람들을 먼저 불모지로 보내 개척하도록 하는 등 적극적으로 국토를 개발하였고, 성벽 쌓는 방식을 효율적으로 개선하여 아예 법으로 제정해 버리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강한 군대를 육성한 오기는 남쪽으로는 '백월'을 평정하였고, 북쪽의 진나라와 채나라를 병합하여 조나라와 한나라, 위(魏)나라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서쪽의 진나라를 정벌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최후의 병법
오기는 초나라의 재상으로 자신의 유능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지만, 대대적인 개혁으로 피해를 본 기득권층들은 그에게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기원전 381년에 오기를 총애하던 도왕이 사망하자, 초나라의 기득권층들이 오기를 죽이기 위해 들고일어났다고 한다. 당시는 아직 도왕의 상 중이었는데, 많은 이들이 무장을 하고 찾아가 포위하고는 그중 한 명이 오기를 활로 쏘아 맞추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오기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것 같은데, 그러나 그는 굴복하지 않고 너희들에게 나의 용병을 보여주겠다고 외친 후에 화살을 맞은 채로 안쪽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그들은 오기를 향해 수십 발의 화살을 쏘았는데, 그 순간 오기는 도왕이 시신 위에 엎드렸고, 그렇게 오기는 도왕의 시신 위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오기는 최후를 피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 복수를 계획했는데, 당시 초나라에는 과거 '오자서'가 '평왕'의 시신을 '굴묘편시'한 일로 왕의 시신을 해한 자를 크게 처벌하는 법이 있었다. 이후 왕위를 계승한 '숙왕'이 나서서 이들을 처벌하였는데, 초나라의 귀족 가문 중 70여 집안이 이 일에 연루되어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한다. 오기는 자기 자신에 대한 복수를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후 초나라는 오기의 정책을 모두 폐지하였고, 결국 몰락하여 진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