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13대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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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사진

가난한 어린 시절

'밀러드 필모어'는 1800년 미국의 뉴욕 주 북부에 있는 핑거 레이크 지역에서 태어났다. 필모어 집안은 처음에는 코네티컷 주에 정착했던 것 같은데, 이후 그의 아버지대에 버몬트 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뉴욕 주로 옮겨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뉴욕 주로 이주하면서 구매한 토지의 소유권에 문제가 있어 상실하였고, 그 때문에 필모어의 유년기에 상당히 가난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필모어의 아버지는 소작농으로 다른 사람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고, 때때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필모어는 이러한 가난 때문에 14세에 군에 입대하려고 하였던 것 같은데, 그의 아버지는 필모어를 설득하여, 뉴욕 주 스파르타에 있던 재단사 밑에서 기술을 배우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필모어는 거기에서 별다른 기술을 배울 수 없자 금방 그만두었고, 다시 뉴호프로 옮겨 다른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고, 1819년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학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필모어의 가족은 모라비아의 몬트빌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서 그는 지역 판사였던 '월터 우드' 밑에서 서기로 일하면서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다시 버팔로 인근의 이스트 오로라로 이동하였고, 필모어는 여기서 인근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변호사 면허가 필요 없는 법정에서 몇 가지 사건을 수임하기도 했다. 그는 버팔로에서 법률 공부를 계속하여, 1823년에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고, 이스트 오로라에서 법률 사무소를 개설하였다.

정치 입문

필모어의 아버지는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지역 공헌이나 정치에 관심이 많았는데, 필모어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필모어는 1828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하는 '존 퀸시 애덤스'를 지지하였는데, 그를 지지하는 정치활동을 하다 지역 출판업자인 '설로우 위드'와 알게 되었고, 이후 위드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뉴욕 주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필모어는 임기동안 정치가와 변호사의 업무를 병행하였고, 버팔로를 도시로 승격시키는 절차를 돕는 등 지역 공헌 활동도 이어갔다. 1832년에는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필모어는 새로 결성된 휘그당에 합류하였다. 그는 오랜 기간 하원의원 생활을 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굳혔지만, 전반기에는 민주당의 '앤드루 잭슨'과 '마틴 밴 뷰런' 정부와 맞서야 했으며, 후에는 같은 당 출신의 '존 타일러'가 방해물이 되었고, 타일러는 결국 휘그당에서 제명되었다. 이후 필모어는 1843년에 재선을 포기하고 버팔로로 돌아왔으며, 1844년에는 뉴욕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후 한동안 생업인 변호사 업무에 집중했으며, 버팔로 대학교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여, 1846년에 버팔로 대학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이즈음 뉴욕 주의 감사원장 자리가 선출직으로 바뀌었는데, 필모어는 휘그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1848년에 그 임기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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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으로 출마

1848년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휘그당은 '미국-멕시코 전쟁'의 영웅으로 명성을 날린 '재커리 테일러'를 후보로 지명하였고, 필모어는 그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출마하였다. 당시에는 이미 노예제를 둘러싸고 북부주와 남부주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었는데, 민주당이 밴 뷰런이 세운 자유토지당과 갈라진 사이에, 휘그당은 테일러의 명성을 등에 업고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부통령들은 대체로 별달리 할 일이 있지는 않았지만 필모어는 바쁘게 움직여야 했는데, 순수 군인 출신이었던 테일러가 정치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이 부족했기 때문에, 휘그당 내에서는 새 내각을 구성하는 것부터 개입하였다. 또 텍사스 등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얻은 새로운 영토에 노예제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가 정국의 가장 큰 화두이기도 했다. 이 점에 있어서 테일러와 필모어는 아이러니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개인적으로는 노예제에 대한 찬반이 엇갈렸지만, 그것에 대해 연방 정부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공통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휘그당의 '헨리 클레이'는 소위 '1850년 타협'이라고 불리는 중재안을 내놓았는데, 이 타협안은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하고, 이후 유타 준주와 뉴멕시코 준주의 노예제는 각 주에서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대신 노예주를 설득하기 위해 '도망노예법'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필모어는 이 타협안에 찬성하였지만 테일러는 반대하였다고 하는데, 이 해의 독립기념일이 지나고 얼마 안 되어 테일러가 급사하면서 필모어는 대통령이 되었고, 1850년의 타협안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이 타협안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였는데, 실제로 이후 자유주들에서 이 도망노예법을 무효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북부주와 남부주의 갈등이 극에 달했고, 결국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재선 도전과 사망

필모어는 연방 정부가 기반 시설을 개발하는 것에 호의적이었고,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동안 '일리노이 중앙선'이나 '이리 철도'가 개설되기도 했으며, 그는 1851년 많은 고위 인사들과 함께 뉴욕에서 이리 호수까지 가는 첫 번째 열차에 탑승하기도 하였다. 또 태평양 지역에 보급항을 확보할 목적으로 일본으로 '매슈 캘브레이드 페리' 제독이 이끄는 원정대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하와이 왕국'에 대한 프랑스의 야욕을 저지하기도 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하와이 왕국은 이후에 미국 출신 이민자들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텍사스와 비슷한 절차를 거쳐 미국에 합병되게 된다. 1852년에 진행된 선거에서 휘그당은 당대 화두였던 노예제 문제로 분열되기 시작하였으며, 적절한 대안 없이 테일러에 이어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명성을 얻은 '윈필드 스콧'을 후보로 내세웠다가 참패하였다. 이후 휘그당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민주당에 맞서기 위해 새로 공화당이 생겼지만, 필모어는 여기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는 퇴임 후 한동안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법무 업무에 집중하였고, 1856년의 대통령 선거에는 민주당에도, 공화당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모아 미국당을 결성하여 출마하였지만 패배하여 낙선하였다. 이후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연방대륙군'을 조직하는 등 연방을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에이브러햄 링컨'의 정책에는 반대하였기 때문에 빈축을 사기도 하였고, 이러한 행동으로 현대에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1874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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