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영국 얼굴이 붉은 왕 「윌리엄 2세」
- 역사
- 2023. 8. 11.
얼굴이 붉은 왕
'윌리엄 2세'는 1060년경 노르망디의 공작인 정복왕 '윌리엄 1세'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1세는 노르망디의 공작으로 시작하여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왕이 되었지만,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양쪽 모두를 직접 통치하였다. 그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의 왕 '필리프 1세'는 윌리엄 1세의 장남 '로베르 커토즈'를 부추겨 아버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는데, 로베르는 아버지가 이미 잉글랜드의 왕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당장 노르망디의 공작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로베르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윌리엄 1세는 자신의 사후에 노르망디의 공작위를 물려줄 것을 약속하여 아들을 회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차남인 '리처드'는 일찍 사망하였기 때문에, 1087년에 윌리엄 1세가 죽자, 윌리엄 2세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사실 단순한 지위로 따지면 공작보다 왕이 높기 때문에, 장남인 로베르가 노르망디가 아닌 잉글랜드를 이어받아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당시 노르만족의 시선에서 생각해 보자면 노르망디는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문명화된 지역이고, 잉글랜드는 아직 불완전한 지배상태라는 것을 고려해 보면, 납득하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윌리엄 2세는 정식으로 잉글랜드를 통치하게 되었고, 그의 얼굴이 붉은빛을 띠었기 때문에 얼굴이 붉은 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그는 금발에 다소 뚱뚱한 체구로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는데, 이 때문에 후에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고 한다.
노르망디 침공
결과적으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가 분리되어, 각각의 영지는 서로 다른 지배자를 섬기게 되었지만, 당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귀족들은 특성상 양쪽에 모두 영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상당히 불편하게 생각하였다. 결국 1088년 윌리엄 1세의 이복동생인 '오도'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윌리엄 2세를 몰아내고 로베르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세우려고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에 윌리엄 2세는 아직 잉글랜드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로베르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는 로베르가 잉글랜드로 건너오기 전에 잉글랜드의 귀족들을 회유하였고, 이를 토대로 나머지 반란자들을 진압하여 잉글랜드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1091년에는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노르망디로 쳐들어가기도 했지만, 도중에 로베르와 화해하였고, 공동전선을 만들어 프랑스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또 이 해에 스코틀랜드의 왕 '말 콜룸 막 돈카다'가 쳐들어왔다가 격퇴되었다. 이듬해와 그 이듬해에도 말 콜룸이 계속 쳐들어왔지만, 1093년에 노섬브리아의 백작 '로버트 드 모브레이'의 매복에 당해 '앨른위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후 스코틀랜드에서 왕위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자, 윌리엄 2세도 스코틀랜드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개입하였다고 한다. 말 콜룸 사후 스코틀랜드의 왕위는 동생 '돔날 막 돈카다'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에 말 콜룸의 아들들이 도전하였고, 그 과정에서 1095년 모브레이가 윌리엄 2세에게 반기를 들고 돔날의 왕위를 지지하기도 하였다. 이 반란은 진압되었고, 1097년에 말 콜룸의 네 번째 아들이었던 '에드가르 막 밀 콜룸'이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에드가르는 윌리엄 2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윌리엄 2세의 스코틀랜드에 대한 영향력도 늘어났지만, 에드가르가 윌리엄 2세의 신하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담이지만 말 콜룸과 돔날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에 등장하는 던컨 왕의 아들 '맬컴'과 '도널베인'의 모델이라고 한다.
교회와의 분쟁
윌리엄 2세는 1089년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사망하였는데도 후임자를 뽑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으며, 그동안 교회에서 발생한 수입을 자신이 챙겼다. 그러나 1093년 큰 병에 걸리자 부랴부랴 유명한 신학자였던 '앤설름'을 새 대주교로 임명하게 되었는데, 그 사이 공백기간으로 인해 교회와 윌리엄 2세 사이에는 큰 골이 생겼고, 그로 인해 앤설름도 사사건건 윌리엄 2세와 충돌하였다. 결국 화가 난 윌리엄 2세는 1097년 앤설름을 추방하였고, 앤설름은 로마의 교황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는데, 당시 교황인 '우르반 2세'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대립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윌리엄 2세가 우르반 2세를 교황으로 인정하는 대신, 우르반 2세도 잉글랜드의 교회 상황을 인정한다는 협상을 맺었다. 잉글랜드에서 교황의 권위가 약했던 것은 이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096년 로베르가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 위해 나섰을 때, 윌리엄 2세가 재정지원을 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 대가로 로베르가 부재중인 동안 윌리엄 2세가 노르망디를 맡아 관리하였다.
갑작스러운 죽음
1100년 윌리엄 2세는 브로켄허스트 근처의 뉴포레스트에서 사냥을 하던 도중 화살에 맞아 낙마하여 사망하였다. 이 사냥에는 그의 동생 '헨리 1세'와 여러 귀족들이 같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왕의 죽음을 알게 되었는데도 시체를 그대로 두고 모두 돌아가버렸다고 한다. 헨리 1세는 즉시 윈체스터로 왕실의 재산을 확보하였고, 다시 런던으로 향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열어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였다. 윌리엄 2세는 평소 거친 행동과 폭정을 저질렀으며, 로베르의 십자군 원정에 재정을 지원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물리기도 하였기 때문에 인기가 없었다고 하는데, 그의 죽음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 화살을 누가 쐈는지, 어디서 날아왔는지 같은 내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사후 동행했던 헨리 1세나 귀족들의 행동에 비추어 암살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그 진실에 대해 알 수는 없지만, 당시 로베르가 십자군 원정으로 멀리 떠나 있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왕이 사망한 것이기 때문에, 헨리 1세의 입장에서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빠르게 정권수습을 할 필요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윌리엄 2세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헨리 1세의 독단적인 왕위 계승문제로 이후 원정에서 돌아온 로베르와 갈등을 겪게 된다. 여담이지만 영국의 뉴포레스트 국립공원에 잇는 민스테드 마을 인근에는 '루퍼스 스톤'이라는 기념석이 있는데, 이 돌이 있는 위치가 바로 윌리엄 2세가 쓰러져 사망한 자리라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