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영국 노르만 왕조를 연 정복왕 「윌리엄 1세」
- 역사
- 2023. 8. 9.
노르망디의 공작
'윌리엄 1세'는 1028년경 노르망디 공작인 악마공 '로베르 1세'와 평민인 '에를르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인 에를르바는 무두장이의 딸로 추정되는데, 아마 공작의 저택에서 일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찌 되었든 윌리엄 1세는 공작과 정식 혼인사이가 아닌 평민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생아왕'이라는 별명으로 계속 고통받기도 했다. 그러나 윌리엄 1세는 로베르 1세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는데, 이는 달리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아들이 없었던 탓으로, 1035년에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던 로베르 1세가 귀환 도중에 사망하면서, 8세의 나이로 공작위를 계승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윌리엄 1세는 로베르 1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며, 그의 부하들에게도 충성서약을 받았는데, 동양에서는 이 정도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면 문제없이 지휘를 계승할 수 있었겠지만, 중세의 서양에서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윌리엄 1세는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앙리 1세'와 '로베르' 대주교의 도움을 받아 공작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경쟁자들로부터 계속해서 견제받았다. 윌리엄 1세는 어린 나이에 사생아였기 때문에 쉬운 상대였고, 그만 없어지면 계승권을 내세울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였고, 15세에는 기사로 인정받았으며, 19세에 반란을 진압하는 등 점차 공작으로서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잉글랜드 침공
성장한 윌리엄 1세는 자신의 영지인 노르망디 공국의 혼란을 잠재우고 안정시킬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후원자였던 앙리 1세가 적으로 돌아섰다. 앙리 1세는 윌리엄 1세에게 위험을 느꼈고, 1054년과 1056년에 두 차례에 걸쳐 노르망디를 침공했으나 실패하기도 하였다. 사실 앙리 1세의 입장에서는 노르망디 공국이 혼란스러운 상태로 있는 편이 좋았기 때문에 어린 사생아를 지지하였을 수도 있는데, 막상 성장하고 나서보니 호랑이 새끼를 키운 꼴로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윌리엄 1세는 프랑스 왕국보다는 다른 데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 같은데, 당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던 잉글랜드가 바로 옆에 있던 것이다. 당시 잉글랜드는 '앵글로색슨족'과 '데인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이 잉글랜드의 지배권을 두고 긴 싸움을 벌이면서 왕권에 대한 권리가 상당히 복잡하게 얽힌 데다가, 선왕인 '참회왕 에드워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처남인 '헤럴드 2세'가 사실상 정통성 없이 왕위를 계승한 상태였다. 물론 이는 혈연적 연결성에 대한 문제 일뿐, 헤럴드 2세는 에드워드가 사망할 때 자신에게 왕위를 넘겼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당시 잉글랜드에서 행해지던 일종의 귀족회의 역할을 하던 '위테나예모트'를 통해 정식으로 왕으로 승인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런 부족한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왕권에 도전한 것이 바로 에드워드의 외가 쪽 친척인 윌리엄 1세였다. 물론 윌리엄 1세도 직접적으로 혈연관계를 내세우기에는 상당히 빈약한 명분이었기 때문에, 에드워드가 사망하기 전에 자신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주장을 하였다. 또 여기에 끼어든 제삼자가 있었는데, 헤럴드 2세의 동생이자, 헤럴드 2세에 의해 잉글랜드에서 축출되었던 '토스티그'가 노르웨이의 왕 '하랄 3세'의 협력을 받아 잉글랜드로 침공하였다. 이때 윌리엄 1세는 한창 잉글랜드로 넘어가기 위해 병력을 모으고 함대를 준비하였는데, 마침 역풍이 불었기 때문에 대기하는 중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랄 3세가 먼저 잉글랜드로 쳐들어갔으나,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패배하여 하랄 3세와 토스티그 모두 전사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이때 바람의 방향이 바뀐 덕분에 윌리엄 1세의 군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잉글랜드에 상륙할 수 있었다. 이후 윌리엄 1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이 전투에서 헤럴드 2세가 사망하였으며,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열어 그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노르만 콘퀘스트
잉글랜드는 본래 '브리튼인'들이 살던 곳이었지만, 고대 로마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후부터 조금씩 문명화되었고,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게르만족의 하나인 앵글로색슨족이 침략하여 영토로 삼고 있었던 땅이다. 이후 데인족 바이킹의 침입으로 점점 데인족 정착지의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하였으며, 에드워드의 집권기 때부터 조금씩 노르만족 귀족들이 대륙에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066년 노르만족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노르만족 귀족의 유입이 가속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윌리엄 1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잉글랜드 귀족들의 영지를 빼앗아 휘하의 노르만 귀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잉글랜드는 본래도 앵글로색슨족과 데인족 사이의 분쟁뿐만 아니라 북쪽의 스코틀랜드와의 문제도 있었는데, 여기에 갑자기 굴러온 돌인 윌리엄 1세가 왕위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상당한 반발이 있었을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윌리엄 1세를 견제하기 위한 대륙 세력들의 간섭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든 잉글랜드 각지에서 반란이 계속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윌리엄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진압하였고, 그 과정에서 소위 '북부 약탈'이라고 불리는 학살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빼앗은 영토는 노르만 귀족들의 차지가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배계층이 노르만족으로 교체되었는데, 윌리엄 1세가 1086년에 왕국의 토지를 조사하게 하여 만들어진 문건인 '둠스데이 북'에 의하면 당시 앵글로색슨족 귀족은 단 2명밖에 남지 않았으며, 나머지 4,000여 명은 모두 토지를 몰수당하였다고 한다. 또 이는 종교적인 부분도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의 주교들은 모두 노르만족 혹은 그 외의 대륙계통으로 교체되었다. 여기에 더해 노르만족은 프랑스 출신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프랑스어 밖에 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윌리엄 1세도 영어는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행정적인 부분은 잉글랜드의 전통적인 부분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는데,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완전히 분리하여 생각하였으며 통치하였다. 잉글랜드를 통치할 때는 잉글랜드의 왕으로 있었으며, 노르망디 공국에서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왕의 신하로서 계속 행동하였다. 또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행정체계도 서로 다른 상태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심지어 화폐도 계속해서 본래 사용하던 화폐를 계속사용하였다. 물론 이 시기 노르만족의 유입으로 잉글랜드에 당시 프랑스 문화가 유입되기는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잉글랜드의 독자적인 변화로 잉글랜드가 노르망디에 통합되지도 않았으며, 어느 정도 잉글랜드의 전통적인 통치방식도 존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윌리엄 포위망
윌리엄 1세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왕의 신하로 노르망디 공작이었지만, 동시에 잉글랜드의 왕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새로 프랑스의 왕이 된 '필리프 1세'도 그를 견제할 수밖에 없었는데, 윌리엄 1세는 자신의 부하인 노르망디 공작이지만, 동시에 경쟁자인 잉글랜드의 왕이라는 미묘한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는 부하로서 충성을 다하겠지만, 잉글랜드의 왕 윌리엄 1세는 자신과 대등한 관계로 언제든지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상대이기도 한 것이다. 이 때문에 필리프 1세는 프랑스의 귀족들이나 스코틀랜드의 왕과 협력하여 윌리엄 1세를 끊임없이 괴롭혔는데, 바로 각지에서 반란을 획책한 것이다.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대륙 쪽에서 계속 반란이 일어났고, 반대로 노르망디에 체류하는 동안은 잉글랜드에서 반란이 숫하게 일어났다. 급기야는 자신의 장남인 '로베르 커토즈'도 필리프 1세에 협력하여 반란을 일으켜 직접 진압하기도 하였다. 윌리엄 1세는 아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자신이 사망하면 노르망디의 상속을 약속했지만, 그의 아들은 여전히 말썽을 일으켰다. 1087년 윌리엄 1세는 프랑스의 망트 지역을 공격하다가 사망하였는데, 사망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병에 걸려서 죽었다는 설과 전투 중 부상으로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의 사망으로 노르망디는 약속대로 장남인 로베르가 계승하였고, 잉글랜드는 차남 '윌리엄 2세'가 이어받아 왕이 되었다. 윌리엄 1세는 사실상 마지막으로 잉글랜드를 정복한 사람으로 정복왕으로 불리며, 그가 잉글랜드에 끼친 막대한 영향과 그 이후에 사실상 혈연관계로 왕실이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에, 현대 영국 왕실의 직접적인 시조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