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영국 무정부시대 잉글랜드의 여군주 「마틸다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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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마틸다 황후

'마틸다'는 1102년경 잉글랜드의 왕 '헨리 1세'의 딸로 태어났다. 1108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5세'가 헨리 1세에게 마틸다와 결혼을 요청하였는데, 당시 20대 중반인 하인리히 5세가 6세의 마틸다에게 청혼한 것은 현대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상해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철저한 정략결혼으로 헨리 1세는 딸을 좋은 가문에 시집보내는 것과 동시에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든든한 동맹을 얻을 수 있었고, 하인리히 5세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지참금을 받아 이후 로마 원정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마틸다는 1110년 잉글랜드를 떠나 신성 로마 제국으로 향했으며, 리에주에서 만나 정식으로 약혼하였고, 마틸다는 8세의 나이로 독일의 왕비가 되었다. 이후 하인리히 5세는 로마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111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교황 '파스칼 2세'와 갈등을 겪으면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교황은 자신의 권한을 확대하기 위해 성직자의 서임권을 독점하려고 하였는데, 당시의 성직자들은 왕에게 영지를 하사 받고 일종의 봉신귀족 같은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각 지역의 군주들이 서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파스칼 2세는 헨리 1세와도 갈등을 겪었으며, 하인리히 5세의 아버지 '하인리히 4세'와도 계속해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결국 하인리히 5세는 파스칼 2세와 협의하여 서임권을 넘겨주는 대신 영지를 모두 몰수하기로 하였는데, 이 소식을 알게 된 주교들이 반발하자 무력을 사용하여 교황과 주교들을 감금하고 대관식을 치른 것이다. 대관식이 끝나자 하인리히 5세는 빠르게 이탈리아에서 퇴각하였고, 파스칼 2세는 하인리히 5세를 파문하는 등 기독교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본국으로 복귀한 하인리히 5세는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1114년에는 마틸다와 정식으로 결혼하였고, 1117년에는 두 번째로 로마로 향하였다. 이때 파스칼 2세는 로마에서 도망치면서 대신 '모리셔스 부르디누스'를 하인리히 5세에게 보냈다고 하는데, 그에 의해 하인리히 5세와 마틸다는 정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황후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마틸다 황후(Empress Matilda), 또는 모드 황후(Empress Maude)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교황과 하인리히 5세와의 대립은 이후로도 계속되었고, 1122년 '보름스 협약'을 맺으면서 정리되게 된다.

잉글랜드의 후계자

헨리 1세에게는 많은 자식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사생아로, 적법한 자식은 아들 '윌리엄 아델린'과 마틸다 밖에 없었다. 윌리엄 아델린은 노르망디의 공작으로서 헨리 1세와 프랑스의 왕 '루이 6세'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등 사실상 공식 후계자의 자리에 있었는데, 1120년 노르망디에서 배를 타고 잉글랜드로 건너오다가 사고를 당해 사망하였다. 갑작스럽게 후계자 문제가 대두되자 핸리 1세는 새 아내를 얻는 등 노력하였지만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는데, 그러던 중 1125년 하인리히 5세가 병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당시 마틸다는 23세로 하인리히 5세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의 권력구도에서 소외되게 되었는데, 이에 마틸다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권리와 영지를 포기하고 잉글랜드로 귀향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헨리 1세는 마음을 바꾸었는데, 그는 마틸다를 적법한 후계자로 공식  선포하고, 휘하의 귀족들을 불러 마틸다에게 충성맹세를 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례적인 상속에 대한 반발을 억누를 수 있도록 1128년 앙주의 백작 '풀크 4세'의 아들 '조프루아 플랜태저넷'과 결혼시켰다. 핸리 1세는 이 결혼을 통해 마틸다에게 강력한 아군을 붙여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적을 한 명 줄여 남부 노르망디 지역이 안정을 꾀했지만, 대신 풀크 4세와 조프루아에게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고심해야 했다. 또 이러한 그의 태도는 자국 내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이는 헨리 1세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더 큰 혼란을 불러오게 된다. 또 철저하게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부부사이도 별로 좋지 않았는데, 특히 마틸다는 어렸을 때부터 황후로 생활하였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났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마틸다는 세 명의 아들을 낳아 후계구도를 튼튼하게 다졌다. 하지만 반대로 헨리 1세와 마틸다 부부 사이에는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조프루아는 빨리 마틸다에게 노르망디 공작을 넘겨줄 것을 원했고, 헨리 1세는 생전에 자신의 지위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이 와중에 1135년 노르망디 남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마틸다 부부는 오히려 반란군을 도왔고, 이에 헨리 1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였는데, 이후 그대로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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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여군주

핸리 1세가 사망하자 후계자 문제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틸다는 헨리 1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된 적법한 후계자이긴 했으나, 여성이 후계자가 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었으며, 긴 외국생활로 국내에 지지자도 거의 없는 상태였다. 거기에 더불어 국내에는 적통은 아니지만 후계자로 나설만한 친척들도 적지 않게 있는 상태였는데, 헨리 1세가 노르망디 남부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왕의 시신을 온전하게 잉글랜드로 운반하기 위해 많은 유력한 귀족들이 일시적으로 노르망디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그 틈을 타 헨리 1세의 조카인 블루아의 '스티븐'이 재빨리 잉글랜드로 넘어갔고, 헨리 1세가 사망직전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며, 당시 윈체스터의 주교였던 동생 블루아의 '헨리'의 도움을 빌려 그대로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해 버렸다. 사실 이는 명맥 한 찬탈행위로 명분도 없는 것이었지만, 워낙 많은 귀족들이 마틸다를 후계자로 세운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인 스티븐을 지지하여 그대로 왕으로 인정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앙주에 있던 마틸다는 잉글랜드의 왕위를 요구하기는커녕 노르망디도 제대로 상속받지 못한 상태가 되어버렸는 데다가, 마침 이때 셋째를 임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1136년에 마틸다 부부는 본격적으로 노르망디 침공을 시도하였고, 이 때문에 스티븐은 노르망디로 건너와 이를 견제하였는데, 노르망디의 귀족들은 생각보다 마틸다에 우호적인 이들이 많았고, 1137년에 스코틀랜드의 사주를 받아 웨일스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성과 없이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또 1138년에는 마틸다의 이복동생이 글로스터의 백작 '로버트'가 마틸다를 지지하면서 반란을 일으켰고, 스코틀랜드에서도 마틸다를 지지한다는 명분으로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듬해인 1139년 마틸다와 로버트는 본격적으로 잉글랜드에 상륙하였고, 이로서 내전이 점점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스티븐은 내전 초기에 상당히 우세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즈음부터 교회와 사이가 틀어지면서 지지를 잃기 시작하였고, 1141년 '링컨 전투'에서 패배하여 생포당했다. 마틸다는 적의 수장을 잡았고, 윈체스터에서 열린 주교회의에서 '잉글랜드의 여군주'(Lady of England)라는 칭호까지 받으면서 내정 종식을 눈앞에 두었다.

무정부 시대

마틸다는 대관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런던으로 향했는데, 여기서 마틸다는 런던시의 감세 요구를 오만한 태도로 거절하였으며, 귀족들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하는 등 안하무인 한 행동을 벌였고, 이 때문에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대관식은 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쫓겨났다고 한다. 이로서 마틸다는 다 잡은 기회를 놓치게 되었는데, 내전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포로가 된 스티븐 대신 그의 아내가 계속해서 군대를 이끌고 저항하였으며, 끈질기게 스티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결국 윈체스터에서 벌어진 전투에 패해 로버트가 포로로 잡혔고, 이후 벌어진 협상에서 스티븐과 로버트를 맞교환하면서 내전의 끝은 다시 알 수 없게 되었다. 그사이 조프루아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벗어나있던 노르망디를 착실하게 점령해 나가고 있었고, 1142년에는 로버트도 노르망디로 귀환하여 조프루아와 함께하여, 이들은 노르망디 서부 전역을 장악하였다. 이 시기 마틸다는 옥스포드 성에서 스티븐의 군대에 포위되었었는데, 마틸다와 소수의 기사들은 몰래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하였고, 내란은 지지부진한 상태로 계속 지속되게 되었다. 이처럼 서로 내란을 끝내지 못하는 사이에 1144년 조프루아는 노르망디 전역을 장악하여 프랑스의 왕으로부터 노르망디 공작으로 인정받았으며, 1147년에는 로버트가 사망하였다. 또 이 시기에 마틸다의 장남인 '헨리 2세'가 소규모의 용병단을 이끌고 참전하기도 하였는데, 헨리 2세는 용병들에게 지급할 자금이 모자라 마틸다에게 요구하였지만 거절당하였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스티븐이 대신 지불하여 헨리가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당시 전선은 사실상 교착상태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 같고, 1148년에 마틸다는 아예 잉글랜드를 헨리 2세에게 맡기고 노르망디로 귀환해 버렸다. 이러한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게 되는데, 헨리 2세는 1150년에는 마틸다가 은퇴하면서 노르망디의 공작이 되었으며, 1151년 조프루아가 사망하면서 앙주의 백작위를 계승하였고, 거기에 더해 1152년에는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의 전처였던 '엘레오노르'와 혼인하면서 지참금으로 막대한 영지를 거느리게 되었다. 이듬해인 1153년 헨리 2세는 소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하였으며, 스티븐과 만나 '월링퍼드 조약'을 맺어 내란을 종식시키게 된다. 영국에서는 잉글랜드의 왕위를 놓고 약 18년간 내전을 벌인 이 기간을 '무정부시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은퇴와 사망

마틸다는 이후 여생을 노르망디에서 보내면서, 헨리 2세의 부재 시에 노르망디를 관리하는 역할 등을 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헨리 2세에게 정치적 조언을 건네기도 한 것 같다. 마틸다는 1167년에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루앙에서 사망하였으며, 그녀의 남은 재산은 모두 교회에 기부되었다고 한다. 마틸다는 만약 내전 때 대관식에 성공하였다면, 영국의 첫 번째 여왕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실패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잉글랜드의 여군주라는 칭호를 얻었기 때문에, 그녀를 영국의 첫 번째 여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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