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한의 정복왕 무제 「유철」
- 역사
- 2023. 8. 12.
권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싸움
'유철'(劉徹)은 기원전 156년경 한나라 황제인 '경제'의 10번째, 또는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제는 정실부인인 박황후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지만, 6명의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1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한나라의 승계 원칙으로 장자인 '유영'이 후계자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유철이 황제가 될 가능성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후 박황후가 폐위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는데, 유철의 어머니 '왕지'는 경제의 누나인 '관도공주'와 협력하기로 하였는데, 왕지는 유철과 관도공주의 딸인 '진아교'를 혼인시키기로 하였고, 관도공주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왕지를 새 황후로 책봉되게 하였다. 결국 왕지가 새 황후가 되면서, 유영은 태자의 자리에서 폐위되었고, 유철이 대신하여 새로운 태자가 되었다. 이어 기원전 141년 경제가 48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유철은 16세의 나이로 다음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즉위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되기 위해 관도공주를 비롯한 외척세력의 힘을 빌렸기 때문에, 당시 태황태후이자 관도공주의 어머니인 '효문황후'의 견제와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효문황후가 사망하기 전까지 계속되었고, 도가의 사상을 중시하던 효문황후와 유가의 사상을 도입하려고 한 유철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문제와 경제 때부터 이어오던 '문경지치'라고 불리는 태평성대가 유철의 통치기에도 계속 이어져, '한무성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기도 하였다. 기원전 135년경 효문황후가 죽자 유철은 본격적으로 친정을 실시하였는데, 먼저 외척들을 숙청하여 권력을 강화하였으며, '오경박사'를 설치하고, 최초의 유교식 학교인 '명당'과 '태학' 등을 건립하였다. 이러한 전격적인 유교의 도입은 기존의 정치세력을 이루고 있던 도교 세력에 대한 견제 목적이 컸던 것 같은데, 유철은 자신의 집권기 동안 유교 이념에 입각한 정치는 한 적이 없으며, 유교의 융성을 위한 이외의 다른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때부터 발전한 유교는 이후 중국의 국가들의 중요한 이념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또 '추은령'을 발표하여 경제 때 '오초7국의 난'을 일으키는 등 문제를 일으킨 황실 친척들의 권한을 약화시켜, 사실상 제후국의 형태를 이루고 있던 이들의 영지를 잘게 쪼개어 축소시켰고, 이때부터 제후의 권한이 축소되기 시작하여, 종국에는 실제적인 권한은 사라지고 명목상의 통치자로 바뀌게 된다. 유철은 이러한 중앙집권과 황권강화를 위한 행보를 계속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전통적인 방식대로 자신의 외척을 대거 등용하여 벼슬을 주기도 하였다.
실크로드의 발견과 흉노족 정벌
당시 '흉노족'은 북아시아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한 고조 '유방'이 흉노족에게 대패하고 난 후로 한나라는 흉노에 매년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황제가 된 유철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흉노를 토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기원전 139년 '장건'을 서역으로 보내, 한때 강성한 세력이었으나 흉노에 의해 쫓겨난 '대월지'와 동맹을 맺을 수 있도록 하였다. 장건은 천신만고 끝에 대월지에 도착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동맹을 맺는 것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장장 13년에 걸친 임무를 끝내고 돌아온 장건은 여러 서역의 문물과 정보를 한나라에 전파하였으며, 동서양의 무역통로인 초기 '실크로드'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 이때 전한이 대월지를 찾아 '소그디아나' 지방까지 갔었기 때문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남긴 서양의 문물을 접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전한은 최초로 서양의 문명과 만난 중국의 관료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로도 대월지 대신 서역의 '오손'과도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기원전 133년 유철은 30만이라는 대군을 일으켜 흉노를 유인하여 섬멸하려고 하였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사전에 흉노에 알려졌기 때문에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끝나게 되었다. 기원전 129년에는 이전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조금 더 작은 규모의 원정군을 편성했는데, 4명에 장수에게 각각 1만의 군사를 주어 4갈래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원정은 실패에 가까웠는데, 2갈래의 군사는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하였고, 나머지 2갈래 중 한 갈래의 군은 아예 적을 만나지도 못하였다. 그중 오직 '위청'만이 그럴듯한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는 흉노가 제사를 지내는 '용성'이라는 곳까지 쳐들어가서, 700명가량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왔다. 이 승리 이후로 한나라와 흉노 사이에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는데, 위청은 기원전 127년과 기원전 124년에도 군대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고, '장평후'로 봉해졌으며, 한나라의 대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흉노와의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있는데, 바로 '곽거병'이다. 기원전 119년에 있었던 원정에서 한나라는 흉노에 대승을 거두었고, 곽거병은 흉노의 영역을 가로질러 진군하여 '바이칼 호'까지 도달하였다고 한다. 그사이 그는 수많은 흉노족을 물리쳤고, 원정후에 곽거병과 위청은 모두 '대사마'에 임명되었다. 유철의 제위기간 동안 한나라는 오르도스 지방을 장악하여 2개의 군을 설치하였고, 하서에서도 흉노를 몰아내고 4개의 군을 두었다. 남방의 '민월'과 '동월'은 한나라의 영토로 병합하였고, 기원전 111년에는 '남월'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9군을 두는 등, 변경의 여러 부족들을 귀순시켜 지배하에 두었다. 그리고 한나라는 고조선(위만조선)도 공격하였는데, 기원전 108년에 벌어진 '왕검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고조선을 멸망시켰고, 그 자리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치세 속의 폭정
한족 역사상 두 번째로 넓은 영토를 확보한 유철은 전한의 전성기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하는데, 이면에서는 엄청난 폭정을 펼쳤다. 그는 상당한 규모의 군사 원정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황릉을 짓는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진행하였고, 이로 인해 선대 황제들이 쌓아놓은 국고를 탕진하였다. 게다가 그것으로도 모자랐기 때문에, 상인출신의 '상홍양', '동곽함양', '공근' 등을 중용하여, 소금과 철, 황, 술의 전매제를 시행하였다. 균수법을 시행하여 대놓고 관청에서 장사를 하였고, 물가를 조정한다는 것을 내세워 평준법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묶어서 보면 물건을 파는 상인이 물가를 마음대로 조절하는 격이 된다. 나라에서 이를 통해 적극적으로 재정을 보충하였지만, 막대한 전비 지출과 낭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또한 결과적으로 이러한 조치는 부유한 상인의 매점매석을 근절하는 등 물가안정 작용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로 인해 많은 상인과 백성들이 고통받았다. 그 외에도 무제는 신하들을 가혹하게 처벌하였는데, 성격이 급했기 때문에 앞뒤 가리지 않고 처벌부터 진행하였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많은 신하들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개중에는 큰돈을 지불하고 죽음을 모면하는 이도 있었다. 유철은 죽을죄를 저지른 신하에게 50만전의 어마어마한 벌금이나, 거세를 하는 궁형, 또는 사형 중에 선택지를 주었는데, 대체로는 벌금을 지불할 만한 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처형되었다. 역사서 '사기'로 유명한 '사마천'의 경우도 죄인을 감쌌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는데, 그는 궁형을 선택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무고의 화
기원전 91년 승상 '공손하'와 유철의 황후인 '위자부'의 언니인 '위유'의 아들 '공손경성'이 군비 1,900만전을 횡령한 것이 발각되었는데, 공손하는 유철에게 당시 유명한 도적인 '주안세'를 잡아오는 조건으로 죄를 사해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공송하는 주안세를 어렵지 않게 잡아왔는데, 이번에는 주안세가 공손경성이 위자부의 딸 '양석공주'와 음모를 꾸며 '무고'(巫蠱)하여 유철을 저주했다고 고했다. 무고는 일종의 저주로 흔히 짚이나 나무 따위로 만든 인형에 대상자의 이름을 쓰고, 인형을 훼손하거나 저주를 걸고 묻거나 해서 상대방을 해하는 것을 말하는데, 요즘은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 한나라에서도 행해진 것 같다. 일설에 의하면 사실 이 주안세는 남들 대신 무고를 해주는 사람으로, 그가 잡히면 자신의 죄가 드러날까 두려워 아무도 잡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이 어떻든 이 무고에 얽히게 되면 상당히 골치 아프게 되는데, 별다른 수사기법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땅을 파서 인형만 발견되면 사실상 유죄가 인정되었으며, 매우 죄질이 안 좋은 범죄로 여겨져 큰 처벌을 피하기 어려웠다. 결국 공손하와 위유, 공손경성은 옥에 갇힌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하였고, 유철은 자신의 딸인 양석공주와 '제읍공주'까지 처형하였다. 이 사건은 사실 유철이 의도한 것으로 외척을 숙청하기 위해 벌인 일 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사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얼마 후 병을 앓게 된 유철은 나무인형들이 자신을 몽둥이로 때리는 꿈을 꿨다고 한다. 이를 들은 유철의 측근이었던 '강충'은 누군가가 유철을 무고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였고, 이에 유철은 환관들에게 무고에 대한 조사를 하도록 하였다. 이 강충이라는 인물은 평소에 강직한 태도를 유지하여 유철의 환심을 사게 되었는데, 대신 그 강직한 태도 때문에 태자 '유거'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건을 계기로 음모를 꾸몄다. 강충은 무당과 짜고 인형에 유철의 이름을 써서 여러 곳에 묻었고, 특히 태자궁 주변에 많이 묻었다. 결국 이와 관련하여 수만 명이 처형당하였고, 유거는 점점 자신에게 혐의가 좁혀오자 아예 반란을 일으켰다. 유거는 사건을 조사하던 환관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황궁을 장악한 후에 강충과 무당을 처형하였다. 당시 이미 고령이었던 유철은 수도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감천궁'에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유거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환관이 도망쳐 이 사실을 알렸다. 유철은 군대를 모아 장안을 공격하였고, 결국 유거는 장안을 빠져나가 도망쳤다가 후에 관군에 포위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도중에 유철은 두 번이나 신하를 보내어 진상을 확인하도록 하였으나, 신하들은 목숨이 두려워 장안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또 반대로 목숨이 두려워 유철에게 반란이 확실하다고 거짓보고를 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유철의 평소에 신하들에게 내리는 가혹한 처벌이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 일로 위자부는 폐위되었으며, 유거의 아내와 아들들, 장인과 장모, 딸과 사위까지 모조리 죽게 되었고, 유거의 손자인 '유순'만이 처조모의 친정으로 빼돌려져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새로운 태자로는 말년에 유철의 총애를 받은 '구익부인'의 아들 '유불릉'으로 정해졌는데, 유철은 또 구익부인을 어린 황제를 대신해 전횡을 저지를 것이라고 여겨 반역죄를 들어 처형하였다.
최후
유철은 기원전 87년에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당시의 시대를 생각해 보면 상당히 장수하였다. 덕분에 54년이라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제위에 있었는데, 제위 초반은 태평성대로 칭송받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무리한 원정과 낭비로 인한 재정문제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으로 인해 암군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특히 자신의 태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무고의 화'에 대해서도 문제가 많은데, 결국 사건 이후에 유거가 무죄였다는 것이 밝혀지자, 그를 복귀시키고 따로 궁궐을 건축하여 명목을 빌었다고 한다. 그리고 원흉인 강충의 일족을 멸하고, 가담한 이들을 모두 처형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실의에 빠져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고, 결국 이로 인한 병으로 사망하였다. 결국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크게 책망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는 성격으로 자신의 후계자까지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그러나 유철의 행위는 사실은 총애하던 구익부인의 아들 유불릉을 후계자로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