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오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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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

초나라와 원수지다

'오자서'(伍子胥)의 고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본래 이름은 '오운'(伍)이지만, 자를 '자서'로 써서 흔히 오자서로 불린다. 오자서의 가문은 대대로 초나라에서 벼슬을 한 명문으로 초의 장왕을 모신 명장 '오삼'이나, 초의 영왕을 보조한 '오거' 등이 유명하고, 아버지인 '오사'는 당시 태자인 '웅건'의 스승인 태부로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 초나라는 점차 쇠퇴하고 있었는데, 기원전 527년에 초나라를 다스리던 평왕은 신하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진나라의 힘을 빌리기 위해 태자와 진나라의 공주를 혼인시키기로 하였고, 자신의 측근으로 오사 밑에 소부로 있던 '비무기'(비무극)이란 자를 진나라로 보냈다. 그런데 진나라로 간 비무기는 공주가 대단한 미인인 것을 알게되자, 평왕에게 아부 할 목적으로 공주를 후궁으로 삼도록 부추겼다고 한다. 결국 진나라의 공주는 평왕의 후궁이 되었고, 대신 함께 온 시녀를 공주라고 속여 웅건와 결혼시켰다고 한다.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으나, 시간이 흘러 평왕이 점점 나이가 들자 비무기는 후에 웅건이 왕위를 잇게 될 경우를 두려워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웅건에 대해 평왕에게 음해를 시작하여 변방의 수비를 하도록 멀리 보내버렸으며, 이내 웅건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며 모함하였다. 기원전 524년 평왕은 오사를 불러 이를 확인하려고 하였는데, 그에대해 오사는 평왕에게 간신의 말이 아닌 피를 나눈 혈육을 믿으라고 진언하였고, 비무기는 오히려 오사가 웅건과 한패라며 모두 처벌하도록 부추겼다. 결국 평왕은 비무기의 말을 들어 웅건에게 자객을 보냈는데, 자객은 웅건의 처지를 측은하게 생각하여 이를 미리 알려주어 몸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한다. 또 오사의 두 아들이 후환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붙잡아 두고 아들들을 불러들였는데, 두 형제는 이것이 함정임을 짐작하였으나, 형 '오상'은 순순히 평왕의 말에 따라 출두하여 충과 효를 지키고 죽었고, 동생인 오자서는 형의 당부를 받고 도망치며 복수를 맹세하였다. 오자서가 도망쳤다는 것을 알게 된 평왕은 그의 목에 5만석에 달하는 영지와 벼슬 등에 해당하는 현상금을 걸었고, 오사는 죽으면서 앞으로 초나라에 큰 재앙이 닥칠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동병상련

오자서는 먼저 초나라를 탈출한 웅건을 찾아 송나라로 향했는데, 문무를 겸비했던 오자서는 도망치는 와중에 쫓아오는 자객들을 활로 쏴서 격퇴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송나라에 도착한 오자서는 복수를 하기에는 송나라가 적절치 않다고 판단하고, 웅건과 함께 다시 정나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정나라에서 웅건은 오자서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반란을 기획하다가 처형당하였고, 오자서는 웅건의 아들인 '웅승'만 데리고 간신히 탈출하였는데, 이는 본래 진의 경공이 정나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기 위해 웅건을 부추긴 것이라고도 한다. 결국 정나라에서도 있을 곳을 잃어버린 오자서는 복수를 위해 더 적합한 오나라로 자리를 옮기기로 하였는데, 이를 위해서는 다시 초나라를 지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오자서는 초나라에 사는 친구인 '신포서'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장강에서는 늙은 뱃사공 덕에 목숨을 건지기도 하였다. 이때 오자서는 감사의 뜻으로 집안 대대로 전해오던 보검을 주려고 하였는데, 뱃사공은 부를 탐했으면 보검이 아니라 현상금을 타 고관대작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오자서는 천신만고 끝에 오나라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초나라의 명문가 출신이기는 했으나 오나라에는 아무런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농사를 지으며 한동안 상황을 관망하였다고 한다. 이후 오자서는 오나라 왕족인 '희광'이 야심과 능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도왔는데, 기원전 518년과 기원전 517년에 그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기원전 516년에 평왕이 죽자 이듬해인 기원전 515년에 오나라는 대대적으로 초나라를 침공하였는데, 오자서와 희광은 이 혼란을 틈타 오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희광은 오나라의 왕위에 올라 오왕 '합려'가 되었고, 공을 세운 오자서는 재상이 되어 복수에 한발 다가갈 수 있었다. 합려와 오자서 아래에서 오나라는 유망한 나라로 평가되어 여러 인재들이 몰려들었는데, 그 중에는 '손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진 '손무'도 있었고, 초나라에서 도망쳐온 '백비'도 있었다. 이때 사람들이 오자서에게 백비에 대해 욕심이 많고 강직하지 못하다고 조언하였다고 하는데, 오자서는 백비도 자신처럼 초나라에 핍박받아 도망쳐 온 처지라고 하며 중용하였고, 이때 '동병상련'이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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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모도원 도행역시

기원전 512년부터 오나라는 본격적으로 초나라를 공격하였는데, 기원전 506년에는 많은 제후국들과 함께 일시에 초나라를 공격하였고, 이때 오나라는 정예병을 이끌고 대별산맥을 넘어서 초나라의 수도 영을 급습하였다. 수도가 함락되자 초나라의 소왕은 수나라로 도망쳤고, 영은 오나라 병사들에 의해 약탈과 방화가 자행되었다고 하는데, 오사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이 사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평왕은 이미 죽어서 오자서는 복수를 이룰 수 없었는데, 대신 그는 평왕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을 파내고, 아직 시신이 썩지 않은 것을 기뻐하며 구리 채찍으로 300대나 때려 완전히 박살내버렸다고 한다. 이 일화를 '굴묘편시'라고 하는데, 당시 산속에 피난을 가 있던 신포서가 이 소식을 듣고 오자서에게 복수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냐고 편지를 썼다고도 한다. 오자서는 이에 대해 '일모도원 도행역시'라고 답했는데, 날은 저무는데 갈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것으로, 장장 16년에 걸쳐 복수를 다짐했지만, 평왕도 비무기도 이미 죽었으니 오자서에게는 달리 복수할 방법이 없었기도 했다. 결국 신포서는 이듬해인 기원전 505년 진나라에 찾아가서 초나라를 도와줄 것을 부탁했는데, 진의 애공은 처음에 평왕이 진나라 공주인 자신의 여동생을 후궁으로 삼은 것을 들어 거절했으나, 신포서가 몇날몇일에 걸쳐 통곡을 하며 부탁하자 마지못해 이를 들어주었다. 또 월나라가 오나라를 공격하였고, 오나라에서 합려의 동생 '희부개'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오나라는 초나라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오자서는 웅승을 초나라의 왕으로 세우고 자신의 재상이 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오나라 군대의 잔혹한 행위로 민심을 얻기 힘들어 진데다가, 합려의 영토에 대한 욕심으로 이루지 못한 것 같다. 결국 물러나면서 오자서는 웅승을 다시 초나라의 왕족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후 초 혜왕 때에 웅승은 초나라로 귀환하여 백공의 지위를 받았다고 한다.

와신상담

합려는 다시 오나라로 귀환하여 반란을 진압하였고, 패배한 희부개는 초나라로 도망쳐 망명하였다고 한다. 이듬해인 기원전 504년에는 아들 '부차'가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침공하여 영토를 빼앗기도 하였다. 전쟁에 패배한 초나라는 완전히 황폐해진 영을 버리고 수도를 약으로 옮겼으며, 오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평화를 얻었다고 한다. 이후 오자서는 자신의 복수를 도와준 오나라에 계속 충성하기로 한 것 같은데, 기원전 496년에 합려는 오자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월나라를 공격하다가 월왕 '구천'에게 패했고,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합려가 죽은 후에는 오자서의 지지를 받은 부차가 오왕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는 가시가 많은 장작 위에서 잠을 자며, 방 앞에 사람을 세워 출입할 때마다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고 외치게 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494년 부차는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월나라로 쳐들어갔으며, 구천의 군대를 크게 패배시켜 회계산에 고립시켰다고 한다. 구천은 월나라를 부차에게 바치고 스스로 신하와 노비가 되겠다고 애원하였는데, 부차는 오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이때 구천의 신하인 '범려'가 백비에게 뇌물을 주어 부차를 설득하였고, 이후 구천, 혹은 범려가 오나라로 끌려가서 2년여간 노비 노릇을 하며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구천은 방 천장에 쓸개를 매달아 놓고 매일 핥았는데, 쓰디 쓴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를 다짐했다고 하며, 이 부차와 구천의 일화를 합쳐 '와신상담'이라고 한다. 구천과 범려는 부차를 방심시키고 오나라를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여색을 좋아하는 부차에게 '시이광'과 '정단' 같은 미녀들을 바치기도 했으며, 그 중 시이광이 바로 유명한 '서시'이다. 여담이지만 서시와 정단이 오나라에 도착하자 많이 이들이 그녀들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어 성문이 부서질 정도였다고 하는데, 오자서가 두 사람을 보고는 정단은 '성을 무너트릴 수 있을 정도의 미녀'(경성지미)이기 때문에 안에 들여도 되지만, 서시는 '나라를 기울게 할만한 미인'(경국지색)이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하였다고 한다.

촉루지검

오자서는 부차에게 계속해서 월나라를 경계하도록 진언하였지만, 부차는 초나라와 월나라는 이미 평정했다고 여기고 북쪽에 관심을 두어 제나라와 노나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오자서는 제나라는 피부병이지만 월나라는 속병(심복지환)이라며 부차를 설득했지만, 이미 월나라의 입김이 걸린 서시와 백비의 이간질로 오자서와 부차의 사이는 나빠지기만 하였다. 기원전 485년에 오자서는 사신으로 제나라로 향했는데, 이때 그는 오나라의 운명을 예감하고 자신의 아들을 제나라의 대부에게 의탁하고 홀로 귀국하였다고 한다. 결국 이 일이 빌미가 되어 부차는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하며 명검 '촉루'를 보냈고, 오자서는 죽으면서 자신의 무덤 옆에 가래나무를 심어 부차의 관으로 쓰게 하고, 두 눈알을 뽑아 월나라 방향의 성문에 걸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유언은 지켜지지 못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부차는 대노하여 오자서의 시체를 가죽자루에 담아 장강에 던져버리게 했다고 하며, 인근 주민들이 이를 불쌍히 여겨 근처에 오자서의 사당을 세워주었다. 이후 기원전 473년에 결국 오나라는 월나라에게 패배하였고, 부차는 구천에게 항복하였다. 부차는 과거에 자신이 구천의 항복을 받아 준 것을이야기하며 자비를 요청하였는데, 범려가 구천에게 쓸개를 핥던 일을 잊었냐며 진언하였다고 한다. 구천은 부차에게 100호의 장으로 삼아주겠다며 사실상 거절하였고, 결국 부차는 저승에서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며 얼굴을 천으로 가린채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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