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말 삼국시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명장「여몽」
- 역사
- 2023. 8. 10.
오하아몽
'여몽'(呂蒙)은 178년경 태어났는데, 예주 여남군 부피현 사람으로 자는 '자명'(子明)을 썼다. 여몽은 어렸을 때 고향을 떠나 매형인 '등당'에게 의지하였는데, 당시 등당은 '손책' 휘하에 있었다. 여몽이 열대여섯 살 무렵 등당은 '산월족'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는데, 여몽이 몰래 그 뒤를 따랐다고 한다. 등당이 나중에 이를 발견하고 크게 꾸짖었는데, 그래서 멈추지 않았기에 그 사실을 여몽의 어머니에게 알렸다고 한다. 이때 여몽은 어머니에게 가난하고 천하면 살기 어려우니 공을 세워 부귀영화를 누려야 한다며,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등당의 부하는 어린애가 그래봐야 호랑이 먹이가 될 뿐이라고 무시했다고 하는데, 이후 여몽과 만나서 면전에서 또 모욕을 했기 때문에, 여몽이 그를 죽이고 도망쳤다가 다시 자수하였다. 그러나 처벌받지는 않았는데, 전후상황을 모두 전해 들은 손책이 여몽을 기이하게 여겨 곁에 두었고, 후에 등당이 사망하자 그를 대신하여 '별부사마'에 임명되었다. 200년 손책이 죽고 '손권'이 그 뒤를 이었는데, 손권은 군 체계를 개편할 목적으로 열병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여몽은 돈을 빌려 눈에 잘 띄는 주홍색 옷을 준비해 휘하 병사들에게 입혔는데, 그의 병사들이 잘 훈련된 것을 본 손권이 휘하 병사의 숫자를 늘려주었고, 이후 단양 토벌전에 참전하여 세운 공으로 '평북도위'에 광덕현의 장으로 임명되었다. 208년에는 강하의 '황조'를 공격하는데도 참여하여 공을 세웠는데, 여몽은 선봉으로 나아가 황조의 수군 도독 '진취'를 죽였고, 손권은 여몽에게 큰 상을 내렸으며, 그를 '황야중랑장'으로 삼았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무예에 매진한 여몽은 용맹한 장수였지만, 학식이 부족하여 글로 전달하지 못하고 말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에 손권이 여몽과 '장흠'을 불러서 책을 읽고 학문을 닦기를 권하였는데, 여몽이 일이 너무 바빠서 책을 읽을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변명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손권은 군주인 자신도 시간을 내어 책을 읽는다고 질책하였고, 이 같은 손권에 말에 여몽이 반성하고 학업에 힘썼다고 한다. 이 당시의 학식이 낮은 여몽을 가리켜 '오하아몽'이라고 말한다.
괄목상대
'적벽대전' 이후 손권군은 유비군과 함께 강릉의 '조인'을 공격했는데, 이때 익주에서 '습숙'이라는 자가 병사들을 이끌고 오에 귀순하였다고 한다. 당시 현장 지휘관이었던 '주유'는 이 병사들을 수습하여 여몽 휘하에 두려고 하였는데, 여몽은 오히려 멀리서 오까지 온 습숙에 대해 칭찬하면서 그를 그대로 기용할 것을 권하였고, 이에 손권이 여몽을 크게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후 별도로 군을 이끌고 이릉을 공격하던 '감녕'이 조인의 별동대에 포위되자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다른 이들은 모두 둘로 나누어 도우러 가기에는 병사가 너무 적어 위험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여몽은 도우러 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감녕을 구원하는 데에는 시일이 얼마 걸리지 않고, 그 사이에 본진을 '능통'에게 맡기면 능히 버틸 것이라고 하였다. 또 적의 퇴로에 나무를 쓰려 뜨려 두면 군마를 버리고 도망갈 것이라는 계책도 내었다. 주유가 이 진언을 받아들여 급히 이릉으로 들이치자, 적들은 바로 그날 전투에 패해 밤에 달아났고, 여몽의 말대로 조조군이 버리고 간 군마 300필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209년 사기가 크게 오른 손권군은 조인을 쫓아내고 강릉을 점령하였고, 여몽은 이 공으로 '편장군'에 심양현령에 임명되었다. 이후 주유가 죽자 '노숙'이 그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한 번은 노숙이 육구로 가던 길에 여몽의 영지를 지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노숙은 여몽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갔는데, 여몽은 노숙과 술자리를 갖던 중 형주의 '관우'에 대한 대비책을 물었다. 이에 노숙이 관우가 그때그때 행동하는 것에 맞추어 대응하겠다고 하자, 여몽이 그에 대한 몇 가지 계책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때 노숙이 여몽에게 예전과 다르게 학식이 대단해졌다며 칭찬하였는데, 여몽은 노숙에게 선비는 사흘만 떨어져 있어도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 일화가 '괄목상대'의 유래가 되었으며, 이후 노숙과 여몽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손권도 항상 학문에 힘쓴 무장으로 여몽과 장흠을 예로 들어 이야기하였으며, 여몽은 무용과 지모를 겸비한 장수로 동오의 한 축이 되었다.
동오의 명장
여몽의 임지 인근에는 '성당', '송정', '서고'라는 이들이 있었는데, 손권은 이 세 사람이 사망하고 그 후계자들이 유약하자, 이들의 병사를 거두어 다시 여몽에게 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몽은 손권에게 세 번이나 편지를 보내 나라에 공헌한 이들의 자녀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진언하였고, 이에 손권은 후계자들에게 스승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또 조조가 '사기'를 기춘의 전농으로 임명하여 환현 일대에서 둔전을 하게 하였는데, 그 병사들이 국경 인근에서 계속해서 약탈을 자행하였다고 한다. 이에 여몽이 여러 차례 귀순할 것을 권고하였는데 듣지 않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갔고, 이에 사기가 퇴각하자 부하였던 '손자재', '송호' 등이 노약자들을 데리고 투항했다고 한다. 이후 212년 경에 벌어진 '유수구 전투'에서는 손권군과 조조군이 장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었는데, 여몽이 유수구에 방어하기 좋도록 '오'를 설치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이에 대해 장수들이 동오의 수군이 강한데 배를 타고 건너가 싸우다가 다시 돌아오면 된다고 반대하자, 여몽은 동오의 수군이 강하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도 대비해야 된다고 이야기하였고, 이에 '유수오'를 세워 방비하였는데, 조조가 손권군의 방비가 철저한 것을 보고 군대를 돌려 다시 돌아갔다고 한다. 조조는 다시 여강태수 '중광'을 환성에 보내 인근을 개간하도록 하였는데, 여몽이 이것을 보고 조조군이 자리 잡기 전에 격퇴해야 한다고 진언하였고, 이에 따라 손권은 214년에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였다. 이때 많은 장수들이 공성무기를 준비하고 신중하게 싸워야 한다고 진언하였으나, 여몽은 시간이 지체되면 적이 준비될 것이니 신속하게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다. 손권군은 여몽의 말에 따라 감녕을 선봉으로 세워 총공격을 가하였고, 합비에 있던 '장료'가 구원하려 하였지만, 성이 너무 빨리 함락되어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여몽은 이 공으로 여강태수로 임명되었고, 이후 심양으로 돌아와 여릉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형주 공방전
유비는 익주를 손에 넣었는데도 형주를 반환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유비와 손권 사이에 관계가 틀어지게 되었다. 손권은 유비와 반목하게 될 경우 불리해질 것을 우려하여 215년에 여몽과 노숙에게 대군을 주어 장사와 영릉, 계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중 장사와 계양은 여몽의 항복 권고를 받아들였으나, 영릉태수 '학보'만이 저항하였는데, 그 사이 유비와 관우도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였기 때문에, 손권은 노숙에게 관우를 저지하게 하고, 여몽도 영릉을 포기하고 합류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여몽은 회군하기 전에 학보를 떠보기로 하였는데, 여몽은 휘하에 있던 학보의 친구 '등현지'에게 유비군이 위급하여 구원 오지 못할 것이라며 거짓 정보를 알려주었고, 등현지가 이것을 사실로 알고 학보를 설득하여 항복하게 하였다. 학보가 항복하자 여몽은 손권의 명령서를 보여주며 박장대소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한중으로 내려오자, 유비는 손권과 화친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손권은 조조가 한중에 있다는 것을 알자 즉시 대군을 모아 합비를 공격하였지만, '장료'와 '이전' 등의 분전으로 실패하였고, 회군하는 과정에서 장료의 공격을 받아 여몽은 손권을 지키기 위해 분전하였다. 이후 조조가 본대를 이끌고 다시 유수구까지 쳐들어왔지만, 여몽이 전에 만들어 둔 유수오에 강노를 배치하여 대항하였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이후 노숙이 사망하자 여몽이 그 뒤를 이었는데, 여몽은 노숙과 달리 형주의 관우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편 219년 관우는 양양을 공격하기 위해 출진하여 조조군과 번성에서 대치하였다. 이때 여몽은 병을 이유로 건업에 있었는데, 이에 대해 진짜로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관우를 방심시키기 위해 병으로 위장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관우와 조조군은 번성에서 치열하게 싸웠고, 그 과정에서 포로를 위한 식량이 부족하다며, 유비군이 손권이 소유하고 있던 영릉의 상관을 약탈했다고 한다. 여몽은 이를 빌미로 즉시 출병하였으며, 관우를 기망하기 위해 상선으로 위장한 배에 병사를 태워 재빠르게 이동하였다. 여몽은 국경 인근의 유비군 정찰병을 제압하여 침공 소식이 퍼지는 것을 막았고, '우번'을 보내 공안의 '부사인'을 회유하여 항복시켰고, 부사인이 다시 강릉의 '미방'을 항복시켰다. 손권군의 이 공격과 관련하여 손권과 조조 사이에 협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손권은 조조에게 서신을 보내 이 공격에 대해 관우에게 알리지 말 것을 요청하였으나, 조조는 번성이 위급하였기 때문에 관우와 번선에 이 사실을 서신을 묶은 화살을 쏘아 알렸는데, 관우는 번성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였기 때문에 조조의 기만을 의심하였으며, 손권이 진짜로 쳐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여몽은 형주를 장악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군율을 엄히 세웠으며, 사로잡은 관우의 가솔들도 정중하게 대하였다고 한다. 결국 관우는 조조가 보낸 '서황'에게 패해 번성에 고립되었고, 이후 여몽이 보낸 부대의 공격을 받아 사로잡혀 아들 '관평'과 함께 처형되었다. 여몽은 '잔릉후'에 봉해져 남군태수에 임명되었으며, 돈 1억 전과 황금 500근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몽은 곧 병에 걸려 쓰러졌고, 해를 넘기지 못하고 4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