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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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

'제임스 매디슨'은 1751년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버지니아의 '포트콘웨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름도 '제임스 매디슨'인데, 그는 100여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주로 담배를 재배하는 5,000에이커에 달하는 농장을 소유하고 있어, 일대에거 가장 부유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엘레노어 로즈 콘웨이 매디슨'도 주로 담배를 제배하는 저명한 농장주의 딸로, 매디슨은 이러한 부모 아래에서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한 것 같다. 11세부터 공부를 시작한 매디슨은 언어, 수학, 지리학 등을 배웠는데 특히 라틴어에 능숙했다고 하며, 1769년에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일반적인 버지니아 출신자들과 달리 '윌리엄 & 메리 대학'이 아닌 '뉴저지 대학'(프린스턴 대학)에 다녔다고 한다. 1771년 매디슨은 3년 기간의 학사과정을 2년만에 마쳤지만, 그대로 대학에 머물면서 공부를 계속하였고, 이듬해인 1772년이 되서야 고향으로 다시 돌아갔다. 귀향한 매디슨은 집에서 동생들을 가르치며 시간을 보냈고, 1773년부터는 법률 서적을 보며 법학을 공부하였지만, 변호사가 되지도 않았다. 이 시기에는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사이에 불화가 계속되었고, 1774년에 매디슨은 '오렌지 카운티'의 민병대 대령으로 임명되어 아버지 휘하에서 부관으로 복무하기도 하였다.

헌법의 아버지

1776년에 '제5차 버지니아 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 매디슨은 '버지니아 권리 선언'의 초안을 작성하였으며, 회의 결과 버지니아를 독립국가로 선언하고, 버지니아 헌법을 제정하였다. 회의 후 매디슨은 버지니아주의 의원이 되었으며, 이후 버지니아 주지사의 국무위원으로서, 당시 주지사였던 '토마스 제퍼슨'과 함께 버지니아주를 이끌었다. 또 이 해에는 '대륙 회의'에서 '미국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기도 하였다. 매디슨은 계속해서 버지니아주 의회와 '대륙 회의', '연합 회의'에 참석하여 미국독립에 진력하였고, 이는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이 정식으로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이듬해인 1784년에 매디슨은 다시 버지니아주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1787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미국의 연방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반연반주의자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헌법을 비준하기 위해서는 반대하는 주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알렌산더 해밀턴'을 주축으로, '존 제이'와 매디슨이 협력하여 '연방주의자 논집'으로 불리는 출간물을 약 1년에 걸쳐 신문에 게제하였다. 당시에는 따로 저자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헌법 제정에 찬성한 매디슨은 해밀턴, 존 제이와 함께 연방주의자로 불렸다고 한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에 힘입어 1788년에 헌법이 비준될 수 있었고, 미국 헌법 제정에 큰 역할을 한 매디슨은 '헌법의 아버지'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매디슨은 독립 전쟁이 한창이던 와중에 '미국 의회도서관'의 건립을 제안했기 때문에 '도서관의 아버지'라는 별명도 있다.

연방 하원의원

이후 매디슨은 버지니아주의 연방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는데, 1789년에는 연방 헌법에 미비한 부분들을 보완하기 위해 12개의 수정 조항들을 제출하였고, 1791년에 그 중 10개 조항이 비준되었으며 이를 한대 묶어 '권리장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중 11번째 조항은 한참 나중에 비준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수정헌법 제27조'이다. 또 매디슨은 이전까지 연방주의자로 평가되었던 것 같은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제퍼슨과 함께 정치활동을 하여, '민주공화당'을 공동으로 창건하기도 하였다. 1793년에는 제퍼슨이 국무장관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매디슨이 전면에 나서서 민주공화당의 정치활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해밀턴을 주축으로하던 연방당은 영국과 우호적이었는데, 반면에 민주공화당은 프랑스와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 영국과 프랑스가 계속해서 전쟁을 하는 등 반목을 계속하면서, 그 사이에서 신생국가였던 미국도 계속해서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은 국력이 약한 미국이 외국의 전쟁에 개입하여 끌려다니는 것에 반대하여 중립을 유지하였으며, 이러한 기조는 다음 대통령을 거치면서 계속유지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반 강제적으로 미국과 미국 시민들을 유린하였고, 이 때문에 '제이 조약'이나 'XYZ 사건' 등 문제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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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장관

한때 '존 애덤스'가 대통령에 선출되고, 제퍼슨이 부통령에 선출되면서, 선거에 실패하여 공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지만,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는 상당히 성공적인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매디슨은 제퍼슨 휘하에서 국무장관으로 취임하였고, 이 때문에 '마베리 대 매디슨 사건'의 피고소인이 되기도 하였다. 제퍼슨 정부에서는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구입하는 등 탁월한 정책도 있었지만, 이 시기에도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대프랑스 동맹'의 영국과의 사이에서 미국은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고, 1807년 제퍼슨이 시행한 '출항금지법'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비웃음을 사면서, 제퍼슨 정부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08년에 이루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매디슨은 많은 득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부통령은 제퍼슨이 두번째 임기때 함께 했던 '조지 클린턴'이 당선되었다. 1809년 두번의 임기를 마친 제퍼슨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매디슨은 미국의 4번째 대통령으로서 임기를 시작하였다.

미영전쟁

제퍼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때부터 연방당은 분열되기 시작하였으며, 매디슨이 대통령이 되었을때는 사실상 상당히 와해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매디슨은 제퍼슨처럼 순조롭게 국정을 운영할 수 없었는데, 같은 당의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제임스 먼로'와 부통령인 클린턴이 매디슨을 적극적으로 견제하였다. 매디슨은 자신이 국무장관이었을때 함께 했던, '앨버트 갤러틴'을 국무장관으로 임명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거센 반대에 부딪쳐 실패하였고, 그 후 임명한 '로버트 스미스'는 무능하였기 때문에, 결국 1811년에 자신과 각을 세우고 있는 먼로를 국무장관에 임명하였다. 내각의 나머지 구성원들도 정치적인 고려를 통해 선출되었기 때문에, 무능하거나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이에 매디슨은 중요한 내용은 갤러틴과 상의하였으며, 내각회의를 소집하지 않았다고 한다. 매디슨의 임기중에도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매디슨은 이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해야 했다. 그러나 국력이 약한 미국이 출항금지법 같은 강경책으로는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을 한번 체험하였기 때문에, 매디슨은 좀더 유화적인 방향의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당사국들이 미국의 중립을 인정하고, 미국 소속의 선원과 선박 등의 안전을 보장한다면 무역을 재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프랑스가 이에 호응하면서 어느정도 성과가 있었지만, 영국은 여전히 미국의 정책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매디슨은 영국과의 통상을 금지하고, 의회에 요청하여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1812년 전쟁초기 영국은 프랑스를 상대해야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군대가 유럽에 있었고, 이에 방어적인 전략으로 일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퍼슨의 집권시기부터 미국은 군대를 축소하고 있었고, 영국에 우호적이었던 연방당의 반대와 전쟁에 부정적인 국민들의 반발로 제대로된 전쟁 수행 능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영국의 케나다 지역의 식민지에 대한 미국의 공격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반면 영국의 사기는 크게 올랐는데, 1814년 막강한 해군을 이용하여 미국의 해안을 급습한 영국군은 수도 '워싱턴DC'를 장악하고 '워싱턴 방화'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통령 관저도 불에 탔는데, 영국군이 물러간 후에 관저를 복구하면서 흰색 페인트로 칠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백악관'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또 의회도서관도 불에 탔기 때문에 보관되어있었던 장서들이 모두 소실되었는데, 제퍼슨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장서 '6,487'권을 헌납하여 복구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또 1812년에는 전쟁의 와중에 대통령 선거도 있었는데, 매디슨은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상당한 차이로 재선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이후 '퐁텐블로 조약'이 맺어지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일단락되었고, 이어서 '헨트 조약'을 체결하여 미국과 영국은 휴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통신환경이 열악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일부 영국군이 루이지애나를 침공하였다가, 1815년에 벌어진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 전투로 미국에서 영국에 대한 반전감정이 사라졌으며, 외적에 대해 일치단결 할 수 있게 되었고,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영국을 지지하였던 연방당은 이를 계기로 완전히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전쟁을 '미영전쟁'(1812년 전쟁) 혹은 '제2차 독립전쟁'이라고 부른다. 또 미국의 혼란한 시기를 틈타 바르바리 국가들이 미국의 지중해 무역선을 약탈하였기 때문에, 미국은 종전이 되자 함대를 파견하여 이를 해결하도록 하였다. '제2차 바르바리 전쟁'에서 미 해군은 대승을 거두었고, 포로로 잡힌 선원들을 석방하도록 하였으며, 배상금을 지급받았다. 또 전처럼 지중해 지역에서 통행세를 지불하지 않고 항해할 수 있는 권리도 다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버지니아 대학의 총장

1817년 대통령 임기를 마친 매디슨은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왔다. 이후 농장을 경영하면서 제퍼슨이 버지니아 대학을 설립하는 것을 도왔고, 때때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1826년에 제퍼슨이 사망하자 매디슨이 뒤를 이어 '버지니아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하여 계속 대학을 운영하였고, 1836년 85세의 나이로 심부전으로 사망하였다. 매디슨은 미국의 연방 헌법이 탄생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여, '건국의 아버지' 중 한명으로서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다. 또 제퍼슨처럼 노예 제도에 반대하였고, 노예제 폐지에 대한 연설도 하였지만, 결국 죽을때까지 대농장주이자 노예주인의 삶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매디슨은 노예들에게 상당히 관대하였고, 일부 노예들은 교육을 받아 글을 읽거나 수학을 교육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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