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제국의 흥망성쇠를 이끈 「예니체리」
- 역사
- 2023. 7. 9.
오스만 제국의 상비군
'예니체리'는 1364년 오스만 제국이 세번째 군주였던 '무라트 1세'가 처음 창설하였다. 이는 술탄의 개인 노예인 '카프쿨루'(Kapıkulu Ocağı)에서 시작한 것으로 초기에는 전쟁포로들이나, 술탄이 개인적으로 사들인 노예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술탄의 직속 부대는 기병대로 구성된 '카프쿨루 스파히'와 보병 중심의 '예니체리'로 구성되었다. 예니체리의 어원은 튀르크어의 '예니센'으로 '새로운 병사'라는 뜻인데, 이는 술탄이 노예들을 중심으로한 직속 부대를 창설한 이유와 관련이 있다. 오스만 제국은 '오스만 1세'를 중심으로 많은 튀르크계 유민들이 모여 만들어진 국가였기 때문에, 건국에 힘을 보탠 튀르크계 이슬람 학자나 종교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강했고, 군사적으로도 필요에 따라 국내의 무장세력들이 소집되어 힘을 모으는 것으로 장악력이 약하여, 술탄의 위치는 견고하지 못하고 항상 위태로울 수 밖에 없었다. 예니체리는 이러한 불안정한 정권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알라와 술탄의 명령만을 듣는 친위대이자 상비군으로 조직되었다. 예니체리들은 평시에는 수도를 경비하며 일종의 경찰관이나 소방관 같은 역할들을 하였고, 전시에는 최정예부대로 참전하여 활약하였다. 이들은 특별한 군복을 지급받았고, 상비군으로서 일정한 급료를 받아 생활하였지만, 신분은 어디까지나 술탄 개인의 노예로서 병영에서 생활하는 것만 허용되었으며, 결혼이 금지되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들은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이 증대됨에 따라 예니체리의 규모가 확장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데브시르메
예니체리는 당시에 상당히 특이한 군사조직에 해당하였는데, 현대에는 각 국가가 상비군을 보유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드믄 경우였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전쟁을 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자국민을 징집, 또는 소집하여 동원하였으며, 일정 규모 이하의 국가는 전적으로 용병에 기대기도 했다. 또 예니체리는 어찌되었든 신분상 노예들로 구성되었는데, 이 때문에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이교도인 기독교인들이 징집 대상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데브시르메'라는 제도에 따라 주로 발칸 반도의 기독교 가정에서 아이들을 선발하였으며, 이들은 튀르크어를 배우고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전문 교육과정을 밟은 후에 예니체리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모든 징집된 아이들이 예니체리가 된 것은 아니고, 적성에 따라 관료가 되기도 하였으며, 신분은 노예에 불과하였으나 능력에 따라 대재상의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 징집 과정은 술탄의 명령에 의해 강제로 진행되었으며, 교육 과정 또한 상당히 가혹하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자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조혼시키거나, 외국으로 보내 숨기거나, 선발하는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었는데, 데브시르메 제도는 출신 성분과 관계없이 개인의 능력에 따라 출세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선발 자격이 되는 가정에 입양을 보내거나, 선발되기 위해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엄격한 선발과 교육 절차를 거쳐 알라와 술탄에게만 충성하는 예니체리들은 기존의 기득권층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며, 술탄의 권위를 강화하고 오스만 제국의 중앙집권화와 관료화를 주도하여,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 예니체리들은 전문 군사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도 상당히 뛰어났는데, 이들은 여러무기를 손쉽게 다루고 사기도 높았기 때문에, 서유럽 일부에서는 '악마의 군단'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예니체리의 변질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니체리는 점점 변질되기 시작하였고, 점점 오스만 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존재가 되었다. '쉴레이만 1세'는 데브시르메를 통해 선발된 유능한 관료들과 예니체리들을 중용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대신 튀르크계 귀족들이 중앙에서 배제되면서, 균형과 견제라는 예니체리의 한가지 목적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 그의 황후인 '휘렘 술탄'은 오스만 제국의 첫 황후로서,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기 때문에, 이후로도 술탄의 여성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폐단을 낳았다. 여기에 덧붙여서 그의 아들인 '셀림 2세'는 제국의 통치는 뒷전으로 하고 하렘에서 술과 여자에만 빠져지내면서, 정치는 여성 술탄들과 재상들이 도맡아 하였고, 관료들과 예니체리들이 무분별하게 제국의 통치권에 도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단번에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한번 시작된 이상 시간이 지날수록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무라트 3세' 통치 시절에는 매관매직이 횡행하는 등 부정부패가 만연하였고, 늘어난 오스만 제국의 영토만큼 많은 예니체리를 충원하기 위해, 결혼이 허가되고 무슬림의 징집을 허용하는 등 예니체리의 규모가 급속하게 커지면서, 예니체리의 질적인 부분이 전체적으로 하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권을 얻기 위해 상공업 등에 개입하는 예니체리 스스로가 하나의 세력화되어 일종의 기득권층이 되었다. 결국 1622년 '오스만 2세'는 적폐세력화 된 예니체리들을 견제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이 계획이 누설되면서 예니체리들에 의해 폐위되어 목숨을 잃었다. 1632년 '무라트 4세' 통치시기에도 반란을 일으켜 궁전으로 몰려와 재상과 관료들을 살해하기도 하였고, 1637년에 무라트 4세는 본격적으로 데브시르메를 통한 예니체리 선발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공식적인 징집과 훈련과정이 폐지되자, 세습과 지원으로 충원되기 시작한 예니체리는 더 급속하게 적폐세력화 되기 시작하였다.
예니체리의 최후
예니체리는 마치 로마 제국의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처럼 상황에 따라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양적으로 늘어난 예니체리들의 특권을 유지하고, 급료를 지불하기 위해 제정적으로도 큰 부담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던 술탄들의 개혁 움직임은 번번히 예니체리들에 의해 저지되었고, 일부 술탄들은 폐위되거나 살해되기도 하는 등 반발이 극심하였다. 1789년 '셀림 3세'가 술탄으로 즉위하였을때, 오스만 제국은 이미 많은 영토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국가 재정적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개혁위원회를 세워 서유럽을 모델로한 개혁정책인 '니자므 제디드'를 추진하였다. 이 개혁안에는 서유럽식 신식 군대의 창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더 이상 군사적으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데 반해, 정치적으로 도를 넘어서 개입하는 예니체리에 대한 견제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개혁 내용에 대해 기득권층과 예니체리들의 반발이 심했고, 1805년 예니체리들이 '에디르네'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1807년에 셀림 3세는 폐위되어 수감되었다. 이듬해인 1808년에 세림 3세의 개혁을 지지하던 '알렘다르 무스타파 파샤'가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니예로 진군하였는데, 예니체리들은 셀림 3세를 살해하였지만, 알렘다르 무스타파 파샤의 군대가 콘스탄티니예를 장악하였고, '마흐무트 2세'가 술탄의 자리에 오르게되었다. 알렘다르 무스타파 파샤는 그 공으로 재상이 되었지만, 곧 예니체리들이 그의 저택을 습격하였는데, 그는 집을 폭파하여 스스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때 마흐무트 2세는 한번은 개혁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뒤에서 은밀하게 신식 군대의 육성을 계속진행시켰다. 마흐무트 2세가 준비를 완전히 끝낼때까지 무려 18년이나 걸렸고, 1826년 예니체리들은 예니체리 해체를 선언하는 마흐무트 2세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마흐무트 2세의 친위대에게 패배하여 막사로 후퇴하였고, 마흐무트 2세는 여기에 포병대를 동원하여 포격을 명령하였다. 곧 예니체리 반란군의 상당수가 전사하였고, 생존한 이들도 대부분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로인해 예니체리는 완전히 해체되었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