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오대십국시대 당나라를 멸망시킨 남자 후량의 태조 「주전충」
- 역사
- 2023. 7. 8.
일확천금을 꿈꾸는 빈농
'주전충'(朱全忠)의 본래 이름은 '주온'으로 852년 당나라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때 셋째라는 뜻으로 '주삼'으로 불리우기도 하였는데,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였기 때문에, 일가족이 먼 친척뻘인 부호 '유승'의 밑에서 소작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주전충은 농사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학문이나 무예를 익히는 것에 흥미를 두었는데, 이 때문에 게으르다고 유승에게 욕을 먹기 일수였다. 이 시기는 '당나라' 말기로 지역의 재정과 군권은 각지의 '절도사'들이 가지고 있었고, 이들을 포함하여 각지에서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나는 등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당나라의 조정이 지탱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소금 덕분인데, 당나라는 소금을 정부가 독점적으로 관리하였기 때문에, 생활필수품인 소금이 가져오는 막대한 이익으로 정부는 운영될 수 있었지만, 양질의 소금은 부자들과 관리들이 독점하였고, 소금값이 30배나 폭등하는 등 가난한 백성들은 삶이 더 팍팍하였다. 또 당나라는 이러한 소금을 통해 창출되는 부를 유지하기 위해 소금 밀매업자들을 '염적'이라 칭하고 강력하게 처벌하였으나, 많은 이들이 부를 쌓기 위해 소금 밀매에 뛰어들었으며, 안전을 위해 자기들끼리 일종의 조합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873년 당 희종 '이현'이 즉위하였는데, 이 시기 대기근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에 874년에 소금 밀매업으로 부를 쌓은 '왕선지'가 농민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켰고, 이듬해인 875년에는 같은 소금 밀매업자 '황소'가 이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때 본래부터 농사에 관심이 없었던 주전충은 형 '주존'과 함께 이 '황소의 난'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왕선지와 황소는 세력을 나누어 '장안'을 향했는데, '낙양' 방면으로 향하던 왕선지는 관군에게 항복했다가 다시 배신하는 등 갈팡질팡하다가 패배하여 전사하였고, 남은 이들이 다시 황소에게 찾아와 합류하였다. 이렇게 황소의 세력은 다시 급증하였지만, 황소도 관군과 맞붙는 것을 꺼렸고, 황소는 관군을 피해 세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중원을 떠돌게 된다. 그사이 형 주존은 전사하였지만, 주전충은 황소 밑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어느정도 높은 위치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 같다. 6년 후인 880년 황소는 계속 세력을 불려서 그 숫자가 60만에 이르렀고, 황소가 '동관'을 점령하자 희종은 수도 장안을 버리고 '성도'로 피신하였다. 그야말로 서문으로 황제가 도망가는 동안, 동문으로 장안에 진입한 황소는 국호를 '대제'로 정하고 나라를 세웠지만, 사실상 당나라는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황소에게는 장안과 60만의 군대 밖에 가진게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당나라의 장군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말 그대로 공수가 뒤바뀌게 되었는데 희종은 각지에서 병사를 모아 황소를 공격하도록 하였고, 황소는 장안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당나라에서는 죄인이었던 '돌궐' 출신의 '이극용'에게 병사를 주어 황소를 토벌하도록 하였고, 황소는 주전충에게 군사를 주어 이를 막도록 하였는데, 882년 주전충은 그대로 황소를 배신하고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결국 황소는 3년만에 장안에서 쫒겨났으며, 이듬해인 884년 관군에게 대패한 후에 자결하였다. 이 공으로 주전충은 '양왕', '좌금오위대장군', '하중행영부초도사'가 되었으며, 계속해서 당나라에 충성하라는 의미로 '전충'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이극용은 '진왕'이 되었으며, 당나라의 실권을 손에 넣기 위해 주전충과 경쟁하는 상대가 되었다. 또 일개 병사였던 '이무정'이 황소의 난과 이후에 벌어진 난리 때에 희종을 호위하면서 출세하여 성과 이름을 하사 받고 '영무정절도사'가 되었는데, 이후 이무정이 봉상절도사를 살해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888년에는 희종이 사망하고 동생 '소종'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이미 각지의 절도사들이 군권을 가지고 제멋대로 서로 싸우는 군웅할거나 다름없는 시기였고, 조정 내부에서도 환관들이 득세하는 후한 말기와 같은 형상이었다. 891년 조정에서는 이무정의 군권을 회수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이에 이무정은 군대를 일으켜 장안까지 쳐들어가서 소종을 협박하고, 당시 조정의 실세였던 환관 양복공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런 무도함에도 불구하고 소종은 아무런 힘이 없었고, 재상 '두양능'이 처형되었으며, 이무정은 '빙익절도사', '산남서도절도사'로 임명되었으며, '진왕'의 작위를 주어 달래었다. 900년에는 일부 환관들이 '광화정변'을 일으켜 소종을 폐위하고, 아들인 덕왕 '이유'를 황제로 옹립했는데, 901년에는 다시 반대파 환관들이 '천복정변'을 일으켜 이유를 폐위하고 소종을 복위시켰다. 903년 혼란을 틈탄 주전충은 이를 빌미로 군대를 이끌고 장안으로 쳐들어갔으며, 재상을 비롯하여 조정대신들과 환관들을 학살하였는데, 아주 어리거나 노쇠한 환관 30명을 제외하고 모조리 학살하였기 때문에, 후에 환관이 모자라서 농민들 중에 50명을 새로 뽑아 충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주전충은 소종에서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할 것을 종용하였는데, 그가 천도하면서 궁궐을 파괴하고 성을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마치 '동탁'이 천도하던 것과 비슷했다고 한다. 이 사이 소종은 이극용에게 도움을 청하여 난국을 극복하려고 하였고, 이무정도 주전충을 견제하기 위해 나섰으나, 904년 주전충이 '천우정변'을 일으켜 사람을 시켜 소종을 살해하면서 이러한 움직임들이 무산되었다. 주전충은 소종의 13세 아들 '이축'을 '애종'으로 다음 황제로 세웠으며, 이듬해인 905년에는 방해가 되는 소종의 아들들 9명을 모조리 살해하였다. 또 심복인 '이진', '장현운' 등의 건의를 받아 당나라에 충성하면서 명사 소리를 듣던 고관 38명을 붙잡아 낙양 교외의 '백마역'으로 끌고가 황하에 던져버렸는데, 이를 '백마의 화'라고 이야기한다. 한편 주전충과 이극용은 계속 대립하였는데 이극용은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정치적으로는 능력이 떨어졌고, '갈까마귀'로 불리우는 그의 군대도 용맹하기는 하였지만, 무질서하고 난폭하여 평판이 좋지 못하였다. 결국 이극용의 세력은 스스로의 잘못으로 와해되기도 하였고, 주전충에 밀려 하동으로 쫒겨나게되었다.
후량의 건국과 사망
907년 방해물을 다 제거한 주전충은 애종을 압박하여 선양을 받아내었으며, 이름을 '주황'으로 고치고 근거지인 '개봉'을 수도로 하여 국호를 '양'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구분하기 위해 '후량'이라고 부른다. 애종은 '제음국왕'으로 책봉되었으나, 이듬해인 908년에 주전충의 명에 의해 독살당했다. 사실상 당나라가 멸망하여 명분이 없어진 이무정은 '기나라'를 건국하였고, 이극용은 패배하여 실의에 빠져 사망하였는데, 죽기전에 아들 '이존욱'에게 복수할 것을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주전충은 나라를 운영할 만한 능력이 없었는데, 당나라를 좀먹고 있던 환관들과 대신들을 숙청한 것은 좋았으나, 그들을 대신할 만한 능력도 부하들도 없었다. 그와중에 이극용이 죽자 그의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갔지만, 후계자인 이존욱에게 두번이나 참패하고 만다. 912년 주전충은 두번의 패배로 상심하여 병에 걸렸는데, 그는 재위를 '주우문'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아들인 '주우규'가 이에 불만을 품었고, 군대를 이끌고 가 궁을 점령한 후에 주전충을 암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주우문은 반역을 꾀했다는 거짓 조서를 내려 처형하였다. 그러나 혼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이듬해인 913년에는 또 다른 아들인 '주우정'이 반란을 일으켜 제위를 찬탈하였고, 계속 남은 형제간에 권력다툼을 계속하다가 923년에 이존욱에게 패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이로서 후량은 건국한지 16년만에 멸망하게 된다. 이렇게 배신을 일삼고, 권력을 찬탈하였으며, 환관들과 고관대작들을 학살한 주전충이지만, 그 출신때문인지 유독 백성들에 대해서는 관대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는데, 그는 전투 중에 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면서 적에게 예속된 백성들이지만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게 식량을 나누어 준 적도 있고, 이극용과 내통한 관리가 백성을 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하자 용서해 준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