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오대십국시대 후주의 명군 세종 「시영」
- 역사
- 2023. 7. 10.
황제의 양자
'시영'(柴栄)은 921년에 태어났는데, 당시는 이미 오대십국시대에 들어선 시기로 '후량' 말기에 해당하였다. 시영의 아버지는 '시수례'인데, 그의 누이 '시씨'가 '곽위'와 혼인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시영은 어렸을때부터 고모부인 곽위의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곽위의 아버지 '곽간'은 본래 주자사를 맡을 정도로 고위 관리였지만, 곽위가 어렸을때 전사하여 이후로 곽위의 집안은 몰락했었다. 그러나 곽위는 18세에 군에 입대하여 용맹한 모습을 보였고, 후량과 '후당'을 전전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는데, '유지원'의 총애를 받아 그의 휘하에서 '시위친군도우후'가 되었다. 유지원은 '후진'의 절도사로 있었는데, 요나라 군대가 후진을 멸망시키고 돌아가자, 947년 세력을 이끌고 '개봉'에 입성하여 '후한'(남한)을 세우고 황제를 칭하였고, 이때 유지원을 따르던 곽위도 '추밀 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황제가 된 유지원은 겨우 10개월만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948년에 그의 아들 '유승우'가 나라를 물려받았는데, 당시 유승우는 겨우 17세의 나이밖에 되지 않았고, 또 이 시기에 메뚜기때와 수해로 인해 큰 피해가 일어나면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상황이 좋지 못하였다. 이에 곽위가 반란을 모두 진압하였으나, 유승우는 신하들의 견제로 인해서 자신의 권한이 축소되는 것에 우려를 느꼈고, 곧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하들을 일부 암살하였다. 이때 곽위는 '추밀사'로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였는데, 자신이 반란을 제압하고 요나라를 견제하는 등 공을 세웠음에도 유승우가 자신을 암살하려하자, 950년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곽위가 개봉을 공격하는 동안 유승우가 살해되었고, 곽위는 일단 유지원의 조카인 '유숭'의 아들 '유빈'을 옹립하였는데, 곧 유빈을 살해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후주'를 건국하였다. 유숭은 곽위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자 거병하여 '북한'을 세웠으며, 이름을 '유민'으로 개명하였다. 황제가 된 곽위는 부인 시씨를 황후로 추존하였는데, 본래 시씨는 곽위가 황제가 되기 이전에 이미 사망하였으나, 시씨는 그가 젊었을때부터 내조하며 그를 도왔기 때문에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또 어렸을때부터 자신의 집에서 지냈던 시영을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이는 시영이 젊었을때부터 곽위 휘하에서 계속 보좌한 이유도 있지만, 이미 곽위가 후한에 반란을 일으켰을때 유승우가 개봉에 있던 곽위의 가족들을 모두 죽였기 때문에 달리 후계를 이을 사람이 없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곽위가 시영의 능력을 꿰뚫어 봤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954년 곽위는 사망하면서 아무 걱정도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시영은 곽위의 양자가 되면서 한번 '곽영'으로 개명하기도 하였으나, 곽위 사후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다시 시영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평 전투
시영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때 32세였는데, 이에 북한의 유민이 복수의 기회로 보고 요나라에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유민은 4만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내려왔고, '소의절도사' '이균'이 이에 맞섰으나 패해 '상당'으로 후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시영은 본인이 직접 출정하려고 하였는데, 일부 신하들이 반대하였지만 이를 무릅쓰고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다. 후주군과 북한군은 '고평'에서 만났는데, 후주군은 아직 모든 부대가 합류하지 않아 위태로운 형세였다. 그러나 시영은 물러서지 않았고, 곧 후주군과 북한군 사이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후주군은 분전하였지만, 우익을 맡은 장수들이 기병을 이끌고 도주해버렸으며, 이를 본 보병 천여명이 갑옷을 벗고 북한군에 항복해버렸다. 승기가 북한군을 향하자 시영은 직접 나가 병사들을 독려하며 버텼는데, 이때 '조광윤'과 '장영덕' 등이 뛰쳐나가 분전하였고, 이들이 활약하면서 북한군의 기세가 꺾였고, 이를 지켜보고 있던 요나라는 말머리를 돌려 돌아가버려서 후주군은 가까스로 승리할 수 있었다. 이후 초저녁에 후군이 도착한 후주군은 다시 한번 북한군을 들이쳤고, 이에 북한군은 대패하여 물러났다. 이리하여 '고평 전투'에서 후주가 승리할 수 있었고, 그 공으로 조광윤은 '전전도우후', '영엄주지사'가 되어 큰 명성을 얻었다. 패배한 유민은 도망치며 후주의 병사들이 쫒아올까 두려움에 떨었고, 무사히 본거지로 돌아갔으나 패배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해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후 시영은 군대를 이끌고 기세를 몰아 북한의 영토로 쳐들어가 수도 '태원'까지 포위하였지만, 준비가 부족하여 군량이 다 떨어졌으며, 이를 충족하기 위해 일대를 약탈하면서 민중의 지지도 잃게되었고, 이내 포위를 풀고 퇴각하였다고 한다.
후주의 개혁
시영은 곽위의 통치시절부터 계속된 정책을 시행하여 농업종사자들에 대한 조세를 경감시켜주는 등 농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대주형통이라는 국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또 황제만이 지휘할 수 있는 '전전군'을 새로 편성하였는데, 이는 중앙군인 '금군'이 부패하고 약화되었기 때문에 이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더불어 전전군의 병사들은 절도사가 거느리는 수하들 중에 우수한 병사를 차출하여 충당하였기 때문에, 병권과 세금징수권을 가지고 있어 군벌화된 절도사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견제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시영은 폐불령을 내려 불교를 탄압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많은 불교신자들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하였다. 이는 종교를 이용하여 민중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지만, 경제적 문제가 얽혀있기도 하였다. 당시는 많은 이들이 세금과 병역을 피하기 위해 불교를 이용하였는데, 직접 출가하여 병역을 피하기도 하였고, 개인들의 재산이 사찰로 유입되면서 국가 제정에 안좋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또 시영은 구리의 사유화를 금지하는 법령을 반포하여, 국가에서 거두어들였다. 이는 중원이 분열되면서 구리를 얻기 힘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시영은 구리로 된 불상이나 범종도 몰수하였고, 이렇게 모인 구리를 녹여 화폐인 '주통전'을 제조・유통하여 후조의 경제규모를 늘리는데 사용하였다. 여담이지만 불교에서는 중국에서 있었던 4차례에 걸친 불교탄압에 대해서 '삼무일종의 법난'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중 일종이 바로 후주의 세종 시영을 일컷는 말이다.
만기친람
955년 증진된 국력을 바탕으로 시영은 천하통일을 위한 정복사업을 시작하였는데, 먼저 '후촉'을 공격하여 4개 주를 빼앗는 성과를 올렸다. 이어서 바로 '남당'을 공격하였는데, 3년여에 걸친 전쟁 끝에 958년에 남당의 황제는 항복하였으며, 시영은 장강 이북을 장악하였고, 남당을 복속시켜 국왕의 호칭을 쓰도록 격하시켰다. 그러나 그동안 후주의 군대는 시영이 직접 지휘할때는 잘 싸우지만, 그가 없으면 패배하였으며, 시영이 직접 지휘할때는 약탈을 금지하는 등 규율을 엄히 세우지만, 그가 없으면 무질서하게 약탈을 일삼는 등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남쪽을 어느정도 정리한 시영은 북쪽으로 기수를 돌려 요나라와 북한을 공격하였는데, 959년에는 '연운' 16개주 가운데 2개주를 확보하기도 하였지만, 시영이 원정 중 병에 걸렸기 때문에 퇴각하였고, 개봉에 독착하여 얼마 되지 않아 3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시영은 내정에 있어서도 군사 원정에 있어서도 하나하나 스스로 살폈는데, 이는 시영의 성격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당시의 혼란스러운 시대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시영이 황제로 즉위한지 5년만에 일찍 사망한 것은 이러한 과로 탓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시영은 열심히 후주를 다져 반석에 가깝게 만들어 놓았지만, 시영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한 것은 7세의 어린 아들 '시종훈'이었다. 이에 군부에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고, 960년에 '진교의 변'을 일으켜 장수들의 추대를 받은 조광윤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조광윤은 개봉으로 들어가 시종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하였고, 국호를 '송'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찬탈자들이 선양한 선대 황제들과 황족들을 죽인 것과 달리 조광윤은 시종훈을 살려주었으며, 송나라에서는 시씨 후손들을 대대로 우대하여 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