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전진을 이끈 명재상 「왕맹」
- 역사
- 2023. 7. 7.
철저한 실력주의자가 찾아낸 인재
'왕맹'(王猛)은 325년경 중국의 청주 북해국 극현에서 태어났다. 왕맹의 집안은 본래 중국 전국시대 때 '제나라'의 전씨 왕가 출신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당시 왕맹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여 삼태기를 엮어서 파는 것으로 생활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왕맹은 비록 가난했지만 외모와 자태가 빼어나고 학문에 관심이 많았는데, 다른 이들이 청담이나 즐기던 것에 반해, 그는 병서를 애독하며 실질적인 학문에 관심을 두었다. 또 왕맹은 기개가 높고 도량이 있어 사소한 일에 집착하지 않는 대범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얕보는 선비들을 온전히 상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왕맹은 학문을 익히기 위해 '화음산'에 들어가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였는데, 354년에 '동진'의 대장군이었던 '환온'이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여 '관중'에 이르러서 '패상'에 주둔하였다고 한다. 당시 왕맹은 30세로 아직 화음산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는 환온의 막사로 찾아가 환온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때 환온이 왕맹의 식견을 알아보고, 그를 동진에 부르려고 하였는데, 왕맹이 스승과 논의하여 거절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전진의 황족이었던 '부견'이 신하였던 '여파루'의 추천으로 왕맹을 등용하게 되었다. 오호십육국시대는 여러 이민족들이 중원의 각지를 차지하고 나라를 일으킨 시대로, 전진의 경우도 티베트계의 '저족'이 세운 나라로 이민족들이 우대받고 한족은 상대적으로 천대받았는데, 저족이며 전진의 황족이었던 부견은 왕맹이 가난한 집안의 한족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우대하였다. 부견이 왕맹을 대하기를 마치 '유비'가 '제갈량'을 대하듯 했다고 하며, 이러한 부견에 대해 왕맹도 진력을 다하여 보필하였다. 사실 부견은 사람의 출신성분보다는 능력을 존중하는 성향의 사람이었는데, 심지어 그 사람의 됨됨이도 보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실력주의자였다. 그러나 왕맹은 그 뛰어난 능력도 있어 다른 이들보다도 부견의 총애를 받았고, 실제로 전진에서 부견의 치세를 이끌어낸 일등 공신이라 할만한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부견의 이러한 과도한 실력주의는 후에 독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초고속 승진
357년 부견은 '수광정변'을 일으켜 스스로 '대진천왕'이 되어 전진의 군주가 되었고, 왕맹은 '중서시랑'으로 임명되었다. 당시의 오호의 국가들의 황제는 여러 부족들 중 가장 위세가 있는 부족의 족장 정도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황권 자체가 높지 않았고, 이 때문에 부족의 유력자나 다른 황족들에 의해 무시당하거나 반란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아서, 왕맹은 먼저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게다가 저족의 유력자들은 왕맹을 비롯해 새로 임명된 한족 출신의 관료들을 대놓고 무시했기 때문에 이러한 충돌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왕맹은 부견의 명을 받아 위세를 믿고 날뛰는 황족과 호족들을 법을 내세워 적극적으로 숙청하였고, 이에 모든 황족들과 신하들이 부견을 공경하게 되었으며, 백성들도 함부로 법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하여 나라의 질서를 바로 잡았다고 한다. 이러한 왕맹의 보좌를 바탕으로 부견은 농업과 학문을 장려하였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는 등 전진의 전성기를 불러왔으며, 백성들은 부견의 치세 아래에서 태평성대를 노래하였다고 한다. 그동안 부견의 신임을 받은 왕맹은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경조윤', '이부상서', '상서좌복야', '산기상시', '사례교위'를 역임하였는데,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왕맹은 행정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능력도 뛰어났는데, 366년에는 부견의 명으로 동진의 '형주'로 쳐들어가서 10,000여호에 달하는 백성들을 얻는 성과를 내었다. 367년에는 전진에 복속되었던 '강족'의 '염기'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농서'지역의 '전량'의 세력가인 '이엄'에게 의탁하였다. 이에 왕맹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 이를 진압하였으며, 이어서 전량의 왕 '장천석'이 공격해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또 이해에 전진의 황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5공의 난'이 일어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으나, 이들은 국내외로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368년에 왕맹은 '포판'을 함락시키고, 반란의 우두머리 중 한명인 '진공' '부유'를 처형하였다. 나머지 반란군도 진압됨에 따라 전진 내부가 정리되어, 부견의 황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369년에 동진의 환온이 '전연'을 공격하였는데, 전연의 황제 '모용위'가 부견에게 영토를 주기로 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전연은 부견의 도움과 명장 '모용수'의 활약으로 동진의 공격을 막아내었지만, 이후 모용수는 정치싸움에 밀려 전진으로 망명을 요청하였다. 이때 왕맹은 모용수의 망명에 반대하였지만, 부견이 이를 받아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부견은 능력있는 자는 적이었던 자도 신하로 두었으며, 반란을 토벌하고 나서도 주동자를 사면하고 휘하에 두는 등 유교에 입각한 일종의 덕치를 행하였다. 이 때문에 왕맹은 때로는 부견이 지시하기 전에 먼저 처벌을 행할 정도로 결단을 내리는 일도 종종 있었으며, 이러한 부견의 덕치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견제하며 전진의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도 하였던 것 같다. 어찌되었든 이후 모용위가 영토를 할양하는 것에 소극적으로 나오자 부견은 이를 빌미로 전연을 침공하였는데, 왕맹은 '도독관동대주제군사', '거기대장군', '기주목'에 임명되어 전연 공격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370년 왕맹은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가 전연을 멸망시켰고, 372년에 장안에 복귀하여서는 그 공을 인정받아 승상의 지위에 올랐다. 이후 전진은 376년까지 군소 세력들을 정벌하였고, 전량과 '대나라'를 정복하면서 화북평정을 이루게 된다.
왕맹의 사망과 전진의 몰락
전진이 한창 위세를 떨치고 있던 375년 왕맹이 5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당시 부견은 왕맹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대사면을 행하고, 스스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등 여러 노력을 하였지만 끝내 그를 살리지 못하였다. 부견은 왕맹의 죽음을 슬퍼하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였지만, 이후 정반대의 행동을 하면서 전진의 몰락을 불러오게 되었다. 왕맹은 죽기 전에 부견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함부로 동진을 공격하지 말고, 전진의 일원이 된 선비족과 강족을 경계할 것을 당부하였다고 한다. 당시 전진은 급격하게 영토가 늘어난데다가 국내에 여러 민족이 섞여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내부가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 뿐만 아니라 부견의 덕치로 인해 각 이민족 세력의 수장들이 그대로 살아있었으며, 전진의 벼슬을 받아 수도인 '장안' 인근에 거주하면서 기존의 자신의 세력의 일부도 그대로 거느리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부견은 능력있는 자라면 가리지 않고 중용했기 때문에, 부하들 중에 야심있는 자들도 많이 있었다. 왕맹은 이러한 점을 꿰뚫어보고 마지막으로 충언을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부견은 지금까지 전진이 이룬 성과와 천하통일에 대한 욕심에 빠져 이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383년 부견은 100만에 가까운 대군을 이끌고 동진을 공격하였으나, '비수대전'에서 참패하였다. 비수대전은 비록 전체 싸움에 일부에 불과했고, 이 원정도 전진에 있어서는 한번에 원정에 불과했지만, 부견과 전진에는 돌이킬 수 없는 실패가 되었다. 부견이 동진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전진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동안 부견 밑에서 숨 죽이고 있던 이민족들이 다투어 반란을 일으키고 각지를 차지하였으며, 부견에게 충성을 바치던 이민족 장수들도 부견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켜 전진은 갈래갈래 찢겨지고 말았다. 결국 장안은 반란군에게 점령당하였으며, 부견은 도주하였지만 이후 자신의 신임을 받았던 강족 출신의 장수인 '요장'에게 붙잡혀 살해당하였고, 전진도 얼마안가 멸망하게 된다. 왕맹은 행정 뿐만 아니라 군사지휘에도 뛰어난 명재상으로 제갈량이나, 후조의 '장빈' 등과 함께 중국 역사상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 중 하나이다. 특히 왕맹은 법가적인 면모와 유가적인 면모를 모두 보이며 철저히 현실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는데, 이는 모든 민족이 어울려사는 통일중국을 꿈꾼 이상주의자 부견과 함께하면서 균형을 이루어 전진에 태평성대를 불러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주의자인 부견 아래에서 현실주의자로서 균형을 맞추는 것은 필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왕맹이 병으로 무너지면서 균형이 깨진 전진은 이상을 실현하기도 전에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