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의 효문제 「원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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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출생과 관련된 소문

'원굉'(元宏)은 467년에 태어났는데, 본래 이름은 '탁발굉'으로 아버지는 '북위'의 황제 '헌문제' '탁발홍'이다. 원굉의 어머니 이씨는 369년에 자결을 강요당했는데, 이는 당시 북위에 외척을 경계하기 위해 황태자로 책봉될 경우 생모를 숙청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471년에는 5세의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였는데, 양위 후 헌문제는 스스로 태상황제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태후였던 문성문명황후 풍씨에 의한 것이었는데, 풍태후는 헌문제의 계모로 이미 헌문제의 통치시기부터 정치에 개입하고 있었고, 헌문제가 성장하여 권력을 놓고 대립하게 되자 폐위되었다. 헌문제는 이후 476년에 22세의 나이로 풍태후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한다. 풍태후는 원굉이 어린 것을 이유로 계속해서 실권을 쥐고 정치에 개입하였고, 이는 사망하는 49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풍태후는 이러한 전횡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수완이 상당하였는데,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는가 하면, '반록제'나 '삼장제', '균전제' 등 여러 개혁을 실시하고, 중앙 재정과 지방 제정을 분리하는 등 중앙집권화에 힘썼다고 한다. 이러한 풍태후의 제도와 개혁들은 원굉의 통치시기에도 계속이어졌으며, 이후 북조 국가들에서도 계속 계승되어 수당시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풍태후가 죽자 원굉은 5일 동안이나 식사를 하지않고, 넉달 동안 정무를 보지 않으며 슬퍼하였는데, 원굉이 아주 어렸을때 풍태후에 의해 젊은 헌문제를 폐하고 즉위한 점과 더불어, 원굉이 실은 풍태후의 자식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당시부터 있었다고 한다.

한화정책

북위는 선비족이 세운 국가로 피지배계층은 한족이나 한족화된 이민족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지배계층은 선비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풍태후는 '후연'의 왕족으로 한족계통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는 그녀가 실시한 정책들이 과거 한족 국가들의 제도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원굉이 직접 통치를 실시하고나서부터 이러한 경향을 더 심해지기 시작하여 본격적인 한화정책이 시행되었는데, 원굉이 집권한 시기의 관료들이 이미 풍태후의 심복들이었던 것과 원굉이 풍태후의 정책을 계속 이어받은 것을 보면, 이는 풍태후 사망이전부터 이미 예정되었던 것으로도 생각되어진다. 원굉은 자신의 성을 선비족 성인 탁발에서 한족 성인 원으로 개명하였으며, 선비족 귀족들에게도 한족 성을 하사하여 개명하도록 하였다. 또 선비족의 고유언어와 풍습을 금지하고, 한족의 언어와 풍습을 따르게 하였으며, 적극적으로 선비족과 한족 간의 결혼을 장려하였는데, 이는 민족융화를 떠나 사실상 한족화하는 것이었다. 나아가서 선비족 고유의 신앙을 금지하고, 제천의식도 치루지 못하게 하였으며, 사실상 국교를 유교로 바꾸고 공자묘를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그리고 선비족들을 씨족에 따라 나누어 분리해놓아, 그들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차단하려고 하였다. 이외에도 직접 농사를 지어 시범을 보이는 등 선비족들의 인식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493년에는 본래 수도인 '평성'을 떠나 '낙양'으로 천도하기도 하였는데, 반발이 엄청났기 때문에 '제'를 정벌한다는 핑계로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남하하여, 그대로 자리를 잡아 원정에 참여한 선비족 장수들을 설득하였다고 한다. 낙양은 중국 전체를 다스린다는 입장에서는 중앙에 있어 좋은 위치에 입지하여 있지만, 지형이 방어에 취약하고 경쟁국인 '남조'에 가까이 있어 위험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천도의 이유를 한화정책의 일환으로 단순히 한족 국가들을 모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많은 선비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실제로 496년에는 황태자인 '원순'을 중심으로한 세력이 평성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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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제의 사망과 북위의 몰락

원굉은 생전에 한화정책을 시행하면서, 그로인한 불만을 강화된 황권을 토대로 억누르고,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는 등 효과적으로 통제하였지만, 499년 3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선무제'의 실정으로 많은 황족이 살해되었고, 손자인 '효명제' 때에는 다시 외척인 '영태후'가 득세하면서 국내가 혼란스러워졌으며, 523년에는 그동안 한화정책으로 인해 쌓인 불만으로 '육진의 난'이 일어나면서 본격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사실상 북위는 멸망하였으며, '서위'와 '동위'로 나뉘어졌다가, 이후 '북주'와 '북제'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원굉의 집권시절 시작된 한화정책은 이민족이 한족 위에 집권하는 중국 고대 국가들의 표본처럼 생각되어지며, 이후 '수나라'나 '당나라'에서 소위 한족화된 선비족들이 지배계층으로 활약하였고, 만주족의 '청나라'도 결과적으로 비슷한 노선을 타게되었기 때문에 높게 평가받는다. 또 원굉의 집권기를 북위의 최전성기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 한화정책이 불러온 반발이 방아쇠가 되어 북위가 멸망한 것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며, 이를 높게 평가하는 이들이 기본적으로 한족이라는 것을 염두하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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