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남북조시대 유송의 건국자 무제 「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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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미천한 출신

'유유'(劉裕) 363년 태어났는데, 그는 평민으로 태어났으나, 한고조 '유방'의 동생인 초원왕 '유교'의 21대손이라고 한다. 본래 유유의 집안은 서주 팽성 수흥리에 살았는데, 증조부인 '유혼'이 '영가의 난'으로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서, 장강 이남의 '경구'에 살게되었다. 유유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였는데, 어머니는 유유를 낳고 얼마안되어 사망하였고, 이 때문에 기를 형편이 안되었던 아버지는 몇번이나 유유를 버리려고 하였다고 한다. 유유는 큰 키에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났지만, 미천한 집안 출신에 글자도 겨우 읽을 정도로만 익혔기 때문에, 농사를 짓거나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생활하였다고 한다. 또 유유는 짚신을 엮어팔아 그 돈으로 도박을 즐겼는데, 한번은 도박으로 빚을 져서 잡혀 묶여있었는데, 평소 유유를 알고 있던 '왕밀'이란 사람이 빚을 대신 갚아주었다고 한다. 이때 왕밀이 유유에게 행동거지에 대해 조언한 것 같은데, 유유는 '유비'도 처음에는 돗자리 장수 였다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유비도 본래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라고 했으니, 따지자면 유비와 유유는 먼 친척이 되며, 두사람 다 미천한 신분에서 후에 나라를 다스릴 정도로 출세한 점도 비슷하다.

군사적 재능을 통해 출세

이후 유유는 '동진'의 군대에 병사로 입대하여 군생활을 하였는데, 399년에 동진에서 '손은'을 중심으로 난이 일어나자, '유뢰지' 밑에서 난을 진압하는 임무에 참여하였다. 유유는 처음에는 일개 병사로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으나,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수천에 달하는 손은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단신으로 이를 돌파하면서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번에 걸쳐 손은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점점 영향력이 커졌다. 401년 손은이 임해태수 '신병'의 공격을 받아 사망하면서 난이 진압되었는데, 이때까지 수차례에 걸쳐 군공을 세운 유유는 신분은 하급 군관에 불과했지만, 그 명성은 동진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당시 동진의 황제는 '사마덕종'이었는데, 그는 심각한 수준의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였으며 감각도 느끼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대소변도 가리지 못할 정도로 문제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사마덕종은 실질적인 통치가 불가능한 명목상 황제에 불과하였고, 실권은 이전부터 황실 친척이었던 '사마도자'와 '사마원현' 부자가 쥐고 있었다. 그러나 무능한 이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 보다는 권력을 행사하는데에만 관심이 있었고, 이러한 전횡이 계속되면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손은의 난도 그 중에 하나였다. 이는 후한의 전란이 이어진 중국의 삼국시대와 비슷한 상태로, 중앙에 조정은 있으나 그 힘을 잃고 있었고, 세력있는 군벌들이 각 지방을 차지하고 서로 견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유뢰지는 사마원현의 조정에 협력하며 손은의 난을 정벌하였지만, 결국 다른 반란 세력이었던 '환현'과 협력하기로 하였고, 402년 사마원현은 유뢰지의 배신으로 환현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당시 유유는 사마원현을 배신하고 환현을 따르려는 유뢰지를 말렸었다고 하는데, 유뢰지가 전진이 온전했을 무렵부터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손은의 난에서 군공을 세운 유유의 입지가 어느정도였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이후 유뢰지는 기대와 다르게 환현에 의해 지방으로 좌천되었고, 이에 불만을 품고 다시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유뢰지의 이번 반란은 세번째 배신에 해당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따르는 이가 없었고, 실의에 빠진 유뢰지는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 환현은 유뢰지의 시신을 참하여 처벌하고, 후환을 없에기 위해, 유뢰지 밑에서 종사했던 이들을 잡아 제거하였는데, 유유는 그 지위가 하급군관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403년 환현은 사마덕종이 선양하는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 받아 '초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했는데, 이때 먼저 유유에게 부하를 보내 본인이 황제에 즉위하는 것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유유는 속내를 감추고 환현의 의견에 찬성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유유의 명성이 널리퍼졌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하급군관에 불과하며 유뢰지가 죽고난 후에 이렇다 할 세력도 없는 유유에게 이러한 내용을 물어보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황제가 된 환현도 사마도자나 사마원현과 다를바 없이 무능하였기에 익주자사 '모거'가 나서서 반기를 들었고, 유유도 거병하여 환현을 축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이때 환현의 황후도 유유를 두려워해서 환현에게 그를 제거할 것을 제안했다고 하는데, 환현은 북쪽 영토를 되찾기 위해 유유 같은 영웅을 남겨두어야 한다며 거절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내용들은 후에 유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 과장된 내용으로 생각된다. 404년 유유는 사마덕종의 밀조를 받았다며 환현 토벌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켜 경구를 점거하였다. 인근에서 한현의 부하들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 유유는 소수의 인원만을 데리고 빠르게 수도 '건강'까지 진격하였고, 한현은 이에 놀라서 사마덕종을 데리고 자신의 본거지인 '강릉'까지 도주하였다가, 이후 모거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405년 사마덕종이 건강에 돌아와서 복위하면서 한현의 초나라는 사실상 멸망하였고, 하급군관에 불과했던 유유는 일약 권력의 정점에 다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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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평정

유유가 실권을 장악한 배경은 사마원현이나 한현처럼 사마덕종을 꼭두각시로 세운 것으로 같지만, 국가를 통치하는데에 있어서는 태도가 크게 달랐던 것 같다. 유유는 먼저 긴 혼란의 시기 동안 희생된 병사들을 위로하고, 시신을 고향에 뭍힐 수 있게 하는 등 민심을 달래었다. 또 토단법을 실시하여 본래부터 동진의 영토에 살던 이들 뿐만 아니라, 북쪽의 전란을 피해 피난 온 이들도 호적에 올려, 납세와 부역을 부담시켜 국력을 증진시켰다. 하지만 유유는 군사적 재능은 매우 뛰어났던 것 같지만 학문은 일천하였기에 동진의 실질적인 정무는 '유목지'가 담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유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군사적 성공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유유는 북쪽의 외적과 국내의 적들을 소탕하는 것으로 자신을 증명하였다. 먼저 유유는 '후진'에 사자를 보내 낙양 동쪽의 영토를 요구하였는데, 당시 후진의 황제 '요흥'은 별다른 이견없이 흔쾌히 수락하였다고 한다. 409년에는 '남연'을 공격하였는데 수도 '광고'까지 이르렀고, 410년에 광고를 점령하여 남연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산동지방을 장악하였다. 이때 국내에서 손은과 환현의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유유는 신속하게 남하하여 이들을 진압하였다. 412년에는 형주의 '유의'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유유는 '왕진악' 등에게 토벌을 명하였고, 패배한 유의는 병에 걸렸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 '제갈장민'이 반란을 도모하였는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였다. 결국 그의 계획은 유유에게 누설되었고, 유유는 신속하게 군대를 이끌고가서 이를 제압하였다. 413년에는 '주령석'을 익주자사로 임명하여, 사실상 독립상태였던 익주를 되찾아오도록 하였다. 415년에는 형주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사마휴지'에게 살인을 저지를 아들의 죄를 물어 사형시키도록 하였는데, 사마휴지가 형을 집행하기를 주저하자 이를 명목으로 군대를 보내었다. 사마휴지는 처음에는 승리하였지만, 이후 격분한 유유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자 당해내지 못하고 후진으로 도망하여 망명하였다. 이때 방어하던 사마휴지는 절벽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유유는 절벽에 칼을 꽂아 계단을 만들면서 절벽을 기어 올라 공격하였다고 한다. 이로서 유유는 동진 내부를 완전히 평정하였고, 망명한 사마휴지를 명분으로 후진을 공격할 구실도 갖게 되었다.

북벌과 찬탈

416년 유유는 본격적으로 북벌을 시작하였는데, 왕진악, '단도제', '심전자' 등과 함께 다섯 갈래로 후진을 침공하였다고 한다. 이때 동진의 공격을 북위에서는 후진이 함락된 이후에는 자신들의 차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유유를 저지하도록 10만의 군대를 보냈는데, 유유는 700명의 병사와 병거(전차) 100승으로 각월진을 구축하여 이를 격퇴하였다고 한다. 왕진악과 단도제 등은 후진의 군대를 물리치고 '낙양'과 '허창' 등을 손에 넣었다. 417년에는 유유도 합류하였으며, 이들은 수도 '장안'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이로서 후진이 멸망하였다. 유유의 공적으로 동진은 남조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지만, 그는 '구석'을 받는 것을 거절하고, '상국'과 '공'의 작위를 모두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낙양에 있던 서진의 황릉들을 보수하게 하는 등 점령한 지역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얻기위한 행보를 보였다. 유유는 장안에 기거하면서 남은 북쪽 영토를 모두 점령하려고 하였던 것 같은데, 때마침 건강에서 정사를 책임지던 유목지가 병사하였다. 이에 유유는 국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것을 염려하였고, 북벌을 포기하고 돌아가기로 하였다. 유유는 귀환하면서 자신의 차남 '유의진'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보좌로 왕진악과 심전자를 남겨 놓고 철수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잘못된 선택은 일을 크게 그르치게 하였다. 당시 유의진은 겨우 12세의 나이로 그 기량도 유유 본인에 비해 크게 떨어졌으며, 반란이 일어날 것을 경계하여 유유는 일부러 사이가 좋지 않은 왕진악과 심전자를 남겨 서로 견제하도록 하였다. 418년 내분이 일어나 심전자가 왕진악을 살해하였으며, 심전자는 왕진악의 친척인 '왕수'에게 살해당했고, 왕수는 유의진에 의해 죽었다. 또 유의진은 군대를 이용해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기 때문에 민심을 잃었고, 결국 '북하'가 쳐들어와서 장안을 포함하여 관중지방 일대를 모두 빼았겼으며, 이 과정에서 유유는 많은 장수들을 잃었는데, 이 와중에 유의진은 살아서 건강으로 귀환하였다. 유유는 본인의 지위가 안팍으로 흔들리고, 많은 유능한 부하들을 잃게되자 조바심이 생긴 것같은데, 그는 그 동안 거절했던 구석을 받아들이고, 상국과 공의 지위에 올랐으며, 곧이어 송왕으로 임명되었다. 황제가 되기로한 유유는 아예 '참언'을 날조하여, 저잣거리에 거짓 예언을 퍼트리는 등 손을 썼고, 사람을 시켜 사마덕종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사마덕종을 이어 동생 '사마덕문'이 황제로 즉위하였으나, 420년 유유는 연회를 열어 장중에 은퇴를 시사하는 말을 남겼고, 그의 말이 은퇴와 더불어 찬탈을 의미하는 것을 깨닳은 사마덕문은 유유에게 선양을 하여, 제위를 넘겨주었다. 이로서 동진은 멸망하였고, 유유는 황제로 즉위하여 국호를 '송'으로 하였으며, 사마덕문은 영릉왕이 되어 사실상 은퇴하게 되었는데, 후환을 두려워한 유유가 손을 써 살해하였다. 유유는 죽은 사마덕문을 황제의 예로 대하여 장례를 치르도록 지시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나라의 혼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부득이하게 사마덕문을 해치게 되었기 때문에 배려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솔직히 누가 죽였는지 뻔한 상황에서 이러한 시늉도 하지 않는다면 자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아무리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하더라도 민심을 잃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어찌되었든 유유가 선양 받은 이후에 사마씨 일족을 멸문시켰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가 이후 전통처럼 이어져 약 500년후 북송의 태조에 의해 끝날때까지 수많은 황족 일가가 살해되게 된다. 혹자는 현대 중국에 사마씨가 별로 없는 이유는 이때 많은 사마씨들이 살아남기 위해 사씨나 마씨로 성을 고쳤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망과 유송의 몰락

유유는 희대의 명장으로 평민에서 황제의 자리에 까지 오른 인물이었지만, 사치를 멀리하고 시종일관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황궁 한켠에 자신이 농사지으면 살았던 시절에 사용하던 농기구와 등불 등을 가져다 놓고, 후손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노력하였지만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이렇게 후손이 변변치 못하다는 점도 유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유유는 황제가 된지 2년만인 422년 병사하였다. 당시 유유는 59세로 충분히 수명을 누렸다고 할 수 있으나, 그의 장남 '유의부'가 이때 16세로 자식들이 어렸기 때문에 후사가 불안하였다. 그래도 유송은 당대에 이룬 국가 치고는 혼란한 시기에도 상당히 길게 유지되었는데, 전폐제로 불리는 '유자업'이나, 후폐제로 불리는 '유욱'같은 이들이 황제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약 60년이나 계속이어질 수 있었다. 유송은 479년 마지막 황제였던 '유준'이 당시 실권자였던 '소도성'에게 선양하면서 멸망하였고, 자신의 증조할아버지인 유유 때에 생긴 전통에 따라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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